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한자리서 편의점…두 번의 고비 이겨낸 힘은 결국 사람”[데스크가 만난 사람]
외환위기 터지자 해고 손님 급증… 2002 월드컵 때 손님들과 환호
최저임금 급등 땐 그만둘 생각도… 벼텨낸 건 결국 주변 사람들 덕분
“경기 안 좋으면 알바 몰려 씁쓸”
《1994년 10월 어느 날 밤. LG유통 영업담당 정재형 사원의 신혼집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밤 1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누구일지 단박에 감이 왔다. 전화기 너머의 한껏 풀 죽은 목소리, 역시나 ‘그’였다. 주섬주섬 옷을 꺼내 입는 정 사원에게 아내가 한마디 쏘아붙였다.
“대기업 다닌다더니.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주말이고 밤이고 불려 나가?”
결혼한 지 6개월밖에 안 된 아내에겐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정 사원이 투덜거리며 10여 분을 걸어 도착한 곳은 LG25 편의점이었다. 유리문 안쪽으로 넋이 나간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가 보였다. 본사에서 도착한 물건들은 박스째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짤랑짤랑’ 출입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는 구세주를 만난 양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발주 내용을 시스템에 넣는 게 너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불렀다고 했다. 이대로면 5시간이고 6시간이고 해뜰 때까지 못 끝낼 거라면서.
내가 맡은 점포인 걸 어쩌겠는가. 게다가 형, 동생 하며 친하게 지내기로 한 ‘그’의 부탁인데…. 세 살 형인 ‘그’도 신혼 5개월 차였고, 형수는 임신 중이라고 했다. 문을 연 지 한 달도 안 돼 아직은 버벅대는 거라고, ‘그’도 언젠가 익숙해질 거라고 정 사원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최형규 씨(61)는 2024년 9월 11일 GS25(옛 LG25) 30주년 경영 기념패를 받았다. 이젠 GS리테일(옛 LG유통) 편의점사업부 대표가 된 정 사원이 직접 패를 건넸다.》
LG유통은 1990년 12월 LG25 경희점을 시작으로 편의점 사업에 뛰어들었다. 2004년 LG와 GS가 분리되면서 LG유통은 GS리테일로, LG25는 GS25로 간판을 바꿨다. 현재 GS25 점포 수는 약 1만8000개. 최 씨의 서울 구로구 신도림점은 328호다. 30주년 기념패는 최 씨가 11번째, 한자리에서 편의점을 꾸려 온 건 그보다 적다.
“바로 옆 유리 가게 말고는 우리 편의점이 이 동네에서 제일 오래됐죠. 예전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니까요.”
신도림점은 대로변이 아닌 주택가 안쪽에 있다. 처음엔 거의 단독주택뿐이었다. 1985년 입주한 구로우성아파트 3개 동이 유일한 고층 건물이었다. 신도림역으로 이어지는 여관 거리의 투숙객들, 나중에 자리를 옮긴 제약회사와 철강공장 직원들도 종종 찾아오긴 했다. 그래도 손님 대부분은 동네 주민들이었다. 지금은 아파트가 줄줄이 들어섰고, 먹자골목도 생겼다. 최 씨의 편의점은 동네가 자라는 모습을 1만1000일 동안 고스란히 목격해 왔다.
● 낙(樂)
최 씨 동네도 2002년 여름은 뜨거웠다. 그는 월드컵이 시작하기 전 40인치 액정표시장치(LCD) TV부터 샀다. 그러곤 편의점 외부에 내걸었다. 한국 축구대표팀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편의점 앞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학생들이나 젊은 직장인들은 죄다 시청역, 강남역 같은 핫 플레이스로 몰려들었지만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모일 곳이 별로 없었다.
술집이나 호프집에 자리를 잡지 못한, 그러나 마음만은 청춘이었던 40, 50대들은 캔맥주 하나씩을 손에 쥔 채 편의점 앞 테이블 4개에 옹기종기 앉았다. 많으면 30명까지도 모였다. 붉은악마 공식 티셔츠가 없으면 목이 늘어난 빨간색 티셔츠를 아무거나 주워 입고 나왔다. 자녀들에게 부탁했는지 얼굴에 응원 문구 스티커를 붙인 이도 있었다. 동네에서 유일한 ‘실외’ 응원 장소다 보니 지나가던 행인과 차량이 모두 하나가 됐다.
“대∼한 민! 국! 짝짝짝 짝! 짝!”
최 씨는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안정환 선수가 연장전 골든골을 넣는 순간에 대해 “까무러쳐 쓰러졌을 정도”라고 기억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야 뭐, 다 친구가 됐지.”
가게 문을 연 지 8년. 동네 주민들과 안면을 트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경기 파주시에서 온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해 여름 대한민국의 모든 언어는 축구로 통했다. 구로동도 예외일 리 없었다. ‘응원 맛집’ 편의점은 그렇게 동네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갔다.
● 애(哀)
1997년 11월 22일 아침, 편의점으로 배달된 조간신문(동아일보)에는 ‘IMF에 200억 달러 요청’이라는 헤드라인이 대문짝만하게 걸렸다. 그 전에도 국제통화기금(IMF)이란 단어는 여러 번 들어는 봤었다.
“IMF? 그게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한 몇 달 지나니까 급격하게 변하더라고요. 담배나 술, 생필품 같은 걸 사람들이 사가질 않는 거예요. 매출이 뚝 떨어지니 낮에 일하던 아르바이트생부터 내보내야 했죠.”
편의점 맞은편 구로우성아파트는 은행원들이 모여 지은 ‘조합원 아파트’였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이 금융권이라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구로우성아파트 주민 역시 기업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해 가지 못했다. 최 씨는 “그저께까지 은행 지점장 하던 분이 평일 낮인데도 슬리퍼를 끌고 편의점에 와 담배를 사가더라”면서 “편의점 사업이 어떤지 물어오는 손님도 꽤 많았다”고 했다.
인근 거리공원에서 지내는 노숙인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편의점을 찾아왔다. 문 앞에 서서 손님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일도 허다했다. 경찰에 신고해도 한참 떨어진 곳에 데려다 놓는 것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술 한 병을 쥐여줘야 노숙인은 발길을 돌렸다.
이후에도 경기는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했다.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팬데믹 등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때다. 30년 경력의 편의점 경영주인 최 씨에겐 경기를 감별하는 그만의 잣대가 만들어졌다.
“경기가 좋으면 알바를 아무리 뽑으려 해도 전화 한 통이 안 와요. 그런데 경기가 별로 안 좋을 땐 구인 광고 한 번에 전화가 쏟아집니다. 애들이 직장 구하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거죠.”
최 씨는 거기에 한마디 덧붙였다.
“경기가 안 좋으면 취업이 어려운지 알바생이 몰려요. 요즘이 딱 그래서 씁쓸해요.”
● 노(怒)
최 씨의 편의점도 굴곡이 있었다. 처음 1년은 좋았다. 월 매출액이 초기 120만 원 언저리에서 180만 원까지 올랐다. 첫아들을 출산한 아내도 식품 대기업을 그만두고 육아를 하면서 편의점 일을 도왔다. 그래도 충분히 먹고살 만한 벌이가 됐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1995년 가을, 건물주였던 와이셔츠 제조 업체가 어려워지면서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다. 한 번 유찰될 때만 하더라도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유찰이 되니 목이 타들어갔다. 한 번만 더 유찰되면 채권 우선순위상 보증금 1억2000만 원을 그대로 날릴 판이었다. 거리에 나앉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다행히 골프웨어 업체가 세 번째 만에 건물을 낙찰받았다. 하지만 회사 오너는 1층에 쇼룸을 꾸미겠다고 통보해 왔다. 그는 몇 날 며칠을 찾아가 설득했다.
“빚을 지고 시작했는데 지금 나가면 정말 거지가 된다고 간곡히 사정했습니다. 딱해 보였는지 회장님이 ‘그럼 그냥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그 건물주와 20년을 함께했어요.”
또 다른 고비는 6년 전쯤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2017년부터 3년간 최저임금을 30%나 올리면서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함께 일하던 아르바이트생 3명 중 1명을 내보내고, 빈자리는 자신과 아내가 몇 시간씩 더 일하며 메웠다. 그것도 힘들어지자 나머지 아르바이트생도 주 15시간 미만씩 일하는 단기 아르바이트 여러 명으로 대체했다. 너무 급격한 인건비 상승을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최 씨는 “다른 자영업자들도 다 마찬가지일 텐데, 당시엔 정말 그만둬야 하나 여러 번 생각했다”면서 “인건비를 조금씩 올리면서 알바를 여러 명 쓰는 것과 빨리 올려서 알바를 줄이는 것 중 뭐가 애들을 위한 건지 한번 고민해봤으면 어땠을까”라고 했다.
● 희(喜)
최 씨는 이런저런 어려움을 모두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건 결국 사람 덕분이라고 했다. 정재형 사원은 초기에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달려와 줬던 동생 덕에 시골뜨기의 서울 적응기는 몇 달 만에 끝낼 수 있었다.
처음 같이 일했던 아르바이트생도 똑똑했다. 바로 앞 구로우성아파트에 살던 그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 앞 편의점에 이력서를 냈다. 연예인이 되고 싶다면서 대학수학능력시험도 치르지 않고 편의점에 출근했던 아이였다. 부모님께 미안하기도 했지만 내심 고맙기도 했었다. 3년 가까이 일한 그 아인 일을 그만두고 나서도 친구들과 몇 번을 찾아왔었다.
며칠 전 추석 연휴 때는 5년 전쯤 일했던 친구가 다녀갔다. 데려온 아기는 곧 돌을 앞두고 있다 했다. 캐나다인과 결혼해서인지 이름은 ‘올리비아’라고 지었다고 했다. 남편 직장이 있는 대전에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명절 때 부모님을 뵈러 왔다가 편의점 사장님이 생각나더란다. 최 씨와 아내는 그 친구가 가져온 작은 선물 보따리가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자주 오던 초등학생, 중학생 아이들이 다 커선 군대 다녀왔다고, 취직했다고, 또 결혼했다고 가끔 찾아와요. 알바로 일했던 친구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럴 때 정말 힘이 나죠.”
최 씨 아들은 이제 스물아홉,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대기업에 다닌다. 미대를 나온 스물일곱 딸은 노무사 자격증을 준비 중이다. 서른이 된 최 씨 부부의 편의점은 큰아들인 셈이다. 언제까지 하실 거냐는 물음에 “칠십? 아니 몸이 허락할 때까지”란 답이 돌아온다.
“30년을 내리 한자리에서 장사를 한 것 아닙니까. 여기 동네분들이 편의점이나 제 아들, 딸을 다 키워주신 거나 다름없죠. 그러니 제가 어떻게 여길 떠나나요. 하하.”
인터뷰를 마치겠다고 하자 최 씨는 서둘러 편의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좀 전에 아르바이트생이 받아둔 물건들을 정리해야 할 바쁜 시간대다. 그래야 직장인들이 퇴근하기 전에 새 물건을 진열해 놓을 수 있다고 했다. 구로동 주택가 편의점은 그렇게 또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지난 30년간 그랬던 것처럼.
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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