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거부하면 그만? 22대 국회도 '양치기 소년' 될까?

서어리 기자 2024. 9. 1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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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청문회로 떠오른 차금법…인권단체들 "野, 법 제정 안 나서면 안창호 비판 자격 없어"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지금까지 이어졌던 국가인권위원회의 노력은 마르크시스트들이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서 하는 주장이 반영된 활동이었습니까?"(조국혁신당 신장식 의원)

"평등법과 차별금지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 또한 필요하다고 하는 이유가 소수자의 입장이 존중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국제기구도 대한민국의 인권기구도 다 제정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의원)

"차별금지법이 도입되면 정말 에이즈, 항문암, A형 감염 같은 질병이 확산됩니까?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겁니까? (더불어민주당 부승찬 의원)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안창호 인권위원장 청문회를 계기로 오랜만에 정치권 이슈로 떠올랐다. 성별·인종·출신국가·종교·성적지향 등을 이유로 한 불합리한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차별금지법에 대한 언급은 2년 전 박홍근 당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연설을 끝으로 여의도에서 자취를 감췄었다. (☞관련기사 : 박홍근 "尹정부 인사 논란 점입가경...권력 사유화, 반드시 대가 치러")

당시 박 전 원내대표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첫 교섭단체 연설에서 "민주당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평등법 등 다양한 형태의 혐오와 차별을 막기 위한 사회적 공론화에도 본격 나서겠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국회 담장 안에서 차별금지법이 다뤄져 온 과정은 그야말로 수난의 역사였다. 지난 2007년 노무현 정부가 인권위의 권고로 정부안을 발의한 것을 시작으로 17대 고(故) 노회찬 의원, 18대 권영길 의원, 19대 김재연‧김한길‧최원식, 21대 장혜영‧이상민‧박주민‧권인숙 의원 등이 발의에 나섰지만, 차별금지법은 단 한 번도 국회 문턱을 넘기지 못했다. 발의된 법안이 수정되거나 철회되거나 임기 만료로 폐기되는 일이 수차례 반복됐다.

2007년 노무현 정부가 법안을 발의하자 재계와 보수 기독교계가 들고 일어났다. 기독교계의 조직적 저항에 정부는 결국 법안 가운데 '출신 국가', '언어', '가족 형태 또는 가족 상황', '범죄 및 보호처분 경력', '성적지향', '학력', '병력' 등 7개 차별금지 사유를 삭제했다. 그렇게 최초의 차별금지법안은 '누더기 법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로 폐기됐다.

법안이 철회되는 일도 있었다. 19대 국회였던 지난 2013년 민주통합당 김한길 의원 등 51명이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하였으나 역시나 보수 기독교계의 반발에 밀려 법안 자체를 철회했다. 곧이어 같은 당 최원식 의원 등 12명도 동일 법안을 발의했다가 얼마 못 가 항복 선언을 했다.

표면적으로나마 논의가 가장 활발했던 건 21대 국회였다. 4명의 의원이 대표 발의에 나섰고, 법안 발의 다음 단계인 공청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지난 2022년 5월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 차원에서 연 공청회였다. 그 후 박 전 원내대표가 교섭단체연설에서 차별금지법 추진을 언급하며 힘을 실어주는 듯했으나 동력은 거기까지였다. 21대 국회에서도 결국 기한 만료로 폐기되며 차별금지법 통과가 좌절됐다.

그 후로 내내 잠잠했던 국회를 꿈틀거리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보수 기독교계의 대표 격인 안창호 위원장이었다. 안 위원장은 그간 저서‧강의‧언론 칼럼 등을 통해 차별금지법과 성소수자에 대한 과격한 발언을 거리낌 없이 해왔다. 대표적 언사가 "차별금지법이 도입되면 에이즈, 항문암, A형 간염 같은 질병의 확산을 가져올 수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공산주의 혁명으로 간다", "자칫 성장기의 어린이·청소년들이 전체주의 세계관, 성적 지향 등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갖게 될 수 있다" 등이다.

안 위원장은 청문회에서도 이같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이를 눈 앞에서 실시간으로 지켜본 야당 의원들은 기함했다. 그러면서 안 위원장에게 "소수자의 입장이 존중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국제기구도 대한민국의 인권기구도 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는 것"이라며 차별금지법안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청문회 분위기로만 보면 22대 국회에서는 드디어 시민사회의 염원대로 차별금지법이 통과될 것만 같은 상황이다.

그러나 야당 관계자들은 차별금지법 제정 가능성에 대해 여전히 고개를 젓는다. 이번 청문회 이후 몇몇 의원실에는 역시나 항의 전화가 폭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나 야당 의원들이 안 후보의 자격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보수 기독교계를 함께 비판함으로써 야당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감이 더욱 심해진 것이다.

민주당 소속 의원실의 한 비서관은 "민주당이 차별금지법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고질적으로 반복돼 온 현상"이라며 "특히나 지역구가 있는 의원들은 지역에 있는 교계 반대‧민원 제기가 워낙 심하다 보니 선뜻 나서기 어렵다"고 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호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몇몇 의원실에서조차 '누군가 대표 발의를 하면 서명을 할 수는 있지만 대표 발의는 곤란하다'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각 의원실 보좌진들은 차별금지법안에 서명하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라고 한다. 한 번 '블랙리스트'에 올라가면 몇 년을 고생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의원실의 비서관은 "논의 자체가 안 되고 있다"며 "(당내 분위기가) 그렇지 않아도 대여 투쟁할 일이 태산인데 (보수 기독교계) 지지를 잃어 싸움의 동력을 잃으면 안 된다는 식이다. 대선 때도 그랬다"고 했다. 또 "우리가 국회에선 힘을 가진 1당이지만 법안을 통과시켜 봐야 대통령이 거부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실익이 없는 싸움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 같다. 진보적인 법안은 통과시키기 어려운 정국이 됐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때문에 인권단체들은 안창호 위원장에 대해 사퇴를 요구하는 동시에, 국회에도 법안 발의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국가인권위 바로잡기 공동행동과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안 위원장 청문회 다음 날인 지난 4일 기자회견을 열고 "국회에 요구한다"며 "차별금지법 제정, 성소수자의 권리가 청문회 정쟁의 '소재'가 아니라 한국사회 인권과 평등의 핵심적인 척도라고 여긴다면 지금 차별금지법 제정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몽 차제연 공동집행위원장은 특히 "어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목소리를 높이던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다"며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인 당시 이재명 (대선) 후보는 차별금지법을 '추진'하겠다고 답했지만, 성소수자 권리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겠느냐는 질의에는 침묵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안창호 후보자를 향한 야당 의원들의 질의에서 인권, 존엄, 평등, 소수자 존중, 온갖 말의 잔치가 벌어졌다"며 "그 말들이 살아있게 하는 게 차별금지법이고, 차별금지법 제정에 나서지 않으면서 안창호 후보자의 자격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꼬집었다.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 후보자가 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박찬대 위원장에게 선서문을 전달한 뒤 후보자석으로 돌아가고 있다. ⓒ연합뉴스

[서어리 기자(naeori@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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