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재의 그림자] 분노에는 비용이 따른다

최현재 기자(aporia12@mk.co.kr) 2025. 3. 7.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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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미국 켄터키주 커빙턴 가톨릭 남자고등학교 학생들은 워싱턴DC에서 낙태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후 귀가하던 학생들은 북을 치며 다가오는 한 인디언 원주민 활동가와 조우한다.

'백인 가부장제' '원초적 악' '인종차별주의자' 등 가혹한 비판이 10대 소년에게 쏟아졌다.

진정한 차별주의자들에게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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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미국 켄터키주 커빙턴 가톨릭 남자고등학교 학생들은 워싱턴DC에서 낙태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후 귀가하던 학생들은 북을 치며 다가오는 한 인디언 원주민 활동가와 조우한다. 백인 학생 닉 샌드먼은 그를 마주본다. 비웃는 듯 보이기도 하고, 소년의 어색한 웃음 같기도 했다. 표정은 모호했으나 단죄는 명쾌했다. '백인 가부장제' '원초적 악' '인종차별주의자' 등 가혹한 비판이 10대 소년에게 쏟아졌다. 미국에서 차별 이슈가 얼마나 '뜨거운 감자'인지 보여주는 사례다.

이듬해인 2020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관에게 살해된 사건은 미국을 흔들었다. 소수인종을 넘어 성별, 성 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을 철폐하고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운동은 '다양성·형평성·포용성 운동(DEI Movement)'으로 진화했다. 연방정부는 물론이고 민간에서도 고용과 승진, 공급업체 선정 등에서 DEI 정책을 잇따라 도입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상황은 180도 변했다. 연방정부의 DEI 프로그램을 전격 중단하고, 애플과 같은 민간 기업에도 DEI 정책 폐지를 강요하고 있다. 변화의 강도와 속도가 신경질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DEI는 분노와 발작을 부르는 '알레르기 항원'이 됐다.

모든 운동엔 분노가 내재돼 있다. 타도해야 할 상대방이 있어서다. DEI 운동의 적은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 트랜스포비아다. 피아(彼我)를 구분해 분노를 격발하는 방식은 선명성 경쟁과 주목 경쟁을 부른다. 가볍게 넘어갈 농담에 차별주의자 딱지를 붙이고, 여배우의 대사 비중이 작은 영화는 젠더 감수성이 떨어진다고 매도된다.

원주민을 향해 웃어 보였을 뿐인 샌드먼이 인종차별주의자 취급을 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차별 이슈라면 숨 쉴 틈을 내어주지 않는, 알레르기와 같은 분노 반응에 질식 증상을 호소하는 이가 많아졌다. 중립을 지키던 이들도 일부 DEI 운동가의 극단적 태도에 등을 돌리고 있다. 미국 사회에 'DEI 피로감'이 돌출한 배경이다.

분노는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물리 법칙처럼 돌아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DEI에 대해 '깨어 있음(Woke)' 정책이라고 비꼰다. 트럼프 행정부의 실세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DEI는 죽어야 한다(DEI must die)"란 극단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DEI 운동가들의 분노에 찬 '선명성 경쟁'이 DEI 정책을 말소하는 '분노'로 되돌아온 셈이다.

이 덕분에 정당하게 제기해야 할 차별 문제도 'Woke'로 매도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진정한 차별주의자들에게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가 된다. 시정돼야 마땅할 불의는 묻히고, 보호받아야 할 소수자들의 설 땅은 좁아진다.

다양성이라는 가치에 알레르기와 같은 분노는 필요하지 않다. 차별을 겪은 소수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부당함을 적극 알리며 연대의 뜻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하다. 특정 손짓이나 광고 카피, 콘텐츠에 함부로 '차별주의자' 딱지를 붙이는 한국도 차분함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가 아닐까.

[최현재 글로벌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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