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쿵' 의성 국가지질공원 이야기] 하늘 선녀가 삼베를 짜던 치선리 베틀바위

효녀 도운 선녀는 사라지고 베틀 형태 바위 ‘우뚝’
‘베틀’에서 유래된 ‘베틀바위’
호수서 퇴적된 쇄설성 퇴적암
점토와 미사 크기 알갱이 구성
발달된 수평·수직절리 볼 수도
경사 따라 기울어져 파괴 쉬워
선녀하강 전설이 서려있는 베틀바위.

베틀바위는 의성군 의성읍 치선리 산42번지에 위치한다. 베틀바위가 현재도 파괴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바위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안전을 위해 의성 치선동 석탑 앞에서 베틀바위를 바라다보는 게 정석이다. 치선리 베틀바위의 지질시대는 중생대 백악기 경상퇴적분지 하양층군 점곡층에 해당한다. 호수에서 퇴적된 쇄설성 퇴적암으로, 점토 내지 미사(silt, 微沙/微砂) 크기의 알갱이들로 이루어졌다. 수평·수직절리가 잘 발달하고 지형 경사에 따라 기울어져 파괴되기 쉽고, 기존 암석으로부터 분리된 암괴들이 곳곳에 떨어져 있다. 오랜 시간 깎여 나가 현재의 치선리 베틀바위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치선리 베틀바위를 안전하게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은 치선동 석탑. 탑의 양식과 불상의 조각기법 등으로 볼 때 9세기 무렵의 탑이다.
‘왕비가 된 효녀’ 전설
선한 일하고 베짜기 대회 참가
선녀 도움 받아 1등·왕비 간택
천상서 내려온 선녀바위 ‘선암’
바위 깎여 베틀 형태 됐단 설도

◇선녀직녀의 도움을 받아 치선리(致仙里) 베틀로 왕비가 되다.

치선리 베틀바위 명칭은 베 짜는 도구인 베틀에서 유래했다. 처음에는 천상에서 하강한 선녀 바위라는 의미로 선암(仙巖)이라고 했다. 아직도 이 일대 마을을 선암마을이라고 한다. 선녀바위가 깎여서 베틀처럼 변모했고, 현재는 베틀 얼개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선녀직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베틀바위가 내려오는 곳은 수십 군데나 된다. 치선리 베틀바위는 비록 규모에선 아담한 크기지만 ‘베틀바위의 여왕’이다. 첫 번째 이유는 치선리(致仙里)라는 지명이다. ‘미모에 극치인 선녀가 내려오신 마을’이란 뜻이다. 둘째로는 천상 선녀직녀(직녀성)가 이곳 베틀바위에서 의성 출신 효녀직녀를 도와서 베짜기 대결에 승리했다. 셋째는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인 아라크네는 베짜기 대회에서 아테나 여신을 이겨 저주를 받아 거미가 되었다. 그러나 효녀직녀는 선녀직녀의 도움으로 조선 천하의 모든 직녀를 다 이겨 왕비가 되었다. 한마디로 효녀직녀는 베 짜기로 천하를 평정했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표현을 빌리면,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절대 반지’를 의성군 치선리 베틀바위가 차지한 셈이다.

의성군지(義城郡誌)에 게재된 ‘조선 천하 직녀들을 이긴 의성의 효녀직녀’의 베짜기 대결 내용이다. “옛날 의성읍 선암리에 효녀 갑숙이가 살았다. 하루는 병환의 어머니를 위해 약을 구하러 갔다가 귀갓길에 다 죽어가는 할머니를 발견했다. 바로 할머니를 등에 업고 집에 왔다. 어머니와 함께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어느 날 아침 기적처럼 다 죽어가던 할머니가 사라졌다. 반대로 위중하시던 어머니는 쾌유했다. 어머니는 병석을 떨고 나서 떡 장사를 했다. 갑숙이는 베 짜는 일에 열중했다. 효녀직녀의 베 짜는 솜씨가 ‘조선천지거미(제1인자)’라고 소문이 났다. 나라님께서 전언을 듣고 온 나라 직녀들과 경연을 시켰다. 모든 참여 직녀들은 하나 같이 최고 성능의 베틀이었다. 갑숙이에겐 구닥다리 베틀이었다. 결과는 질 게 뻔했다. 갑자기 난데없이 간호해 드렸던 할머니가 등장해서 지팡이를 상하좌우로 휘~익 휘둘렀다. 갑자기 하늘에서 선녀직녀들이 내려오더니 갑숙이와 힘을 합쳐 열심히 베를 짰다. 시합을 끝내라는 종이 울렸다. 사람들이 결과를 보려고 모여들었다. 하늘의 선녀직녀들과 베틀이 모두 사라지고 베틀바위만 홀연히 남아있었다. 결과는 갑숙이가 짠 베가 나머지 모두가 짠 것보다도 많았기에 대상을 차지했고, 왕비로 간택되는 후상을 받았다.”

◇선녀직녀(仙女織女)는 누구일까? 그리고 베틀 노래(機歌)는?

BC 400년경 주나라 하북지역에서 견우직녀 전설이 생겨났다.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 천관서’에서는 직녀를 ‘천제의 손녀’, ‘진서 천문지’에서는 ‘천제의 딸’로 적고 있다. 천문을 보는 일관들은 직녀성을 보고 예언했다. “직녀성의 별빛이 붉고 밝게 빛나면 직물이 풍부해지고, 별빛이 희미해지면 비단이 희귀해지거나 전쟁이 일어날 징조다. 직녀성에 달무리가 있으면 전쟁이 일어난다. 혜성이 직녀성을 범하면 왕후와 친족에게 우환이 있다. 떠돌이별이 직녀성을 침범하고 푸른색이면 기근이 생기고, 붉은색이면 전쟁이 일어난다” 등이다.

옛날에 베 짜는 고달픈 작업을 하면서도 힘든 상황을 전환하고자 불렸던 노동민요 ‘베틀가’가 있었다. 현존하는 베틀가를 기억해서 부를 수 있는 할머니들이 없어 인근 상주 함창(명주박물관) 및 안동(안동포전시관)에서 유행했던 베틀가를 소개한다. “베틀을 놓세. 베틀을 놓세. 옥 난간에다가 베틀을 놓세. 에헤요호 베 짜는 아가씨 사랑 노래. 베틀에 수심만 지누나. 양덕맹산에 중세포요. 길주명천에 세북포로다. 화란춘성 만화방창 봉접분분 화초단이다. 일락서산 석양단이요. 소화신령 모초단이라. 반공중에 걸린 저 달은 바디 장단에 다 넘어간다. 춘포조포 생당포요. 경상도라 안동포로다. 잉어대는 삼형제인데 눌림대는 독신이로다. 모든 시름 다 잊어버리고 이 밤이 가도록 베나 짜자. 황경나무 북 바디 집은 큰 애기 손목에 다 녹아난다. 춘포조포 다 그만두고 가는 베 서 정든 님 괼까. 이 베를 짤아서 누구를 주나 바디 칠손 눈물이로다. 주야장천 베만 짜면 어느 시절에 시집을 가나. 닭아! 닭아! 우지를 마라. 이 베 짜기가 다 늦어 간다.”

치선리 베틀바위 전경. 중생대 백악기 호수환경에서 퇴적된 세립질 퇴적암이다. 의성군 제공

◇인간 생활의 기본요소 ‘의(衣)’ 충족을 넘어서다

농경사회에서는 베틀은 ‘의식주’에서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었다. 시대적 변천에 따라서 1만2천 년 이상의 의식주에 혁명을 가져왔다. 신석기 때 베짜기는 오늘날 최첨단 반도체 혹은 인공지능에 해당했다. 청동기시대는 베틀은 오늘날 자동화 기계에 해당했다. 산업 로봇과 같았다. 온 지구촌의 비단길은 한 가닥의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비단이란 지구촌 물물교환의 기축통화였다. 오늘날 미국 달러에 해당했다. 그래서 신라 비단 조하주(朝霞綢)는 로마 황제의 곤룡포로 등장했다. 철기시대 우리나라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목면, 삼베 혹은 비단은 통용화폐로 서민경제의 혈맥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베짜기는 구닥다리 옷감에서 벗어나 전투용 방탄복, 인체 장기를 대용하는 의료섬유, 대형토목공사에 토목건축 자재로 부직포, 우주항공 복장으로 새로운 신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오늘날 ‘기계’는 베틀에서 기원

어릴 때 여름 무더위도 장마철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는 베틀 앞에 앉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베짜기에 전념했다. 삼베, 무명 혹은 명주를 짜는 걸 유심히 봤다. 같은 베틀인데 바디(reed)와 북(shuttle)의 크기는 달랐다. 실올이 가늘수록 바디의 살대 간격이 더 촘촘했다. 실꾸리를 넣는 북도 더 작았다. 한여름 더위 속에 베짜기 고비를 넘기는데 어머니의 체중은 10kg 정도는 빠졌다. 어머니는 졸리거나 지루하면 베틀가를 부르시며 중단하지 않았다. 뒷방에 설치한 베틀이 지금도 머릿속에 그려진다. 한자로 ‘기계(機械)’라는 글자는 베틀 모양과 같다. 그래서 최세진(崔世珍, 1468~ 1542)은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機(베틀 기)’와 ‘械(형틀 계)’라고 했다. 한자가 상형문자였기에 모양을 본떴다. 사실, 한자 ‘機(베틀 기)’ 자는 베를 짜듯이 머리를 맞대고 기밀을 짠다는 의미도 있다. 바로 천기누설이다. 즉 베를 짜서 서방님 한양 과거 길 노잣돈을 마련했다. 그로 인해 정승판서할 기회를 만들었다. 맹자 어머니께서 학문을 중단하고 오는 아들에게 짜던 베를 잘라서 “학문도 중단하면 이렇게 못쓰게 된다”는 생생한 교훈(斷機之敎)을 맹자에게 심어줬다. 기계(機械)라는 단어의 기원은 BC 600년경에 저술된 서경(書經) 태갑편(太甲篇)에서 “마치 베틀을 펼쳐 세운 듯이 바디와 북이 오고 감이 서로 맞물려서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과 같도다”라는 구절에 기원하고 있다. 장자(莊子, BC 369~ BC 286) 제물론편(齊物論篇)에서 “그 펼쳐지는 모습이 서로 맞물려서 돌아감이 베틀 같도다”라는 발상이 오늘날 기계 ▷ 자동화 ▷ 로봇 ▷ 인공지능까지 발전되었다.

◇의성향토사연구회 답사 중 발견된 남대천 공룡발자국 화석산지

의성읍 남대천에는 지난 2021년에 의성향토사연구회에 의해 발견신고된 목 긴 초식공룡(용각류)의 발자국, 육식공룡(수각류)의 발자국 화석산지가 있다. 중요한 지질유산 중 하나로, 아직 문화재 지정이나 지질명소로 고시된 곳은 아니다. 하지만 의성군에서 ‘2023년 의성지질공원 지질과학축전’이라는 지질공원 체험행사를 통해 국내 발자국 화석 전문가로서 이곳을 연구한 진주교대 김경수 교수님 동행 현장탐방을 진행해 주목받은 바 있다. 발자국 화석들이 발견되는 곳은 현재 물이 흐르는 하천에 인접해 있어 비가 많이 내리면 강물에 그대로 잠기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존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이는 중생대 말 금성산의 화산폭발로 용암 열기에 의해 단단하게 구워졌기 때문이다.

또 이곳은 발자국 화석 및 식물화석 등 34개의 화석층에 총 231점의 발자국 화석을 확인하고 목 긴 초식공룡(용각류), 육식공룡(수각류), 두 발 혹은 네 발로 걷는 초식공룡(조각류), 익룡, 거북, 새 발자국 화석 등 중생대 백악기 당시 생물 다양성을 보여준다. 특히 무리 이동 모습도 보여주는 소형 초식공룡 발자국은 보존이 잘 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보고된 가장 작은 익룡 발자국 중 하나에 속한다. 또한 소형 익룡 발자국 3점은 국내에서는 진주, 화순 지역에만 보고된 바 있어 희소성이 매우 높다. 중생대 백악기 때 살았던 거북이 수영한 흔적도 암석에 남아있다니 신비롭지 않은가!

가볼만한 곳
공룡·익룡·거북 발자국 화석 등
백악기 생물 보여주는 ‘남대천’
‘오토산’·구봉산 누각 ‘문소루’
폐업한 국내 마지막 성냥공장

◇이왕에 왔으니, 치선리 베틀바위 주변을 한 번 쭉~ 들려보세!

선암사(仙巖寺)에 보이는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산은 의성읍의 오토산(五土山)이다. 오토산에 대한 전설이다. 풍수지리설에서는 475m 오토산 정상에서 내려간 5곳의 지맥마다 명산(명당)을 토해내었다고 오토산(五吐山)이라고 했다. 대홍수 때 정상부가 오리(鴨) 머리만큼(頭)만 남기고 다 잠겼던 산이다. 또한 의성김씨 첨사공 김용비(金龍庇) 김용비의 유택을 마련할 때에 청·홍·황·흑·백의 오방색의 흙이 나왔다고 한다. 이렇게 오색토명산에서 유래하여 오토산이 유택 대명당이라는 입소문이 자자했다.

문소루(聞韶樓)는 의성읍 원당리 구봉산에 있는 누각이다. 문소(聞韶)란 신라 때 조문국을 병합하고 문소군을 설치했던 읍소명칭이다. 교남사대루의 하나로 진주의 촉석루, 밀양 영남루, 안동의 영호루와 함께 비견되는 선비들의 풍류를 대변하고 있다. 고려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공민왕(재위 1351~ 1374) 때 현령 이광제(李光濟)가 중건했다. 1657(효종8)년 화재로 소실, 1694(숙종 20)년에 현령 황응일(黃應一)이 재건했다. 1983년 9월에 옛 모습인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 2층 문루로 복원했다. 읍내 객사 북쪽 의성관아 뒤편에 있었으나 현재 문소루는 구봉산 제9봉에 복원되었다.

의성향교(義城鄕校)는 의성읍 도동리 808번지 경상북도 1982년 2월24일에 시·도유물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조선 1395(태조 3)년에 현유배향과 지방민 교육을 위한 지방관학으로 건립되었다. 1545(인종1)년에 중수하였고, 대성전과 명륜당은 1745년에 다시 중수했다. 광풍루는 1762년과 1910년 두 차례 중수하였다. 건물배치는 남향으로 대성전이 앞에 있고 명륜당이 뒤에는 전묘후학의 공간배치 형태이다.

의성 성광성냥공업사는 2013년까지 성냥을 생산하던 우리나라 마지막 성냥공장이다. 6·25 전쟁 직후인 1954년 문을 열어 70여년간 지역경제의 중심역할을 해왔다. 하루 1만5천 갑의 성냥을 생산해 전국 각 가정에 공급해 왔으나, 가스라이터 보급, 중국산 성냥에 밀려 성냥 판매 쇠퇴기를 맞이하면서 결국 이곳도 문을 닫았다. 현재 의성군은 성냥공장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문화재생 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월룡사(月龍寺)는 의성읍 도동리 734-4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조치훈(趙芝薰, 1920~1968)의 ‘고사(古寺)’에서 ‘목어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 만리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는 가득한 선경 세계를 만끽할 수 있는 고찰이다.

글=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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