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농락한 늑대왕 로보, 기생충이 만들었을까
쥐가 천적 고양이에게 먼저 접근
늑대가 감염되면 대범한 우두머리 돼
새로운 서식지 찾아 위험도 감수
“그 잿빛 파괴자한테는 교묘하게 섞은 독약도, 주문도, 마법도 통하지 않았다.”
미국의 작가 어니스트 시튼은 1898년 ‘내가 아는 야생동물’이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시튼 동물기’이다. 그중 멕시코주에서 전설의 늑대로 통하던 늑대왕 로보(Lobo)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로보는 단 다섯 마리의 부하만 이끌고 수천 마리의 가축을 해쳤다. 농민들은 먹잇감에 독을 바르거나 이동 경로에 덫을 설치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로보 무리에겐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금액인 1000달러라는 현상금이 붙었다.
왜 로보는 야생에서 살아가지 않고 인간 사회로 침입하는 모험을 했을까. 배고파서 가축 몇 마리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재미로만 하룻밤에 양 수백 마리를 해치는 무모함을 보였을까. 어쩌면 늑대왕 로보는 기생충에 감염돼 처음부터 겁을 상실한 것일지 모른다.
미국 옐로스톤국립공원 늑대 복원 프로젝트의 더글러스 스미스 박사 연구진은 지난 24일 국제 학술지 ‘커뮤니케이션 바이올로지’에 “톡소포자충(胞子蟲)에 감염된 늑대는 모험심이 강하고 더 과감한 행동을 해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고 밝혔다. 바로 로보 같은 우두머리이다.
◇기생충이 뇌 조종, 천적에 접근
톡소포자충은 ‘톡소플라스마 곤디(학명 Toxoplasma gondii)’라는 단세포 기생충이다. 고양잇과(科) 동물의 배설물을 통해 다른 동물에 감염된다. 톡소포자충은 감염된 동물의 뇌까지 조종한다.
2011년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은 수컷 쥐가 톡소포자충에 감염되면 스스로 천적인 고양이에게 잡아먹히려고 다가가는 ‘좀비’가 된다고 발표했다. 쥐는 고양이 오줌 냄새만 나면 기겁을 하지만 톡소포자충에 감염되면 고양이와 거리를 두지 않았다. 다른 사례도 잇따라 발견됐다. 2016년에는 아프리카 가봉에서 특소포자충에 감염된 침팬지가 천적인 표범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례가 목격됐으며, 지난해에는 하이에나 새끼가 감염되면 사자에게 다가가기까지 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기생충이 쥐의 공포심을 없앤 데는 기생충의 번식과 관련돼 있다는 분석도 있다. 톡소포자충은 오직 고양이의 내장기관에서만 유충이 암수로 자라 생식을 하고 알을 낳는다. 쥐에서는 유충 상태로만 있다. 고양이가 감염된 쥐를 잡아먹어야 기생충의 번식이 완결되는 것이다. 즉 쥐가 고양이에게 잡아먹히도록 기생충이 쥐를 조종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두머리 통해 무리 전체 감염
늑대 복원 프로젝트 연구진은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복원시킨 회색 늑대 무리에서 몇 년 전부터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사례를 확인했다. 연구진은 지난 26년 동안 국립공원의 회색늑대 무리에서 채취한 혈액 시료를 분석하고 관찰 기록도 살폈다. 근처에 사는 대형 고양잇과 동물인 퓨마의 기록도 참조했다.
예상대로 퓨마 서식지 근처에 있는 늑대일수록 톡소포자충에 감염되는 경우가 많았다. 놀랍게도 기생충에 감염된 늑대는 우두머리가 될 가능성이 다른 늑대보다 46배나 높았다. 감염된 늑대는 가족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새로운 무리를 이룰 가능성도 11배나 높았다. 이는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쥐가 고양이를 무서워하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과 비슷했다. 동료보다 먼저 나서고 위험마저 감수하니 우두머리가 되는 것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모험심에 불타는 우두머리는 무리 전체를 동화시켰다. 무리는 우두머리의 대범함과 호기심을 따라 퓨마의 냄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퓨마 배설물에 노출되면서 역시 톡소포자충에 감염됐다. 기생충이 늑대 한 마리의 뇌만 조종한 것이 아니라 무리 전체를 움직인 셈이다. 우두머리는 짝짓기를 통해 후손까지 감염시켰다.
◇생태계 보존 위해 기생충도 알아야
이전에도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동물을 연구한 적이 있지만 이처럼 야생에서 장기간 행동 변화를 추적한 예는 없었다. 과학자들은 이번 연구가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회색늑대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평가했다.
사람들은 늑대를 로보 같이 가축을 해치는 나쁜 존재로만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동물은 물론, 심지어 식물과 물고기까지 도움을 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회색늑대가 먹이사슬을 통해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때문이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회색늑대는 무차별 사냥으로 1926년 모두 사라졌다. 최고 포식자가 사라지자 먹이사슬이 무너지고 동식물 생태계 전체가 몰락했다. 상황은 1995년부터 캐나다에서 늑대를 들여와 옐로스톤에 풀어놓으면서 바뀌었다.
늑대가 다시 물가를 찾자 사슴과(科)의 대형 초식동물인 엘크의 발길이 뜸해졌다. 엘크에게 뜯겨나가던 나무가 다시 번성했다. 나무뿌리가 튼튼해지자 흙의 침식이 줄면서 개울이 제 모양을 찾고 새와 물고기가 늘어났다. 먹이사슬 연쇄 효과로 전체 생태계가 바뀌는 이른바 ‘영양 종속(trophic cascade)’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톡소포자충은 이런 늑대를 극단의 위험으로 몰고 갔다. 지나치게 모험심에 휩싸인 늑대는 마구 도로를 건너다 자동차에 치여 죽고, 사람마저 겁내지 않고 농장 근처까지 다가갔다가 총에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늑대는 물론 농민 피해도 막으려면 기생충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한다고 과학자들은 지적했다.
그렇다면 늑대왕 로보는 어떻게 최후를 맞았을까. 그를 파멸시킨 것은 사랑이었다. 로보 사냥에 참가한 시튼은 다른 늑대는 항상 우두머리 뒤를 따르지만 작은 발자국 하나는 자주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로보의 짝인 암컷 블랑카였다. 사람들은 조심성이 덜 한 블랑카를 먼저 잡아 사체를 끌고 다니며 체취를 남겼다. 로보를 자극한 것이다. 발을 잘라 발자국까지 찍었다.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 로보는 냉정함을 잃고 블랑카의 흔적을 따라 마을로 내려왔다가 결국 1894년 1월 31일 산 채로 붙잡혔다. 시튼은 몰락한 늑대왕이 안쓰러워 물과 먹이를 챙겨줬지만, 로보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그날 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늑대왕의 품위를 지킨 최후였다.
참고자료
Communications Biology, DOI: https://doi.org/10.1038/s42003-022-0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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