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던 고급 식당가에 새 숨결... 파인다이닝,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흥행에 모처럼 예약 전쟁

유진우 기자 2024. 10. 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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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영 한 주 만에 예약률 150% 올라
방송 속 메뉴 ‘직접 맛보자’
“외국인 관광객 유치 효과”

신음하던 파인다이닝(고급 레스토랑) 업계에 다시 온기가 도는 모습이다. 계기는 지난달 17일 넷플릭스가 공개한 요리 경연 예능 프로그램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흑백요리사)’의 인기다.

1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전국 음식점은 80만 개에 달한다. 대략 인구 65명당 1곳꼴이다. 이 가운데 저녁 한 끼 기준 수십만원 이상을 지불해야 하는 파인다이닝은 100개 남짓에 그친다.

2017년 세계적인 프랑스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숙명 아카데미가 실시한 국내 파인다이닝 전수조사에 따르면 호텔을 제외한 국내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전체 시장 규모는 1000억원 정도였다. 당시 국내 외식 시장 전체는 통계청 자료를 기준으로 119조원 규모였다. 상대적으로 비싼 파인다이닝 음식값에도 전체 외식 시장에서 비중은 0.01% 남짓한 수준에 그쳤다.

특히 엔데믹(감염병 풍토병화) 이후 파인다이닝에는 어려움이 닥쳤다. 경영자와 셰프들은 “식자재 물가와 인건비가 급등했지만, 소비자들이 해외로 나가면서 예약하는 사람은 줄었다”고 입을 모았다. 파인다이닝은 최상급 재료를 선별해 써야 한다. 요리사 숙련도가 중요해 인건비도 높다. 그러나 회전율은 일반 식당보다 떨어진다. 반주를 곁들이면 식사 시간은 3~4시간을 넘어간다.

NETFLIX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넷플릭스 제공

◇ 흑백요리사 인기에 출연자들 식당 ‘예약 전쟁’

팬데믹 시기 우후죽순 생겨났던 파인다이닝과 오마카세 가운데 자리를 채우지 못한 곳들은 올해 들어 줄줄이 문을 닫았다. 한때 예약을 가려 받을 정도로 콧대가 높던 서울 강남권 파인다이닝 일부는 메뉴를 줄이고 비싼 원재료 대신 저렴한 대체재를 사용해 가격을 낮췄다.

이런 상황에서 넷플릭스 흑백요리사가 인기를 끌자 관련 업계는 파인다이닝의 부활을 조심스레 전망한다. 흑백요리사는 이미 유명한 스타셰프 20명이 재야 고수 80명과 맞대결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지난달 25일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비영어 TV 부문 1위에 올랐다. 한국뿐 아니라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1위를 차지했고, 18개 나라에서 순위권에 들었다.

흑백요리사 방영 한 주 만에 식당 예약 플랫폼 캐치테이블에서 파인다이닝 예약 증가율은 직전 주보다 150%가 뛰었다. 스타셰프를 이긴 재야 고수는 물론, 이미 떨어진 출연자들 식당에도 주문 전화들이 쇄도했다.

이날 현재 경연 과정에서 주목받은 출연자 식당은 이미 이달 예약이 모두 찼다. 스타셰프로 등장한 최강록 씨가 운영하는 서울 잠실 식당네오는 이달 예약 창이 열리자마자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접속해 1분 만에 모든 자리가 나갔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수년 전 올라왔던 파인다이닝 리뷰 동영상을 재생산한다.

이 프로그램에서 유명 셰프나 재야 고수가 내놓는 음식들은 평범한 가정에서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들은 평생 다듬은 화려하고 정교한 기술을 대결마다 선보인다. 분자요리나 진공 저온 조리법, 즉 수비드(sous vide)처럼 10여 년 전부터 맹위를 떨친 기술 역시 그 사이 발전을 거듭했다. 이제 셰프들은 1000만원짜리 스위스산 티타늄 고속 믹서기로 아이스크림을 만든다.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스타광장에서 열린 '2024 신촌 글로벌대학문화축제'에서 흑백요리사에 등장한 정지선 셰프가 시민 요청에 셀피를 찍고 있다. /뉴스1

방송에 나온 음식은 해당 식당에 가야만 맛볼 수 있다. 유명 셰프 최현석 씨는 최근 공식 SNS에 ‘맥된장을 발라 구워낸 한우 채끝, 트뤼프 간장 깍두기, 고추장 에스푸마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스테이크에 두 가니쉬를 곁들인 장트리오 디쉬를 곧 쵸이닷에서 만나볼 수 있다’고 밝혔다. 쵸이닷은 최 셰프가 운영하는 파인다이닝이다. 쵸이닷은 현재 10월 마지막주까지 예약을 마쳤다.

여경래 셰프가 이끄는 중식 레스토랑 홍보각도 방송에 나온 두반장 소꼬리찜을 선보인다고 했다. 다만 해당 메뉴는 준비에 시간이 걸려 2~3일 전에 예약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신사동에서 3년째 파인다이닝을 운영해 온 한 오너셰프는 “팬데믹 시기 파인다이닝과 오마카세가 인기를 끌자 ‘젊은이들이 맛도 잘 모르면서 사진찍기에 정신이 팔려서 수십만원을 쓴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며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그런 시간도 모두 소비자들 입맛이나 취향이 발달하는 과정으로 보는 게 맞다”고 했다.

◇ 네이버·카카오, 파인다이닝 카테고리 만들기도

네이버는 흑백요리사에 등장하는 식당을 검색하는 빈도가 치솟자, 지도 카테고리에 출연자 식당 리스트를 따로 만들었다. 네이버 데이터랩에 따르면 파인다이닝 키워드 검색량은 지난해 9월 29일 대비 올해 같은 날 33배가 뛰었다. 연간 파인다이닝 키워드 검색량이 가장 많았던 크리스마스 시즌보다도 지난달 29일 검색량이 2배 이상 더 많았다. 현재 네이버는 지도 앱에서 총 116개 식당을 소개하고 있다. 프로그램 출연자는 100명이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는 식당을 여러 개 운영하고 있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 요리계급전쟁'에 출연한 '식당 네오' 최강록 셰프. /넷플릭스 제공

카카오맵도 지난달 26일부터 흑백요리사 식당을 유명 셰프나 재야 고수 별로 분리해서 볼 수 있는 파인다이닝 리스트를 선보였다. 이 리스트는 하루 만에 6만3000회에 육박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날(1일) 현재 카카오맵 서울 지역 파인다이닝 업장 검색 순위 1위부터 5위가 모두 프로그램 출연식당이다. 티맵 역시 흑백요리사 콘텐츠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외식산업연구원 관계자는 “이전에도 인터넷 먹방이나 유명셰프가 등장하는 요리 경연 프로그램은 많았지만, 파인다이닝 같은 본격적인 식도락 영역을 제대로 콘텐츠화한 적은 없었다”며 “가격 대비 만족도뿐 아니라 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도를 고려해 메뉴를 선정하는 경험을 해보면 관련 시장이 커질 것”이라고 했다.

◇ ‘그들만의 리그’ 일부 의견 속 “외국인 관광객에 효과적 마케팅 수단” 분석도

다만 소비자 가운데 상당수가 여전히 파인다이닝에 괴리감을 느낀다는 사실은 장애물이다. 이 프로그램에는 경연 특성 상 한눈에 심사위원을 사로잡을 만한 화려한 요리나 미식가를 위한 독특한 음식이 수시로 등장한다. 시청자일 때는 그 생경함에 초점을 맞추지만, 직접 파인다이닝을 즐기려면 그에 걸맞는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파인다이닝은 저녁을 기준으로 한 끼에 일인당 10만원을 쉽게 넘는다. 보통 20만원을 전후한 코스 식사 가격에 와인이나 적당한 주류를 곁들이면 수십만원이 더 붙는다. 아무리 좋은 재료와 특별한 조리법, 훌륭한 서비스를 갖췄다고 해도 수십만원대 식사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싱가포르 최대 종합지 라이프스타일아시아의 제스로 강 시니어 에디터는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파인다이닝은 그 나라 식(食)문화 수준을 판단할 수 있는 지표”라며 “싱가포르에서는 최근 파인다이닝과 유사하지만, 코스가 아닌 단품 위주로 주문할 수 있고 가격도 낮춘 파인 캐주얼 다이닝이 파인다이닝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광장시장도 넷플릭스에 등장한 후 한국 관광을 상징하는 장소로 떠오르지 않았느냐”라며 “흑백요리사 같은 넷플릭스 인기 프로그램은 외국인 관광객을 불러 오기에 효과적인 마케팅 수단”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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