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은 내 신분을 증명하는 도구였습니다'
"북한에 가도, 일본에 있어도, 한국에 와도, '이게 아니다', '너는 못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거기 있는 사람들보다 더 잘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재일교포 3세인 박순아 씨는 일본 오사카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계 민족학교인 우리학교, 북한의 평양음악무용대학(현 김용균명칭 평양음악종합대학)을 거쳐 한국의 한국예술종합대학에서 가야금을 전공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왜 한국이나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를 늘 생각했다는 박씨는 "이제야 나밖에 할 수 없는 음악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분단 이후 남북의 가야금은 확연히 다르게 발전했다. 각기 다르게 개량한 결과 북한은 21현을, 남한은 전통 그대로의 12현과 개량된 25현 가야금을 주로 쓰게 됐다. 이후 양쪽의 연주 방법도 조금씩 달라졌다.
때문에 서울과 평양 양쪽에서 가야금을 전문적으로 배운 박씨는 남과 북의 가야금을 모두 연주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연주자다.
박씨가 BBC에 가야금을 따라 경계를 넘나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조선사람임을 증명해주는 도구 같았어요'
“악기도 좀 예쁘게 생겼고, 내가 특별한 걸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북한의 지원을 받는 민족학교인 우리학교의 초등학교 4학년 재학중 그는 북한이 보내준 가야금에 매료됐다.
“학교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면 엄청 차별이 심했어요. 1980년대만 해도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직장도 못 구했고, 학생들은 아르바이트도 못 했어요.”
박씨는 유년 시절 접한 가야금이 “조선사람이라는 걸 증명해주는 도구” 같았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일본에서 한국의 전통악기를 배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방문 공연을 온 평양 학생들의 연주를 보며 “우리는 그냥 장난감 정도의 수준”이라고 느꼈다.
“내가 왜 북한에서 안 태어났을까, 부모님을 원망할 정도로 평양에서 온 애들이 너무 잘하더라고요.”
그러던 박씨에게 직접 평양에 갈 기회가 찾아왔다. 북한이 조총련계 학생 중 일부를 선발해 평양에서 일정 기간동안 교육하는 통신교육생으로 선발된 것이다.
박씨는 17세 때부터 4년간 매년 여름 평양음악무용대학으로 건너가 한 달의 통신교육을 받았다.
평양에서 북한식 가야금을 배우다
“처음 갔을 때는 너무너무 감격했어요. 난생 처음 해외를 나간 거기도 하고, 말로만 듣던 우리 나라가 이런 곳이구나 싶었죠."
원산항을 통해 처음 한반도에 발을 디딘 박씨는 평양으로 이동해 본격적으로 가야금 교육을 받았다.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오전, 오후 수업을 받고 밤이면 돌아와 호텔에서 연습하는 생활을 한 달 동안 했어요.”
박씨는 5대 명창 중 하나로 꼽히는 김창환 명창의 손녀인 한동렬 당시 평양음악무용대학 교수에게 가야금을 배웠다.
“일본에선 선배들이나 평양 학생들이 하는 걸 보고 따라하는 정도였다면, 평양에서 선생님을 만나고부턴 아예 초보자처럼 뜯고 농현(왼손으로 줄을 울려 소리를 내는 것)하는 걸 기초부터 배웠죠.”
북한에서는 1960년대부터 전통악기 개량 사업이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예술은 인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으로 실용적이고 현대적으로 악기를 개량하기 위한 시도였다.
가야금 역시 기존 동양식 5음계의 12현에서, 7음계 기반의 21현 가야금이 보편화됐다. 박씨는 평양에서 이 21현 가야금과 북한에서 발전한 산조를 주로 배웠다.
산조는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한 국악의 한 형식으로, 조선시대 궁중과 상류층에서 주로 연주된 정악 형식과 대비된다. 초창기 산조 형식을 발전시킨 정남희, 최옥삼 등 명인들이 대거 월북하면서 북한에선 산조 형식이 주로 발전했다.
“산조는 주로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으로 진행해나가는 방식의 음악이고 좀 길어요. 그런데 북한에서는 이걸 5~6분 정도로 짧게 해서 대중들이 듣기 편한 형식으로 조금 바꿨죠. 기승전결도 좀 더 확실하게 했고요.”
박씨는 당시 평양에서 산조를 자세히 배웠다.
“옛날 산조는 이랬고, 지금 북한에서는 이렇게 변했고, 그래서 이렇게 연주하는 거라는 걸 되게 자세하게 가르쳐주셨어요.”
4년의 통신교육생 생활을 마친 박씨는 대학 졸업 후에는 바로 금강산가극단이라는 조총련계 예술 단체에 들어갔다.
“프로 연주자로 돈을 받고 일할 수 있는 무대가 금강산가극단밖에 없었어요. 일본에서 조선의 가야금을 해서 먹고 살 수 있다고는 생각이 안 드니까요.”
금강산가극단은 북한이 조총련을 통해 지원하는 재일교포 예술단체다. 박씨는 일본 전역을 돌며 공연하고 매년 평양 방문 공연도 하며 생활했다.
나머지 반쪽에 대한 갈증으로 택한 한국행
그러던 박씨는 2005년 국적을 바꿔 한국으로 건너왔다. 북한에서 채우지 못한 나머지 반쪽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북한에서 없어진 음악들을 남한에서는 지키고 있더라고요. 뿌리는 같은데 나는 한쪽밖에 못 배운 거잖아요. 이거를 알아야 내가 진정한 국악인으로 당당하게 설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북한에서 없어진' 가야금 형식은 ‘정악'이다. 산조 형식을 주로 발전시킨 북한에서 19세기 이전까지 주류였던 정악은 뒤로 밀려났다.
가야금의 나머지 반쪽인 정악을 배우기 위해 박씨는 2005년 적지 않은 나이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 입학한다.
‘조선적'이던 재일교포인 박씨에게 한국행은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박씨는 한국 국적으로 바꿔야만 한국에 올 수 있었고, 이는 조총련계와의 단절을 의미했다. 이전까지 박씨는 '조선적'이라는 특별 영주권 자격으로 일본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자이니치'라 불리던 재일동포들은 박씨의 조부모님처럼 대부분 해방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왔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분단 이전의 조선을 조국으로 생각했기에 분단 후에도 한국과 북한 중 어느 한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은 북한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조총련계 재일교포들은 북한 국적을 취득할 수도 없었다. 일본 정부는 대신 '조선적'이라는 특별 영주자격을 부여했다. 해외 출국, 취업 등 여러 문제로 인해 대다수가 한국이나 일본 국적을 취득했으나, 현재까지도 약 3만 명의 재일교포들이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다.
"그 시대에는 금강산 가극단을 그만둔다는 건 북한을 배신한다는 말이었어요. 하지만 사람하고의 연민이랄까 그런 것보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꿈이 더 컸던 것 같아요."
박씨는 직접 부모님의 호적을 찾아 국적을 바꿔 한국에 왔다. 처음 발을 디딘 공항에서, 박씨는 의외로 북한과 많이 다르지 않음에 놀랐다고 전한다.
"북한이랑 냄새랑 색채 같은 것들이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공항에 내린 박씨를 처음 사로잡은 건 북한과 비슷한 한국 특유의 냄새였다.
“특유의 냄새가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일본하고는 너무 다르고 북한이랑 비슷하구나 생각했어요.”
그렇게 한국땅을 밟은 박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 입학해 예술전문사를 취득했다.
“제가 배우고 싶었던 우리 국악의 역사를 배웠고, 실기쪽으로는 북한에서는 많이 안 하게 된 정악을 배웠고,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는 이제 잘 안 쓰는 12현 가야금을 배웠어요.”
박씨는 이후 한국과 일본, 중국, 미국 등 여러곳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식, 북한식 가야금을 모두 연주하는 것은 물론, 시대와 국적을 불문하고 다양한 연주자들과도 협연을 이어가며 경계를 넘어선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끝나지 않았던 정체성 고민을 넘어
이제야 가야금이 "팔다리처럼 몸의 일부가 된 것 같다"는 박씨는 이렇게 되기까지 모든 과정이 고통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 "유학을 올 때도 그렇고 뭔가를 얻을 때마다 항상 큰 걸 버려야 했어요. 지금도 똑같아요."
“예전엔 왜 내가 한국에서 안 태어났고, 왜 북한에서 안 태어났을까 그런 생각밖에 없었어요.”
박씨는 또 자신의 정체성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음악을 공부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국에 왔지만, 거기에 대해 (북한을) 배신했다는 식으로 안 좋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한국에선 북한식 가야금 연주를 했다고 하면 어디선가는 블랙리스트로 찍힐 수도 있고, 그런 안타깝고 슬픈 현실이 있어요.”
어디를 가나 이방인이었던 환경에서 가야금을 배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북한에 가도, 일본에서도, 한국에 와도, 여기 가면 이게 아니라 하고, 이쯤 오면 또 이것도 아니다 하더라고요. ‘왜 내가 거기서 태어났을까’ 하는 자괴감이랄까 그런 것밖에 없었어요.”
박씨는 그러면서 “더 잘하고 싶어서, 여기 사람들보다 더 잘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고 말한다.
“지금은 나밖에 할 수 없는 음악이 있고, 나밖에 전달하지 못하는 감정이나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어요.”
박씨의 공연은 여느 가야금 공연과는 다르다.
2019년엔 지금은 북한에서도 연주하지 않는 1960~70년대 스타일의 북한식 가야금을 재현한 공연 '노쓰코리아 가야금 - 사라진 시대의 음악'으로 주목을 받았다.
지난 8월 23일과 24일 양일간 이어진 공연에서도 박씨는 '눈이내린다' 같은 북한 민요를 가야금으로 편곡해 연주하는 한편, 일본 전통악기 후에와의 협연을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 낭독과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음악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구성이 되더라고요. 제가 잘할 수 있는 걸 하게 되고, 세상에 이야기하고 싶은 걸 음악을 통해서 하는 거니까 그렇게 되네요. 그게 저의 정체성인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미래 계획을 묻는 질문에 박씨는 다시 나고 자란 일본으로 돌아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위한 일을 찾고 싶다고 답했다.
"저처럼 뭔가 더 배우고 싶은데 조건이 안 되는 아이들에게 제가 겪고 배운 것들을 알려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