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의 직설] 대통령이 된 운동선수들…이강인의 PSG 선배도 있다

손태규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2024. 9. 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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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 맥그리거와 제이크 질렌할./게티이미지코리아

종합격투기(UFC) 최고의 흥행 선수 코너 맥그리거가 ‘대통령’을 꿈꾼다. 2025년 모국 아일랜드 대통령 선거에 나설 뜻을 밝혔기 때문. 그는 최근 소셜미디어에 “아일랜드는 적극적인 대통령이 필요하다. 그건 바로 나다. 나는 유일한 논리적 선택”이라고 적었다.

최초의 2 체급 동시 챔피언이었던 그가 또 한 번 얘깃거리를 만들었으나 반응은 냉소에 가깝다. 몇 년 째 시합을 하지 않고 복귀 일정도 잡지 않으면서 뜬금없다는 것. 한 매체는 “자아도취된 머저리가 자신이 나라를 이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비웃었다. 정치할 바탕을 전혀 갖추지 못한 그가 국가 운영을 스포츠 경력 후의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아일랜드의 입법 기관을 해체 하겠다”는 등의 큰 소리는 진정성을 의심 받기에 충분하다. 이름값만으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니 정치를 더 우스꽝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도박 사이트는 맥그리거가 아일랜드의 차기 대통령이 될 확률은 1/50이라고 했다. 수십 명의 후보들 가운데 한참 아래. 한낱 관심 끌기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조지 웨아 전 라이베리아 대통령. /게티이미지코리아

아프리카 최고 축구선수에서 라이베리아 대통령으로

스포츠와 정치의 조합은 이제 새롭지 않다. 많은 선수들이 정치인을 방불케 하는 정치발언을 쏟아낸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현실정치에 직접 뛰어든다. 스포츠 스타들은 이미 얻은 대중 인기 외에 스포츠 무대에서 성공을 이끈 야망과 추진력으로 정치에서도 성공하기도 한다. 맥그리거처럼 말장난이 아니라 오랜 준비 끝에 ‘대통령의 꿈’을 이룬 프로 축구선수도 있다.

조지 웨아(58)는 프로 축구 선수로는 세계에서 처음 대통령이 된 인물. 올해 1월까지 6년 동안 서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 대통령이었다. 그는 아프리카 축구 역사에서 최고의 선수로 꼽혔다. 이강인 선수의 파리 생제르맹 대선배.

빈민가에서 자란 웨아는 10대 때 축구를 시작했다. 그의 인생은 26년 동안 아스널을 이끌었던 명장 아르센 벵거를 만나면서 영원히 바뀌었다. 21세 웨아를 카메룬에서 발견한 벵거 감독은 그를 모나코에서 뛰게 했다.

웨아는 1992년부터 3년간 생제르맹에서 활약하면서 93년·95년 쿠프 드 프랑스, 95년 쿠프 드 라 리그를 우승했다. 94–95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 리그에서 7골로 대회 최다 득점자. 그 뒤 이탈리아 AC밀란으로 갔다가 영국으로 이적했다. 첼시와 맨체스터 시티를 거쳐 프랑스의 마르세유 등에서도 뛰었다.

아프리카 선수로는 유일하게 발롱도르와 국제축구연맹(FIFA)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상도 세 번. 2004년 브라질의 펠레는 웨아를 세계 최고의 생존 축구 선수 100인에 뽑았다.

대선수로 성장하면서도 그는 고향을 잊지 않았다. 당시 라이베리아는 내전으로 25만 명가량의 목숨을 잃고 있었다. 웨아는 축구 국가 대표의 해외 원정 비용을 지원했다. 선수로 뛰면서도 유엔의 굿윌 대사 등 자선 활동을 했다.

은퇴 후 정당을 만들어 2005년 대통령 후보로 나섰지만 학력 부족과 정치 경험 부족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41살에 고등학교를 마친 뒤 미국 대학에서 경영학 학위를 받을 정도로 노력파. 상원의원 등 10여년의 정치경험 끝에 2017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18년 1월의 웨아 취임식에는 아프리카가 낳은 최고 선수들인 코트디브루아의 디디에 드로그바와 카메룬의 사무엘 에토도 참석했다. 그러나 재선에 실패했다. 그는 개표가 끝나자마자 “패배 속에서 너그러움을 보일 때다. 당을 넘어 국가를, 개인의 이익을 넘어 애국심을 우선할 때”라며 상대 후보에게 축하 전화를 걸었다. “라이베리아와 아프리카에게 매우 중요한 행동이다. 현직 대통령이 이렇게 하는 것은 매우, 매우, 매우 드문 일”이라는 것. “대 선수답게 스포츠 정신을 보였다”는 칭송을 들었다.

제이크 질렌할./게티이미지코리아

프로 미식축구 제의를 마다했던 포드 대통령

웨아에 앞서 명선수가 대통령에 오른 것은 40대 미국 대통령 제럴드 포드가 처음.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리처드 닉슨이 사임하자 부통령이던 그는 대통령직을 이어받아 3년을 재임했다. 선거에서 뽑히지 않고 대통령이 된 것이 웨아와 다른 점. 그러나 포드는 프로 구단 제의를 마다 한 뛰어난 미식축구 선수였으며 대학 감독도 했다.

포드는 미시간 대에서 1932·1933년 두 번 전미 선수권 우승을 이끌었다. 미시간 대가 포드의 48번을 은퇴시킬 정도로 빼어났다. 그는 프로 구단 디트로이트 라이온스와 그린 베이 패커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대신 예일 법대를 다니면서 예일의 미식축구 2군 감독까지 했다.

대통령을 지낸 두 사람 이외에 대통령에 도전한 운동선수들은 여럿이다.

미국 프로농구 뉴욕닉스에서 날렸던 빌 브래들리는 3선 상원의원으로 2000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갔으나 떨어졌다. 그는 공부 수재면서 농구도 특출했다. 그가 이끈 아이비 리그 프린스턴 대의 전국선수권 대회 준우승은 기적으로 불렸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우크라이나 권투선수 비탈리 클리츠코는 1999년부터 2013년 사이에 세계복싱협회(WBC) 등 여러 기구의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그는 2015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의회 의원을 거쳐 수도인 키에프 시장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운동선수들도 여럿 국회의원이 되었다. 언젠가는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는 선수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웨아처럼 오랜 노력으로 학식과 정치경험 등 자질을 갖춰야 한다. 정치는 아무나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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