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가 ‘결혼은 무조건 후회한다’고 말한 이유! 단지 '악처' 때문에??

[홍성광 번역가]

소크라테스와 크산티페의 사랑 이야기

오늘은 독일의 철학자나 작가가 아닌, 서양의 ‘악처’ 대명사 크산티페와 그녀의 남편 소크라테스 이야기이다. 지난번 모차르트 아내 콘스탄체 베버의 악처 소문에 이은 후속편쯤 될까.

서양 제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BC 399)는 평생을 철학적 토론에 바친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사상가다.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며 무지를 아는 것이 진정한 앎의 시작이라 가르쳤고,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지 말고 지행합일을 통해 올바르게 살 것을 강조했다. 자신을 깊이 성찰하며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라고 역설한, 참으로 인류의 스승다운 면모였다.

소크라테스 조각상. 들창코였다는 기록에 비해선 덜해보이지만 뭉툭한 모습이 눈에 띈다.

젊은 시절 석공 기술을 익히고 철학, 기하학, 천문학 등을 두루 공부한 그는 청년기에 세 차례나 전쟁에 중장보병으로 참전하여 용감함을 떨치기도 했다. 마흔 살 이후로는 교육자로 나서 젊은이들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 절제, 용기, 경건 등을 가르쳐 수많은 청년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지만, 때로는 공포정치의 참주 크리티아스 같은 이들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영국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천 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명언을 남겼다. 스승 소크라테스가 배심원들에게 사형당하는 비극을 목도한 플라톤은 깊은 분노와 충격 속에서 귀족주의(철인정치)를 지지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는 달리 민주주의를 옹호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인연이라 하겠다.

아테네 학당의 소크라테스.

못생긴 외모에 대한 자기 변명, 그리고 소박한 삶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대중, 특히 청년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그의 외모는 평범치 않았다. 위로 튀어나온 뭉툭한 코, 불거진 눈, 배가 나온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는데,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그의 추한 외모를 들어 하층민 출신이라고 단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잘생긴 외모가 어찌 상류층만의 전유물이겠는가?

사실 소크라테스는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어린 시절부터 당대 최고의 교사들에게 그리스의 위대한 시와 리라 연주법을 배웠으며, 엄격한 육체적·정신적 훈련도 거쳤다. 그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 놀랍도록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했다. 눈이 튀어나와 정면뿐 아니라 옆쪽도 잘 볼 수 있어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고, 들창코는 위로 열려 있어 향기를 더 잘 맡을 수 있으며, 입술이 두꺼워 키스하기에 더 좋다고 주장했으니, 그 너스레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는 물질적 쾌락, 사치, 개인적 안락함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았음에도, 최소한의 삶과 도시를 위한 전쟁에 필요한 것을 제외하면 부와 과시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이 신이 부여한 자신의 임무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외모나 옷차림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개인위생조차 무시해 목욕도 거의 하지 않았다. 항상 맨발로 걸었고, 누더기 같은 옷 한 벌이 전부였다. 그는 철저히 절제하는 생활을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금욕주의를 실천한 것은 아니었다.

두 아내와 함께 있는 소크라테스. 그의 머리에 물을 붓고 있는 이가 크산티페다. 왼쪽은 알키비아데스.

첫 부인 미르토? 그리고 이상한 결혼관

소크라테스는 평소 결혼이나 여성에 대해 그리 중시하지 않는 편이었다. 대부분의 아테네인들처럼, 그 역시 여성은 이성적이기보다 정념에 쉽게 사로잡히는 존재, 남성보다 약간 부족한 존재라고 믿었다. 페리클레스의 정부였던 아스파시아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높이 평가했지만, 이는 극히 드문 경우였다. 그는 결혼을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는 행위라기보다는 대를 이을 자식을 얻는 수단 정도로 생각했으니,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좀 서늘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그에게 결혼을 하는 것이 좋은지 아닌지를 물으면, 그는 언제나 "하든 안 하든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런 그가 쉰이 다 된 나이에 갓 소녀 티를 벗은 듯한 젊은 여성과 결혼했으니, 당시에도 놀랄 만한 화젯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의 결혼 생활에 얽힌 독특한 이야기가 하나 전해진다. 그가 ‘공정의 사나이’ 아리스티데스의 딸(또는 손녀) 미르토와 20년간 결혼 생활을 하며 두 아들을 두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미르토와 크산티페 두 사람과 이중 결혼 생활을 했다는 설도 있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미르토를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함께 살았던 여성으로, 그는 다른 아내가 있었으나 그녀가 과부가 되어 가난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자 그녀를 받아들였다"라고 기술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논란이 많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인 플라톤이나 크세노폰의 저서에서는 미르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고대에도 이 이야기를 모두가 믿은 것은 아니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아테네의 출산 장려 정책에 따른 ‘공공의 필요에 의한 중혼’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무능한 철학자와 현실적인 아내

소크라테스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는 것은 여자의 천성이기 때문에 여자의 눈물을 믿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혼에 대한 질문에는 늘 "어느 편이나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답했음에도, 정작 자신은 결혼을 했고 이런 말을 남겼다. "어쨌든 결혼을 하여라. 양처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크산티페(Xanthippe)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로맨틱 러브스토리라기보다는, 차라리 철학자와 '현실적인' 아내의 독특한 관계로 더 많이 회자된다.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보다 서른 살가량 젊었으며, 성격이 강하고 직설적인 여성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들이 언제, 어떻게 만나 결혼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슬하에 자녀도 두었다.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의 가장 뛰어난 점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는 귀족이든 천민이든 모두에게 똑같은 얼굴을 보여줬다는 사실"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크산티페는 남편 소크라테스의 옷차림에 신경을 쓰기도 했다. 소크라테스 역시 크산티페에게 다정한 남편이었고 애틋한 정을 쏟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삶의 사명은 신의 뜻을 받드는 것이었기에, 소소한 가정사에 매달릴 수 없었다. 그는 크산티페를 만족시킬 만큼 여러 가지, 특히 경제적인 문제에 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 따라서 결혼 생활이 길어지고 생활고에 지쳐 크산티페가 '바가지'를 긁어댄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현실의 반영이었으리라.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주전자로 물을 붓는 아내 크산티페.

유명한 ‘잔소리꾼 아내’ 이미지와 왜곡된 전승

크산티페는 흔히 소크라테스를 괴롭힌 '악처'이자 '잔소리꾼 아내'로 서양 역사에 깊이 자리 잡았다. 플라톤과 크세노폰 같은 제자들이 그녀를 신경질적이고 성질이 고약하며 고집 센 여성으로 묘사했던 탓이 크다. 특히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일부러 그녀와 결혼했다고까지 했다. "세상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여자와 함께 살아야 다른 사람들과는 쉽게 지낼 수 있다"고 소크라테스가 말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고대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이야기 중 하나에는,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물이 담긴 주전자를 쏟아붓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한마디 농담을 던진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천둥이 치면 결국 비가 오는 법이라고!"

어느 날 애제자 알키비아데스가 "크산티페가 긁어대는 바가지 소리를 어떻게 견디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끼루룩거리는 도르래 소리를 듣는 것처럼 매일 들으면 익숙해진다네. 자네도 거위가 내는 시끄러운 소리에 익숙해지지 않았나?" 그러자 알키비아데스가 "그렇지요. 그러나 거위는 알과 새끼를 주지요"라고 말하자 소크라테스는 "크산티페도 아이들의 어머니라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느 날 시장에서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의 웃옷을 억지로 벗겨갔다. 이를 지켜본 제자들이 "당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손찌검이라도 해서 혼을 좀 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묻자, 소크라테스는 대답했다. "우리가 치고받고 할 동안에 자네들이 '잘한다, 소크라테스, 덤벼라, 크산티페' 하면서 응원하도록 말인가? 사람들 앞에서 부부싸움을 공개할 수야 없지 않겠나."

이러한 묘사와 서사는 크산티페를 성격이 괴팍한 아내의 전형적인 인물로 굳혔다. 그러나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많다. 제자들은 스승을 존경하고 그의 위대함을 드러내고자 애썼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볼 때 스승은 세상의 어떤 악조건에도 흔들리지 않고 태연자약하며 희로애락의 감정 따위는 초월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크산티페가 악처이면 악처일수록 스승의 태연자약함과 위대함이 더욱 돋보일 수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녀의 이미지를 가능한 한 악화시키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남성 철학자들에 의해 전해졌기에, 실제 그녀의 성격과 삶은 기록과 다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부 학자들은 가정을 내팽개치다시피 한 소크라테스의 삶을 감안해 볼 때, 크산티페가 가족을 부양하는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불만이 많았을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즉, 크산티페는 단순히 잔소리 심한 아내가 아니라, 현실적인 생계를 걱정했던 지극히 현실적인 여성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사실 크산티페에 대한 직접적인 역사적 기록은 거의 없다. 그녀를 언급한 고대 문헌들은 대부분 소크라테스의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한 용도로 그녀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단순히 괴팍한 아내로 그려졌지만, 그녀의 실제 성격과 삶은 훨씬 복합적인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플라톤의 묘사에는 후대 기록에 흔히 나타나는 ‘잔소리가 심한 크산티페’의 모습이 전혀 없다. 크산티페가 ‘성격이 까다로운 아내’로 알려지게 된 것은 온전히 크세노폰의 기록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세노폰의 『향연』에서 안티스테네스가 그녀를 ‘무척 까다롭고, 엄격하며, 고통스럽고, 성질이 나쁜 아내’라고 묘사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크산티페를 선택한 이유가 그녀의 논쟁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좋은 기수가 되려면 다루기 쉬운 말이 아니라 기운 넘치는 말을 선택해야 한다는 비유를 들어 크산티페와의 결혼을 설명한다.

“나는 순하고 온순한 동물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소유해야 할 말은 기운과 생기가 넘쳐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믿었다. 만약 기운이 넘치는 말을 다룰 수 있다면, 다른 어떤 말도 쉽게 조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논리를 결혼 생활에도 적용했다. “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크산티페를 아내로 선택한 것이다.” “만약 내가 그녀의 성격을 감당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과도 문제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어떤 점에서 크산티페에게 부족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입장이나 사명을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성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자신의 아이들을 낳아 길러주고, 가정을 갖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스승 소크라테스와 제자들.

현실적인 부부의 복합적인 모습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언도받고 수감된 직후 크산티페가 그를 찾아갔을 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서른여덟 살이었다. 그녀는 남편 걱정에 흐느끼면서 말했다. “무고한 당신이 왜 죽어야 하나요?” 소크라테스는 다소 쌀쌀맞지만, 초연하게 대답했다. “그럼 내가 진짜 죄를 짓고 죽어야겠는가?”

그는 아내에게 사형당하기 전날을 제외한 다른 날은 면회를 오지 말라고 했다. 너무나 냉혹한 처사 같지만, 그로서는 일종의 배려였다. 크산티페는 남편이 사형 선고를 받고 독배를 마시기 전 감옥을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그녀는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지 못하도록 빼앗으려 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차분한 태도로 그녀를 위로했고, 그녀가 너무 감정적으로 동요하자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녀는 시종 흐느꼈고, 그는 아내를 위로하면서 자기는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애정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소크라테스가 죽는 날 아침, 친구와 제자들이 감옥에 몰려들었을 때 그녀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친구 크리톤에게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독배를 마시기 직전에 그녀를 다시 감옥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소크라테스는 아내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려보낸 후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했다.

이처럼 소크라테스와 크산티페의 관계는 현대적인 의미의 로맨틱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부부 생활의 복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크산티페는 종종 ‘잔소리 많은 아내’로 그려지지만, 사실 그녀는 가정을 돌보고 현실적인 문제를 챙기는 사람이었으며,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삶을 끝까지 함께한 중요한 존재였다.

독약을 마시고 죽어가는 소크라테스를 바라보며 절규하는 크산티페.

크산티페에 대한 양극단의 시각과 재평가

이런저런 이야기들 때문에 소크라테스와 크산티페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의 관계를 단순히 갈등 관계로만 볼 수는 없다. 1405년, 크산티페에 대한 최초의 긍정적 묘사가 등장한다. 크리스틴 드 피잔의 『여인들의 도시』에서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를 구하려 노력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해석은 오랫동안 내려온 크산티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걷어내려는 최초의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크산티페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근대 초기까지 이어졌다. 셰익스피어는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크산티페를 ‘전형적인 나쁜 아내’로 언급하며 그녀의 부정적 이미지를 계속 사용했다. 하지만 계몽주의 이후에는 크산티페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 시도가 나타났다. 이러한 시도들은 뚜렷한 양극단을 보이는데, 하나는 전통적인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남성 중심 철학의 배경으로 그녀를 사용하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를 독립된 인물로 인식하고, 특히 페미니즘 문학에서 그녀의 행위와 성격을 새롭게 해석하는 방향이었다.

계몽주의 시대에도 여전히 크산티페를 성격이 까다로운 아내로 묘사한 작품들이 있었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녀를 보다 동정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독일 학자 호이만은 크산티페에 대한 고대의 부정적인 일화들에 처음으로 의문을 표했고, 이는 크산티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었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빌란트(Wieland)는 그녀에 대해 "당당한 아마존 같은 인물로, 성격이 급하고 쉽게 흥분하며, 말다툼을 좋아하고 마지막 말은 꼭 자기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지만, 근면하고 부지런하며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가정의 규율과 질서를 엄격히 유지하는 어머니"로 묘사했다.

크산티페의 전형적인 까다롭고 강력한 아내 이미지는 소설가 헨리 필딩의 작품 『톰 존스의 역사』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처럼 크산티페의 강하고 까다로운 아내 이미지는 서구 문학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크산티페의 이미지는 철학과 이성, 그리고 성별 간의 역사적인 갈등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확장되었다. 1865년,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두아르트 첼러는 한 논문에서 크산티페에 대해 이해심 많은 시선을 보여주며, 전해지는 기록을 토대로 “그녀는 매우 바람직한 주부였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 홍성광은 서울대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독문학박사로, 독일 문학 및 철학 관련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니체의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정치 에세이 『예술과 정치』, 『마의 산』(상·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상·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실러의 『도적들』,『간계와 사랑·빌헬름 텔』,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카프카의 『성』,『소송』,『변신 외』,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