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 유감, 씨(氏)는 과연 존칭인가? [말록 홈즈]
“안녕하세요, 김어원입니다. 지난번 부탁드렸던 자료 언제까지 받을 수 있을까요?”
“요즘 너무 바빠요. 김어원씨가 알아서 작성해 주세요.”
서른두 살 시절 이던 2006년 가을, 마케팅실에 요청했던 자료가 오지 않아 담당자와 통화했습니다. 상대방은 평소 자주 마주치고 업무미팅도 잦았던 스물네 살 마케팅실 여성 신입사원이었습니다.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부서는 달라도 마케팅실은 우리 부문과 업무적으로 가장 밀접했고, 직원들끼리 함께 MT도 다녀올 만큼 친했습니다. 1년 단위로 먼저 입사한 직원에게는 선배라고 불렀었는데, 여덟 살 아래 후배직원이 ‘씨’라고 부르니 뭔가 착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일은 마무리 지어야 해서 마케팅실로 찾아갔습니다. 그 자료가 왜 중요한지 설명하는데, 계속 ‘씨’라는 호칭이 이어지니 마음이 상했습니다.
“제 동기 이영두씨한테 선배라고 부르던데, 저한테는 계속 어원씨라고 부르시네요?”
“김어원씨는 마케팅실 소속 아니잖아요? 그것 때문에 일부러 찾아와서 항의하시는 건가요?”
그 직원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밖으로 뛰쳐나갔고, 저는 급속히 아주 나쁜 녀석이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잠시 후 마케팅실장님께서 이메일을 보내셨습니다.
“저도 사원시절 한참 어린 직원들과 호칭 문제로 갈등이 있었던 적 있습니다. 그 마음에 공감해요. 하지만 00씨도 예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호칭 규정이 모호해서 그랬을 겁니다. 선배로서 조금만 이해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랬습니다. 회사 호칭 규정에 ‘선배’는 없었습니다. 한참 선배님의 배려와 포용이 담긴 메일을 읽으니, 스스로가 너무 속 좁고 모질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과를 하러 다시 신입사원을 찾아갔습니다.
“미안합니다, 000씨.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아까는 좀 무서웠어요. 그런데 김어원씨도 저한테 씨라고 부르시잖아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그렇군요. 거듭 미안합니다.”
그날 저녁 마케팅실 동기와 소주를 마셨습니다.
“너는 여덟 살 어린 사람이 ‘씨’라고 부르면 어떨 것 같아?”
“어쩔 수 없잖아. 그나저나 너 신입 울렸다고 소문 다 났어. 목소리 크고 떡대도 다부진 애가 여리여리한 후배한테 왜 그랬냐? 한동안 자중해라, 김어원씨.”
“고맙다, 이영두씨. 씨 뒤에 한 글자 더 붙기 전에, 한잔 털자!”
파란만장하게 뜻깊은 하루가 정겹게 저물어 갔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씨(氏)’는 정말 애매한 호칭입니다. 국어사전은 ‘그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하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윗사람에게는 쓰기 어려운 말로, 대체로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쓴다는 설명도 덧붙입니다. ‘성씨 씨(氏)’자는 상형문자(象形文字: 모양 상, 모양 형, 글 문, 글자 자)로, 식물의 뿌리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습니다. 어떤 이의 가문 뿌리와 소속 집단을 가리킵니다.

이렇듯 한국어의 ‘씨(氏)’는 소속조직을 거쳐 경칭으로 자리잡은 반면, 주요 국가들의 존칭들은 그 자체가 존중의 의미에서 유래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씨’라는 호칭을 들으면, 존중이 아니라 ‘하대(下待: 아래 하, 대접할 대)’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부패한 ‘고관대작(高官大爵: 높을 고, 벼슬 관, 높을 대, 벼슬 작)’의 몰락이나 범죄자에게 붙는 수식어로 들립니다. 나쁜 놈들에게 붙여 부르는 모습이 워낙 흔하다 보니, 제대로 불리는 사람에게 묘한 불쾌감을 안기는 듯합니다. 병역기피자를 처벌하기 위해 군대에 보내니, 애국심으로 국방 의무를 수행하는 군인들에게 박탈감을 주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유감입니다. ‘유감(遺憾: 남을 유, 섭섭할 감)’은 상황이나 결과가 마음에 차지 않아,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을 가리킵니다. 씨의 활용 범위와 남발을 조정하지 않으면 많이 섭섭할 겁니다. 그나저나 잘못을 사과하는 자리에서는 “죄송합니다. 송구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합시다. ”유감입니다”를 남발하면 독방귀를 뀐 자가 격노하는 꼴입니다. 그 모습 보는 국민들이야말로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감수: 안희돈 교수(건국대 영어영문학과). 건국대 다언어다문화연구소 소장. 전 한국언어학회 회장
[필자 소개]
말록 홈즈. 어원 연구가/작가/커뮤니케이터/크리에이터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23년째 활동 중. 기자들이 손꼽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커뮤니케이터. 회사와 제품 소개에 멀티랭귀지 어원풀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어원풀이와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융합해, 기업 유튜브 영상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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