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영이 되고 싶은 걸까…약국의 반란
K약국, 제2의 'H&B스토어'로 진화
'전문성' 무기 앞세워 차별화

약국이 '화장품 매장'으로 변신하고 있다. 일반의약품 중심의 전통적 구조에서 벗어나 기능성 화장품 비중을 키우는 방향으로 체질 개선에 나섰다. 탄탄한 성분 신뢰도와 외국인 관광객의 수요가 맞물린 결과다. 업계에서는 그간 올리브영 등 H&B(헬스앤뷰티) 스토어가 주도해 온 뷰티 유통 구도에 균열이 생길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약국이야? 뷰티 편집숍이야?
최근 서울 명동과 홍대 등 관광지 일대 약국가에는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처방전을 든 환자 대신 쇼핑 바구니를 든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어서다. 이들의 장바구니를 채운 것은 감기약이나 파스가 아닌 재생크림, 항산화 앰플, 피부 장벽 개선제 같은 기능성 화장품들이다. 약국이 질병을 고치는 '치료'의 공간을 넘어 '뷰티 소비 채널'로 확장된 셈이다.
이에 맞춰 약국들도 빠르게 변신하고 있다. 대형 편집숍을 연상케 하는 명동 일대 약국들은 H&B스토어와 유사한 매장 구성을 갖췄다. 전면에는 노스카나, 애크논, 멜라토닝, D-판테놀 등 피부 관리용 연고·크림류가 배치됐다. 또 '약사 추천' 문구가 붙은 일반의약품과 함께 마스크팩, 세럼, 크림 등 일반 화장품이 한 공간에 진열돼 있다. 소비자가 직접 제품을 고를 수 있도록 한 진열 방식도 특징이다.

명동 일대는 이미 '약국 쇼핑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메가약국, 베리뉴약국, 피치유약국 등 다수 약국이 기존의 폐쇄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뷰티 편집숍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대표 사례로 꼽히는 '레디영약국'은 서울 마포·명동·서초·성동 등 주요 상권에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명동역 인근에만 2개의 대형 매장을 확보했다. 최근에는 부산 진출도 추진하며 전국 단위 확장에 나섰다.
이 같은 'K약국'의 인기는 데이터로도 확인된다. 한국관광데이터랩에 따르면 외국인의 의료 관광 지출액은 2020년 563억원에서 2025년 5618억원으로 약 10배 증가했다. 이 가운데 약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1년 38.24%에서 2025년 59.11%로 확대되며 피부과(22.07%)를 앞질렀다.
유통 방식도 고도화되고 있다. 제품을 약 효능이 아닌 '피부 고민별'로 구분하고, 테스트 공간과 다국어 안내를 도입하는 등 쇼핑 편의성을 강화했다. 세금 환급, 짐 보관 서비스까지 갖춘 곳도 등장했다. 다이소처럼 체류 시간을 늘리는 동선 설계를 도입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단순 판매를 넘어 체험과 탐색을 유도하는 구조로, 사실상 '제2의 올리브영'을 겨냥한 전략인 셈이다.
'드럭스토어'의 귀환 일까
이런 변화는 갑작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한국 뷰티 유통의 출발점 자체가 '약국 기반 드럭스토어'였기 때문이다. 1999년 CJ올리브영은 약국과 생활용품을 결합한 '한국형 드럭스토어'를 표방하며 출발했다. 초기에는 조제와 쇼핑이 공존하는 구조였다.
해외에서는 이 같은 모델이 보편화돼 있다. 미국의 CVS, 월그린즈(Walgreens), 영국의 부츠(Boots) 등이 대표적이다. 해외 드럭스토어는 의약품을 중심으로 화장품과 건강기능식품, 생활용품까지 한 공간에서 판매하는 복합 유통 채널로 자리 잡았다. 특히 부츠는 더모코스메틱과 프리미엄 화장품을 강화하며 '약국 기반 뷰티 유통' 모델을 고도화한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드럭스토어 모델은 한국에 안착하지 못했다. 국내 대표 뷰티 편집숍인 올리브영은 2008년을 기점으로 'H&B 스토어'로 사업 방향을 틀었다. 식품·헬스 중심에서 트렌디한 화장품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약국과 뷰티 유통의 거리는 멀어졌다.
이후 더모코스메틱의 성장이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약국 화장품은 해외 브랜드 중심이었지만, 2011년 닥터지(Dr.G)가 올리브영에 입점하며 흐름이 바뀌었다. 차앤박(CNP) 등 국내 더모 브랜드가 대중화되면서 기능성 화장품 시장도 빠르게 확대됐다.
결국 최근 약국의 변화는 과거와 현재가 맞물린 결과로 해석된다. 한때 분리됐던 '약국 기반 드럭스토어' 모델이 약국을 통해 다시 부상한 셈이다. 이는 올리브영이 선점했던 '전문성 기반 쇼핑'을 모델을 약국이라는 공간에서 재현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글로벌 드럭스토어와 유사한 방향으로 회귀하면서 '의약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차별화된 뷰티 유통 채널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다.
'K약국' 열풍 만든 변수
약국의 이런 새로운 시도는 수익 확대를 위해서다. 의약품은 가격 규제가 엄격하고 마진율이 제한적이지만, 화장품은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높고 회전율이 빠르다. 이에 따라 일부 약국은 매대를 기능성 화장품 중심으로 재편하고 자체 브랜드(PB)나 병·의원 연계 제품을 확대하며 체질 개선에 나섰다.
국가별 규제 차이에서 비롯된 '성분 경쟁력'도 핵심 요인이다. 국내에서는 일반의약품이나 기능성 화장품으로 판매되는 일부 고함량 성분이 해외에서는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외국인 관광객 입장에서는 한국 약국이 고기능 제품을 비교적 쉽게 구매할 수 있는 '허브'로 작용한다.
화장품 브랜드 입장에서도 약국은 매력적인 채널이다. 입점 자체가 성분 안전성과 효능을 인정받았다는 '전문성 신호'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일부 브랜드는 약국 입점을 더모 경쟁력의 지표로 활용하며 외국인 수요 공략에 나서고 있다.

다만 약국이 올리브영을 대체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올리브영은 상품 기획력과 전국 단위 네트워크, 대량 매입 기반 가격 경쟁력을 이미 확보한 상태다. 반면 약국은 점포별 편차가 크고 체험·브랜딩 역량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업계는 약국의 '틈새시장' 가능성에 주목한다. 트렌디한 대중 제품 중심의 H&B스토어와 달리, 약국은 '의약 전문성'이라는 차별화된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성분을 꼼꼼히 따지는 소비자들이 늘어날수록 약사의 상담을 기반으로 한 구매 경험은 경쟁력이 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약국은 단순한 뷰티 매장이 아니라 전문 상담이 가능한 고기능성 채널이라는 강점이 명확하다"며 "더모코스메틱 중심으로 포지셔닝을 강화하면 H&B스토어와는 또 다른 축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다이 (neverdie@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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