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 조선에 희망이 있었으니
순조의 장남, 정식 왕비 소생의 적장자
바로 효명세자였습니다.

효명세자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정조를 꼭 빼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순조조차도 본인이 할 수 없는 일을
자기 아들 효명세자는 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어느덧 30대가 된 순조의
재위 27년이었던 1827년
순조는 19살이 된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깁니다.
효명세자의 정치력은
실로 놀라웠습니다.

다들 정조가
살아 돌아온 줄 알았습니다.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의 지나친
권력 독점을 견제하고자
자기 처가였던 풍양 조씨를 내세워
정치적 균형을 내세웠고
촌철살인 같은 사회적 개혁의 필요성을
꼬집었습니다.

더불어 문화예술 방면에
가장 관심을 많이 보였던 효명세자는
잘 살아야 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닌
문화예술을 누릴 줄 알아야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는 일념하에
그 암흑했던 시기에 조선의 문화가
눈부시게 꽃을 피웁니다.

특히 효명세자가 무용이 전공이라
한국무용은 효명세자 전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였답니다.

모두가 효명세자에게 거는 기대가 컸고
심지어 김조순의 안동 김씨
일파들조차도
효명세자의 등장에 조선이 하루아침에
이토록 달리지는 걸 보고
오히려 효명세자를 지지하고 따르는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효명세자를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지금까지도 평가받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