일주일 생활비만 들고 일본 취업행, 실패 후 돌아와 기어코 따낸 포스코 사원증
2030 청년의 취업분투기
일주일 생활비만 들고 일본으로 떠났다. 라면 스프에 10엔(약 100원)짜리 우동면을 풀어 먹으며 버텼다. 이자카야, 편의점, 패밀리 레스토랑, 한국어 강사 등 가리지 않고 한 달에 26일을 일해도 마냥 좋았다. 중학생 때부터 일본어에 관심이 많았던 한건웅(29) 씨의 경험담이다.
일본에 정착한 지 4년이 지나고 일본 생활의 안정을 찾아갈 무렵,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직장을 잃고 취업을 준비하던 한 씨는 중환자실에서 자기소개서를 쓰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이후 한국폴리텍대학 광주캠퍼스 그린에너지설비과(현 지능형에너지설비과)에서 산업설비를 공부한 그는 졸업 후 포스코 광양 제철소에 합격했다. 한 씨가 두 번째 꿈을 이루기까지 지나온 여정을 들었다.
◇일주일 생활비만 들고 떠난 일본
중학생 때부터 일본 영화와 드라마를 즐겨봤다. 자연스레 일본어에 관심이 많았다. “사촌 형을 따라 우연히 일본 영화와 드라마를 접했어요. 100편이 넘는 작품을 보다 보니 어느 순간 자막을 보지 않아도 내용을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영어나 중국어와 달리, 일본어는 한글과 어순이 같아서 배우기 쉽더라고요. 일본어능력시험(JLPT)의 가장 높은 등급인 N1을 목표로 일본어 독학을 시작했어요. 고등학교 입학 후에도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해 꾸준히 공부했죠. 덕분에 취업 전에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어요.”
201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주일 치 생활비를 들고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다. “3년 동안 일본어를 독학했는데,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한계에 봉착했어요. 일상 대화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거든요. 현지인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어요. 6개월의 시간을 흘려보내다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귀국 후 2014년 공군에 입대했어요. 2년간 군 생활을 하면서 미친 듯이 일본어 공부를 했어요. ‘다시 돌아가면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겠다’는 마음 하나뿐이었죠. 전역 후에는 일본어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어요. 예전에 못 읽던 한자를 다 읽게 됐거든요.”
2017년 3월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취업’이 아닌 ‘일본어 실력’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현지인과 직접 부딪혀야 언어 실력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자카야, 편의점, 패밀리 레스토랑, 한국어 강사 등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당시 휴대폰 달력을 열어보면 항상 일정이 빽빽했어요. 한 달에 26일을 일했거든요. 생활고로 라면 스프에 10엔(약 100원)짜리 우동면을 넣어 먹으며 지낸 적도 있는데요. 힘들기보다는 재밌었어요. 일본에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넓어지는 데 성취감을 느꼈거든요.”
2018년 9월 일본에 온 지 1년 6개월 만에 현지 IT 회사에 취업해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기획·마케팅 직무였다. “일본 홈페이지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주로 했어요. 또 한국의 문화나 특징을 잘 알아야 할 수 있는 마케팅 업무도 맡았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사진을 올리면 보상을 지급하는 등의 이벤트를 집행하는 일이었어요. 첫 1년간은 생활이 만족스러웠어요. 당시 시간당 최저임금이 850엔(약 8500원)이라면, 저는 1000엔(약 1만원)을 받았거든요. 번역 능력을 인정받은 덕이었죠. 6년 넘게 일본어 한 우물만 판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또 번역이 주 업무다 보니 대만, 중국, 베트남 등 여러 국적의 동료와 일했는데요. 덕분에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덜했어요. 저마다 다른 문화를 배우고 깊게 교류한다는 느낌이 들어 적응하기 수월했죠.”
일본인 아내를 만나 결혼식을 올렸다.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릴 때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왔다. 2020년 9월 갑작스러운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 “심정지가 와 중환자실에 입원했어요.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병원에서 지냈죠. 다니던 직장도 잃게 돼, 병원에서 자기소개서를 썼어요. 교통사고를 당하니까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좀 더 안정적인 직장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아버지가 폴리텍대를 추천했어요. 기술을 배우면 노후가 보장된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말이죠.”
◇일본 유학생이 기계설비 전공자가 되기까지
본격적으로 폴리텍대 입학을 준비했다. “처음 아버지의 권유를 들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어요. 한·일 번역을 하던 제가 기술을 배우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퇴원 후 집에서 쉬면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친형이 위험물기능사 자료를 보내줬어요. 시간을 흘려보내기 아까워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위험물기능사 필기시험에 붙자 마음에 작은 불씨가 일었어요. 적극적으로 폴리텍대 입학을 준비하기 시작했죠. 일본 생활에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사고 이후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몸이 성하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면접을 치렀다. 2021년 3월 폴리텍대 광주캠퍼스 그린에너지설비과에 입학했다. “대기업에서 다루는 대형 산업설비 취급법을 두루 배울 수 있는 전공은 그린에너지설비과가 유일했어요. 한 분야에 파고드는 게 아니라 대형 설비를 종합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게 취업에도 유리할 거라 판단했어요. 면접에서 과거 경험과 입학 후의 목표를 솔직하게 설명했어요. 면접관에게 ‘맥가이버 칼 같은 만능인’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진심이 통했는지 폴리텍대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입학한 첫날부터 졸업까지, 2년 내내 강의실 맨 앞자리를 사수했다. “학과 학생의 80% 이상이 관련 기술을 배웠던 학생이었어요. 기초 지식도 부족한 제가 버틸 수 있을까 싶었죠. 아니나 다를까 기본적인 단어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수업에 따라가려면 남보다 두 배의 시간을 투자해야 했죠. 기초 단어부터 공부해야 했으니까요. 절실한 마음으로 2년 내내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앞자리에서 수업을 듣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교수님에게 바로 질문했습니다. 처음 배우는 내용이라 힘들었지만,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절실한 마음 때문에 힘들다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학점 4.32로 졸업한 비결
그린에너지설비과는 설비·용접 분야에 특화된 전공이다. 플랜트·공조냉동기계·보일러 등 다양한 시설을 두루 다뤄 조선·중공업 등 여러 산업군으로 진출할 수 있다. “주로 대형 설비 관리 기술을 배웁니다. 이론 수업은 물론, 실습 환경이 잘 갖춰져 있어 설비와 배관을 직접 설계하고 관리해 볼 수 있어요. 실습 시간엔 설비 용접과 조립을 집중적으로 배웠습니다. 주어진 교육 프로그램을 잘 소화하면 저처럼 기술 베이스가 없던 학생도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커리큘럼이죠. 다만 개인의 노력이 선행돼야 합니다. 수업만 듣는다고 전문가가 되지는 않거든요. 내 것으로 체화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평일엔 학교에 다니고 주말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등록금과 월세를 충당했다. 학과 교수의 도움을 받아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기도 했다. “늦은 나이에 공부하면서 부모님께 손 벌릴 순 없었어요. 주말에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한 달에 100만원 남짓한 돈을 벌었는데요. 제 사정을 들은 윤상용 교수님과 오상철 교수님께서 근로 장학생으로 뽑아주셨어요.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주셔서 아직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2학년 2학기에는 롯데마트 방재실에서 일하며 현장 경험을 쌓았다. 대형 설비를 직접 다뤄본 경험이 취업에 큰 도움이 됐다. “다양한 이론을 배우고 실습 과정을 거쳤지만, 현장의 설비를 만져본 적은 없었습니다. 실무 경험을 쌓기 위해 취업 준비 전에 롯데마트 방재실 현장 실습에 지원했죠. 대형 마트의 에어컨이나 보일러 같은 설비는 가정용과 달리 아주 큽니다. 설비가 잘 가동하는지, 이상은 없는지 관리하며 실무 감각을 키웠습니다.”
공조 설비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입학했던 한 씨는 평균 학점 4.32로 졸업했다. 위험물기능사, 에너지관리기능사, 가스기능사, 공조냉동기계산업기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이론보다는 기출 문제를 반복 풀이해서 자격증을 따는 사람이 많은데요. 저는 기초 이론부터 충실히 공부했어요. 제가 공부하는 기술의 본질을 이해하고 싶었거든요. 단순히 문제와 답을 암기하는 학습법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레 학점도 잘 나오고 여러 자격증도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대기업 입사, 자격증보다 중요한 건
다른 기업에 지원하지 않고 한 우물만 팠다. ‘포스코 입사’를 목표로 설정했다. “중복 지원을 하면 자기소개서 내용을 다르게 적어야 하잖아요. 그 시간을 아껴 한 기업에 집중하는 게 합격률을 높일 거라 판단했어요. 포스코 홈페이지와 뉴스룸에서 기업 정보를 얻어 기업의 인재상을 분석했어요. 인적성 검사 준비는 따로 하지 않고, 시중의 책을 사서 문제 유형만 익히고 시험을 봤습니다.”
진심을 담아 자기소개서를 작성했다. “자격증이 없다는 이유로 지원을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저 역시 산업기사 자격증 없이 기능사 자격증 3개로 최종 합격했습니다. 자격증보다는 자기소개서가 중요했던 것 같아요. 자신의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게 핵심이죠. 저는 학교생활에 충실했다는 점을 담았어요. 그렇게 마지막 학기에 최종 합격했습니다.”
졸업 직후 포스코 광양 제철소 에너지부 발전공장의 ‘발전설비 운전’ 직무로 취업했다. 그토록 바랐던 안정적인 직장을 갖게 된 것이다. “제철소에서 철을 가공할 때 나오는 부생가스로 보일러와 터빈을 가동하는 일을 해요. 보일러와 터빈을 작동해 생산한 전기를 제철소 내의 대형 설비에 공급하죠. 잉여 전력을 한국전력공사에 팔기도 합니다. 보통 제철소에서 근무한다고 하면 철을 만드는 일을 떠올릴 텐데요. 제철소에도 다양한 직무가 있습니다. 서로의 일을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즐겁게 근무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근무하던 때와 비교하면 초봉이 약 3배 이상 늘었다. “현 직장의 초봉은 7000만원 초반대입니다. 일본에선 1년에 약 2400만원 벌었으니까 단순히 계산해도 3배는 더 버는 거죠. 아내가 말하길 일본에선 40대 이상의 부부의 합산 연봉이 약 7000만원 정도래요. 그 말을 듣고 나니 2년간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입학 당시 경제적 여유와 안정적인 직장을 갖는 게 꿈이었는데요. 그 목표를 모두 이뤄 현재를 즐기고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두고 고민 중인 이에게 일단 도전하라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소위 말해 인서울 대학에 가는 걸 중요하게 여기잖아요. 그러다 보니 기술 배우는 걸 부정적으로 보기도 해요. 하지만 기술은 한 번 배우면 정년까지 40년 이상 활용할 수 있어요. 심지어 저처럼 문외한이었던 사람도 전문가가 될 수 있죠. 2년만 고생하면 되니까 지금이 아니면 배울 기회가 없다는 마음으로 도전해 보세요.”
/진은혜 에디터, 주서현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