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시즌은 투수가 지배한다’는 말은 과연 사실일까 [경기장의 안과 밖]
“포스트시즌은 투수가 지배한다”라는 말은 야구에서 오래된 격언이다. 롯데 에이스 최동원이 혼자서 4승을 따낸 1984년 한국시리즈는 이 말을 진실처럼 보이게 한다. 1957년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는 밀워키에 3승4패로 패했다. 밀워키 투수 루 버딧은 3경기 모두 완투해 27이닝 동안 2점만 내주며 3승을 따냈다. 양키스 강타자 미키 맨틀은 시리즈 뒤 “월드시리즈에서 투구의 비중은 90% 이상”이라고 탄식했다.
올해 프로야구는 타고투저였다. 리그 평균 5.45득점으로, 43년 역사에서 네 번째로 점수가 많이 났다. 하지만 올해 포스트시즌 첫 시리즈인 와일드카드(WC) 결정전 2경기에서 4위 두산은 단 한 점도 내지 못하고 전패 탈락했다. 1차전에서 KT 선발투수 윌리엄 쿠에바스가 6이닝 무실점, 2차전에선 웨스 벤자민이 7이닝 3피안타 무실점으로 엄청난 투구를 했다.
중요한 경기에서 공격과 수비 중 어디가 더 중요하냐는 논쟁은 야구뿐 아니라 많은 스포츠에서 있어왔다. 야구에서 팀 수비력 대부분은 투수가 차지한다. 야수의 수비(필딩)보다 훨씬 크다. 1982년 원년 한국시리즈부터 2024년 WC 결정전까지 도합 122회 PS 시리즈와 244개 참가 팀을 분석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과연 투수들이 가을을 지배했을까.
포스트시즌 진출 팀들이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공격이 강한 팀도 있고, 투수력과 수비가 좋은 팀도 있다. 어떤 팀은 공격과 수비 균형이 맞춰져 있다. 판단 기준은 정규시즌 득실점을 리그 평균으로 나눈 값을 기본으로 삼았다. 득점과 실점은 고전적인 통계지만 팀의 공격력과 수비력을 가장 잘 보여준다. 득실점 차이가 일정 구간에 있으면 ‘균형’, 그렇지 않으면 공격이나 수비 중 한쪽 우세로 평가했다.
244개 팀 가운데 정규시즌 수비력(투구 포함)이 공격력보다 좋은 팀은 104개(42.6%)였다. 공격이 수비보다 좋았던 팀은 95개(38.9%). 45개(18.4%) 팀은 공수 균형이 이뤄졌다. 즉, 점수를 잘 내는 팀보다 잘 막는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확률이 더 높았다.
포스트시즌에는 당연히 상대 팀이 있다. 맞상대 팀들의 수비와 공격 능력을 상대비교했다. 역시 기준은 정규시즌 득실점이다. 위와 마찬가지로 수치 차이에 따라 우세, 균형, 열세로 나눴다.
대구 팬이라면 1987년 한국시리즈를 잊지 못한다. 연고 팀 삼성은 이해 경기당 5.40득점을 했다. 상대인 해태는 평균 3.64득점에 그쳤다. 득점 차이는 포스트시즌 역사상 가장 컸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서 해태는 삼성에 4전 전패 수모를 안겼다. 포스트시즌에 공격보다 수비가 더 중요하다는 야구 격언에 들어맞는 가장 극적인 사례로 들 만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122회 시리즈에서 수비 우위인 팀은 39회 시리즈 승리를 가져갔다. 비율로는 32.0%다. 수비 열세인 팀(28.7%)보다는 네 번 많지만 수비력이 비슷한 상대를 만났을 때(39.3%)보다는 떨어졌다. 반면 공격이 상대 우위인 팀은 122회 시리즈 중 48회(39.3%) 이겼다. 수비 우위 팀보다 아홉 번이나 많았다. 공격 열세 팀은 29.5%, 두 팀 공격력이 비슷할 경우는 31.1%로 공격 우위 팀에 못 미쳤다.
다른 방식으로 분석해도 결론은 마찬가지다. 역대 시리즈에서 한 팀이 수비 우위였던 적은 74회다. 공격에서 우열이 뚜렷했던 시리즈는 84회. 수비 우위 팀의 시리즈 승률은 52.7%(39회 승리), 공격 우위 팀은 56%(47회 승리)로 역시 공격 쪽 우세가 나타났다(아래 〈그림〉 참조).
역대 시리즈에서 공격 상대 우위가 가장 큰 팀 6개 중 1987년 삼성을 제외한 다섯 팀이 모두 시리즈 승리를 가져갔다. 2002년 삼성은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이해 삼성도 상대인 LG에 비해 마운드보다는 배트의 힘이 더 강했다. 6차전에서 우승을 확정 지은 건 9회 말 이승엽과 마해영의 9회 말 백투백 홈런이었다.
상위 팀에 유리한 ‘계단식 포스트시즌’ 제도
KBO리그 포스트시즌은 불공평하다. 정규시즌 순위가 낮은 팀은 바로 위 순위 팀과 차례로 시리즈를 치러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가는 ‘계단식’이다.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는 정규시즌 1위 팀보다 훨씬 불리하다. 계단식 포스트시즌 제도가 시행된 1989년부터 열린 한국시리즈 35회에서 하위 팀이 상위 팀을 꺾는 ‘이변’은 딱 다섯 번만 일어났다. 확률로는 14.3%다. 2015년부터 시행된 WC 결정전에서 4위 팀은 ‘1승 어드밴티지’를 얻어 유리하다. 올해 5위 KT의 승리가 10년 만에 처음 일어난 이변이다. 결국 시리즈 승패에 전력 외 요인이 강하게 작용한 셈이다.
그래서 ‘1989년 이후 한국시리즈와 모든 WC결정전’을 제외한 77회 시리즈를 대상으로 위의 분석을 다시 수행했다.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77회 시리즈에서 수비 우위 팀은 25회(32.5%) 승리했다. 공격 우위 팀이 29회(37.7%)로 네 번 더 많이 이겼다. 77회 시리즈에서 한 팀이 수비 우위였던 적은 51회이다. 이 팀은 25회 이겼다. 승률(49.0%)은 5할에 미치지 못했다. 공격 우위 팀은 53회 시리즈에서 29회 이겨 승률 54.7%를 기록했다.
결국 “포스트시즌은 투수가 지배한다”라는 명제는 한국 프로야구 포스트시즌 역사에서 ‘참’과 거리가 멀다. 역대 포스트시즌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성과를 보인 팀은 따로 있다. 상대보다 공격과 수비를 더한 전력이 더 좋은 팀이다. 역시 정규시즌 득실점에 기반해 일정 기준을 정한 뒤 전력 우세, 열세, 균형으로 포스트시즌 진출 팀을 평가했다. 통산 122회 시리즈에서 전력 우위 팀은 64회(52.5%) 이겼다. 수비 우위(32.0%)나 공격 우위(39.3%)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다. 전력 우위 팀이 존재했던 104회 시리즈에서 이 팀의 승률은 61.5%이다(18회 시리즈는 ‘전력 균형’ 상태였다). 결국 더 강한 팀이 가을에도 이겼다.
다만, 전력 우위 팀의 높은 승률은 ‘계단식 포스트시즌’의 덕을 봤다. 한국시리즈와 WC 결정전을 제외할 경우 전력 우위 팀의 승률은 55.6%로 떨어진다. 공격 우위 팀 승률(54.7%)과 차이가 거의 없다. 한국 가을야구에서는 뛰어난 투수들을 보유한 수비 우위 팀보다 공격이 더 강한 팀이 더 자주 이겼다.
최민규 (한국야구학회 이사)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