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과학용어] 동물복지와 실험 효능 두 마리 토끼잡은 인공 미니장기 ‘오가노이드’
마이클 베이 감독의 2005년 작 ‘아일랜드’는 21세기 중반을 배경으로 합니다. 지구 종말의 생존자들이라고 스스로를 믿고 있는 주인공들은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유토피아에서 생활하며 희망의 땅인 아일랜드로 떠나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죠. 지구 종말은 있지도 않았고 주인공들은 스폰서인 인간에게 장기(臟器)를 제공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복제인간이었습니다. 희망의 땅인 아일랜드에 가는 건 장기를 적출당하고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던 겁니다.
영화 속 미래 사회는 완벽한 수준의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미래 사회에서도 필요한 인체 장기를 따로 만드는 건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기 하나를 얻자고 복제인간 하나를 만드는 비효율을 감당했으니 말입니다.
현실에서는 조금 다른 시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체의 장기를 본 딴 미니 장기, 일명 오가노이드(organoid)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죠. 오가노이드는 장기를 뜻하는 ‘Organ’과 유사함을 뜻하는 접미사 ‘Oid’가 합쳐져 탄생한 말입니다. 쉽게는 ‘미니 장기’ 혹은 ‘유사 장기’라고도 부르는데요. 영화 ‘아일랜드’에서처럼 생명체에서 직접 추출한 장기가 아니라 장기의 기능과 구조를 유사하게 만들어낸 세포의 조합입니다.
네덜란드의 한스 클레버 박사가 생쥐의 장에서 추출한 줄기세포를 이용해 오가노이드를 처음 만든 이후 십수년이 지난 지금은 여러 신체 장기를 모사한 오가노이드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오가노이드는 아직은 실험실 수준에서 그치고 있지만, 갈수록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장기 이식이 가능한 수준의 오가노이드도 언젠가는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습니다. 국내 오가노이드 연구를 이끌고 있는 손미영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줄기세포융합연구센터장과 함께 오가노이드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장기 본 딴 오가노이드… 아직 크기는 ‘㎜’ 수준
한스 클레버 박사가 처음 장을 본 딴 오가노이드를 만든 이후 다양한 신체 장기 오가노이드가 등장했습니다. 대장 및 소장·위장과 같은 소화기관부터 심장·신장·폐·간·췌장 등의 내장기관과 피부·망막·내이·뇌까지도 오가노이드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장기 특이적인 오가노이드 뿐만 아니라 유선이나 자궁, 고환, 전립선처럼 신체 기관을 본 딴 오가노이드도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영향으로 관련 신체 기관의 오가노이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됐습니다. 장이나 폐, 간, 편도선 같은 장기 오가노이드에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감염시켜서 장기별 반응이나 기전을 연구하는 방식입니다.
오가노이드는 기존에 사용되던 2차원 세포모델과 달리 3차원으로 배양되며 실제 장기와 구조까지 유사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장기를 대신하는 실험이나 연구에 적합합니다. 손미영 센터장의 연구팀은 지난해 장 오가노이드를 이용해 장 발달 촉진과 염증성 장 질환 보호 효과를 가진 새로운 유산균을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당장이라도 사람에게 필요한 장기를 오가노이드로 만들어서 이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아직은 가야할 길이 멀긴 합니다. 지금까지 개발된 오가노이드의 크기는 수㎜ 수준입니다. 이는 오가노이드를 만드는 방법의 한계 때문입니다.
우리 몸 안의 장기는 혈관을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는데 비해, 오가노이드는 배양 배지에 들어있는 다양한 성장 인자와 매트리겔(Matrigel)이라고 하는 인위적인 세포외 기질 (extra cell matrix, ECM)을 사용해 만듭니다. 이중에서도 매트리겔이 오가노이드를 만드는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세포외 기질은 세포 밖에 존재하지만 세포와 관련이 있는 고분자로 이뤄진 구조체를 말하는데요. 이 메트리겔 덕분에 오가노이드가 2차원 세포모델과 달리 3차원의 구조를 형성할 수 있는 겁니다.
문제는 아직까지 메트리겔이 구조를 형성할 수 있는 기간이 제한적이고, 인체와 유사한 수준으로 배양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실제로 지난 17일에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바이오 분야 연구개발 쇼케이스 현장에서 생명연이 개발한 소장 오가노이드를 볼 수 있었는데요. 실제 인체 소장은 길이만 6~7m에 달하지만 이날 쇼케이스에 나온 소장 오가노이드는 2㎜ 였습니다. 눈으로만 보면 작은 점에 불과했죠. 현미경을 통해 보면 실제 소장 세포와 유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동물실험 의무 규정 폐지… 오가노이드에 주목해야
최근 들어 오가노이드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지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이어져온 동물실험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 말에는 미국에서 동물실험 의무 규정을 폐지했습니다. 동물실험 자료가 없어도 의약품 허가 신청을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유럽 역시 2030년부터 의약품 동물실험을 금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의약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수많은 실험실 동물이 희생됐습니다. 의약품의 안전성과 효능을 확인하기 위한 희생이었죠. 동물실험 반대 목소리가 꾸준히 있었지만,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다들 실험실 동물의 희생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가노이드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제 실험실 동물의 희생 없이도 의약품의 안전과 효능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물론 오가노이드 외에도 장기칩이나 컴퓨터를 이용한 모델링 등 다른 대안도 있지만요.
전문가들은 오가노이드가 앞으로 각종 실험에서 필수적인 부분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오가노이드 자체를 손상된 인간 장기나 병변 부위를 직접 치료하는 재생치료제로 개발하는 연구도 계속되고 있고요. 아직은 ㎜ 수준이지만 인간 장기 수준으로 대형화하는 연구도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입니다.
한국의 오가노이드 기술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인 미국 대비 85% 정도라고 합니다. 미국이 동물실험 의무 규정을 폐지하면서 오가노이드 기술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우리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오가노이드 관련 제도 정비와 규제 완화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생명연 같은 정부출연연구기관 외에 학교나 병원, 기업 등 여러 연구 주체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서로 공유하고 협력하는 유연한 협력연구 환경 마련 역시 중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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