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정 시대, 드디어 제대로 된 맞수가 등장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쇼트트랙 월드투어 2차 대회를 보고 나온 팬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주인공은 코트니 사로. 2000년생, 큰 키에 한 번 속도를 붙이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스타일. 이번 대회에서 그는 여자 1000m 결승에서 최민정을 0.0269초 차로 따돌렸고, 3000m 계주에서는 마지막 두 바퀴를 남기고 인코스를 찌르는 한 방으로 판을 통째로 뒤집었다. 한 주 전 같은 링크에서 열린 1차 대회에서 김길리를 연달아 누르더니, 이번엔 최민정까지 잡았다. 결과만 보면 단순한 금·은의 교환처럼 보일지 몰라도, 레이스 안쪽을 들여다보면 의미가 훨씬 크다. 한국 여자 쇼트트랙이 가장 자신 있어 하던 구간과 장면에서, 사로가 정면 승부로 길을 열어버렸기 때문이다.

1000m 결승을 먼저 보자. 최민정은 늘 그렇듯 초반엔 힘을 모았다가 중반 이후에 자리를 끌어올렸다. 결승선 다섯 바퀴를 남기고 2위까지 치고 올라가는 과정도 교과서처럼 깔끔했다. 문제는 맨 앞에 있던 사로를 끝내 넘지 못했다는 점이다. 보통 이 시점에 선두는 한 박자 쉬거나, 안쪽 라인을 닫는 데 집중하면서 바깥쪽에서 들어오는 추월을 경계한다. 그런데 사로는 아예 속도를 더 올렸다. ‘버티기’가 아니라 ‘더 달리기’를 골라버린 것이다. 두 바퀴를 남기고 속도를 다시 끌어올리는 그 선택이 최민정의 추격 타이밍을 지워버렸고, 결국 결승선에서 0.0269초 차로 승부가 갈렸다. 졌지만 잘 싸웠다가 아니라, 같은 구간에서 같은 강점으로 부딪혀 졌다는 점이 뼈아프다. 한국이 늘 강했던 중장거리 후반부 스퍼트 싸움에서, 사로가 그 리듬을 먼저 선점해버렸다는 뜻이니까.

계주는 더 노골적이었다. 한국이 네 바퀴, 세 바퀴 남기고 흐름을 틀어쥐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림이 좋았다. 마지막 두 바퀴에 들어서며 선두 유지만 잘하면 끝이었다. 그런데 사로가 갑자기 바깥으로 나갔다가 다시 안쪽으로 파고드는 페이크를 섞어 인코스를 여는 순간, 최민정의 라인이 아주 잠깐 비었다. 쇼트트랙에서 그 “아주 잠깐”이 곧 승부다. 사로는 빈틈을 보자마자 주저 없이 몸을 찔러 넣었다. 그 한 칼로 캐나다는 4분07초341, 한국은 4분07초517. 불과 0.176초 차였다. 숫자로 보면 미세한 간격이지만, 트랙 위에서는 “한 번 더 막지 못한” 그 장면의 무게가 훨씬 크게 느껴진다.
사로가 갑자기 나타난 깜짝 스타냐고 묻는다면, 사실 그건 아니다. 아이스하키 선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나이에 스케이트를 탔고, 일곱 살 무렵부터 쇼트트랙으로 방향을 정했다. 미국 미시간에서 태어나 캐나다 뉴브런즈윅 몽튼에서 자랐고, 2018-19시즌부터 대표팀에서 기회를 쌓았다. 초반엔 큰 키와 긴 보폭에 비해 스피드 폭발력이 약하다는 평가가 있었고, 후반 체력은 좋지만 레이스 내 가속 구간이 일정치 않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런데 이번 시즌 들어 몸을 훨씬 가볍게 가져가면서 순발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무엇보다 경기 운영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후위에서 틈을 보길 기다리는 타입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아예 선두권을 잡아놓고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한다. 1000m와 1500m에서 선두에 선 뒤 끝까지 밀어붙이는 방식, 말 그대로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걸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상승세는 기록과 메달 색깔이 증명한다. 월드투어 1차 대회에서 1000m와 1500m를 휩쓸었고, 2차 대회에서는 1000m 개인전 금메달에 계주 역전쇼까지 해냈다. 운이 좋아 연달아 앞선 게 아니다. 한국 선수들이 강한 구간, 특히 1000·1500m 중장거리 후반 싸움에서 똑같이 맞불을 놓아 이겼다. 홈 링크라서 가능했냐고? 물론 홈의 이점은 있다. 하지만 경기 흐름과 장면의 질을 보면 단순한 홈버프의 문제가 아니다. 레이스 판단과 가속 타이밍, 라인 싸움의 결단에서 주저함이 없었다. 이건 컨디션만으로 설명이 안 된다. 기량의 ‘업그레이드’가 맞다.
그렇다고 “한국의 시대가 끝났다” 같은 섣부른 말은 성급하다. 같은 대회 1500m에서 최민정은 금메달로 반격했다. 게다가 마지막 바퀴에 3위권에서 깔끔하게 두 명을 제끼는 장면은 그가 왜 여전히 ‘여제’인지 증명한다. 1차 대회에서 개인전 메달이 없던 아쉬움도 이번 2차에서 싹 지웠다. 혼성 계주 은메달까지 더해 이번 주말 동안만 4개의 메달을 목에 걸었다. 무엇보다 최민정은 월드투어를 “여러 작전을 시험해보는 무대”라고 스스로 말해왔다. 시즌 초반, 특히 올림픽 시즌을 앞둔 이 시기엔 결과보다 ‘데이터’가 더 값질 때가 있다. 어떤 지점에서 스퍼트를 켤지, 어느 구간에서 라인을 열어둘지, 페이스 분배를 어떻게 쪼갤지. 지금은 그걸 몸으로 확인하고 기록으로 쌓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사로의 등장은 한국 여자 대표팀에게 분명한 숙제를 던졌다. 첫째, 선두 주행 대응. 한국은 전통적으로 ‘중반까지 에너지 아끼고 후반 몰아친다’는 공식이 몸에 배어 있다. 그런데 사로가 선두에서 속도를 자꾸 끌어올리면, 뒤에서 따라가는 쪽은 ‘추월-수정-재추월’의 추가 비용을 치러야 한다. 선두권을 먼저 잡아놓고 주도권 싸움으로 끌고 가는 플랜B의 비중을 더 키울 필요가 있다. 둘째, 막판 라인 관리. 계주에서 보여준 인코스 페이크-인코스 찌르기 같은 고속 전개에 대비해 마지막 두 바퀴 라인 콜과 시야 공유를 더 촘촘히 해둬야 한다. 셋째, 가속 타이밍의 다양화. 지금까지는 ‘여기쯤’에서 스퍼트가 온다는 걸 상대도 안다. 사로는 그 타이밍을 아예 선점하거나, 한 박자 앞당겨 깨버린다. 한국도 의도적으로 타이밍을 흩트리는 변주를 가미해야 한다.
사로를 조금 더 뜯어보면 장점과 약점이 뚜렷하다. 큰 보폭으로 직선 가속이 시원시원하고, 코너 진입 전에 속도를 미리 올려놓는 습관 덕분에 인코스를 비집고 들어가는 기술이 날카롭다. 무엇보다 ‘결정’이 빠르다. 추월을 걸지 말지, 라인을 박을지 말지, 주저가 없다. 약점은 여전히 있다. 고속 상태에서의 세밀한 접촉 대응은 최민정보다 경험이 적고, 계주에서 여러 팀이 얽히는 복잡한 장면에서는 가끔씩 몸이 굳는다. 한국이 노릴 포인트가 바로 거기다. 라인 교차가 많은 구간을 일부러 만들고, 바깥-안쪽 변주를 반복해 판단을 흔들어놓는 것. 말은 쉽지만, 트랙 위에서는 엄청난 체력과 담력이 필요하다. 그걸 한국 선수들은 수없이 해왔고, 또 해낼 수 있다.

흥미로운 건 사로가 한국과의 라이벌 구도를 사실상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최민정, 김길리와 부딪힌 네 번의 결승에서 모두 한국이 2위였다. 심리 싸움은 이미 시작됐다. “결승에서 캐나다를 앞에 두면 주저 없이 찔러야 한다”는 확신을 한국이 가져야 하고, “한국의 후반 스퍼트가 와도 우리는 버틴다”는 자신감을 캐나다가 키우고 있다. 다음 달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열리는 3차·4차 대회는 홈을 떠나는 시험대다. 홈이 아니면 레이스 리듬, 얼음 상태, 관중 소리가 모두 다르다. 그 무대에서 누가 먼저 적응하고, 누가 먼저 자신 있는 패턴을 하나 더 만들지에 따라 올 시즌 판세가 달라진다.
사로의 개인 서사도 팬심을 자극한다. 어릴 때부터 빙판 위에서 자랐고, 대표팀 들어온 뒤에도 몇 년을 ‘가능성’으로 불렸다. 큰 키와 지구력은 칭찬받았지만, 결정력과 첫 폭발이 아쉽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이번 시즌 들어 체중을 조금 빼고, 페이스 변화를 더 과감히 쓰기 시작했다. 선두를 잡으면 아끼지 않고 밟아버리는 그 태도, 마지막 바퀴에 들어서도 뒤를 보지 않고 앞으로만 보는 그 습관이 지금의 메달을 만들고 있다. 이런 선수는 한 번 자신감이 붙으면 더 무서워진다. 반대로 한 번 크게 꺾이면 흔들리기도 쉽다. 그래서 다음 맞대결이 더 중요하다. 한국 입장에선 “여기서 한 번 눌러두자”는 타이밍이고, 사로 입장에선 “진짜 에이스로 올라서자”는 무대다.

팬들 시선으로 보자면, 사실 이렇게 재미있는 구도도 흔치 않다. ‘여제’ 최민정이 여전히 강하고, 김길리 같은 신예도 매 경기 새 장면을 만든다. 거기에 캐나다의 사로가 거침없이 치고 올라온다. 누가 누구를 밀어냈다, 판도가 바뀌었다는 식의 과한 말보다, “이제부터 진짜 싸움이 시작됐다”가 더 맞다. 한국 쇼트트랙이 잘하는 건, 강한 라이벌이 나타났을 때 전력 전체가 같이 올라간다는 점이다. 훈련장에서 라인 콜 한 번, 코너 진입 각도 1도, 스케이트 날 세우는 강도 1%가 바뀌면, 결승선의 0.1초가 달라진다. 이번 몬트리올 주말이 딱 그런 숙제를 남겼다.
정리하자면, 코트니 사로는 한국 여자 쇼트트랙이 꼭 넘어야 할 새 봉우리다. 1000m와 1500m라는 한국의 ‘집’에서, 그 집 주인과 같은 구간 같은 무기로 맞붙어 이겼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건 ‘홈의 운’이 아니라 ‘업그레이드된 경기력’이었다. 동시에 한국도 분명히 답을 가지고 있다. 최민정은 1500m 금메달로 바로 복수했고, 혼성·여자 계주에서 여전히 우승권의 힘을 확인했다. 이제 필요한 건 세밀함이다. 선두 주행 대응, 마지막 두 바퀴 라인 관리, 가속 타이밍 변주. 이 세 가지만 한 단계씩 끌어올리면, 다음번 결승선에서 웃을 사람은 다시 우리일 수 있다. 라이벌은 스포츠를 더 뜨겁게 만든다. 사로의 질주가 반가운 이유다. 그 질주를 더 빠르고, 더 영리하게 넘어서는 장면을 우리가 또다시 보게 될 거라고, 한국 팬들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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