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 섬유 레이온은 왜 죽음의 신이 되었나 [주기율표 위 건강과 사회]
“적들의 군량미를 먹어 없애자!” 닭장차 안의 사람들은 사뭇 비장하게 초코파이를 두 개씩 먹어치웠다. 때마침 켜진 붉은 신호등에 나란히 멈춰선 옆 차선 시내버스 안의 어린이가 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엄마와 이야기하는 게 보였다. “엄마, 저건 무슨 동물이에요? 이렇게 물어보고 있는 건 아니겠죠?” 옆자리 후배가 속삭였다. 머리채를 잡혀서 끌려오느라 혼이 빠져 있던 나는 차창 밖 어린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다시 군량미 소진 투쟁에 동참했다.
풀려날 때쯤에야 알게 되었는데, 그 초코파이는 적들의 군량미가 아니라 시민들이 넣어준 보급품이었다. 그 시각 집회장 진입에 성공한 이들은 ‘구속동지 구출가’를 부르며 우리(시위대)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한다. 1991년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니 이것도 그날 저녁, 함께 집회에 참가하기로 했던 일행들과 상봉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세상에나 우리가 뭐 대단한 투쟁을 벌인 것도 아니고 그저 인도에 모여 앉아 있다 갑자기 백골단에게 질질 끌려가 의미 없는 군량미 소진 투쟁을 벌였을 뿐인데, 너무 민망하다!
이 일을 겪은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1991년 봄이었고, 당시 주말마다 원진레이온 공장 앞에서는 시위가 열렸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 자료를 확인해보니 137일 동안 ‘장례 투쟁’이 이어졌다고 한다. 내가 다니던 의대 선배들은 그 지역에서 무료 진료소 활동을 해왔고, 원진레이온 투쟁에도 함께하고 있었다. 나 같은 후배들도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다. 출근부를 찍듯 매주 찾았는데, 그날은 평소보다 큰 집회가 열린 것으로 보아 4월28일 아니면 5월12일의 ‘원진레이온 직업병 은폐 규탄 및 범국민 산재추방 결의대회’였던 것 같다. 자료로 남아 있는 팸플릿에서는 지금 내가 활동하고 있는 노동건강연대의 전신 ‘노동과건강연구회’ 이름도 찾아볼 수 있다.
SBS 방송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도 소개된 적 있는 원진레이온 투쟁은 우리 사회 노동자 안전보건 운동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일 뿐 아니라 내 인생에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사실 나는 공대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전기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나서 마지못해 후기 전형으로 의대에 진학했다. 소명의식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입학하자마자 운동권 선배들에게 ‘픽’되어 사회과학 세미나를 하다 보니 의사가 점점 더 시시해 보였다. 세상이 이 모양인데 의사는 해서 뭐 하나.
그런데 원진레이온 투쟁에 참여하던 어느 날 선배가 예방의학이라는 분야가 있다며, 의사라고 모두 환자 진료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예방의학을 전공하면 집회에서 처음 들어본 단어인 ‘역학조사’라는 것을 해서 직업병의 원인을 규명하고 보건정책을 만드는 연구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앗, 이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배라고 해봤자 본과 2~3학년 학생이 예방의학에 대해서 뭘 얼마나 알았을까 싶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인생의 등불을 밝히는 가르침으로 들렸다. 이렇게 덜컥 인생의 경로가 결정되었고, 이는 원진레이온 투쟁이 남긴 여러 유산 중 가장 소소한 것이리라.
6개월 만에 미쳐버린 노동자들
원진레이온 직업병 집단 발병의 직접적 원인 물질은 이황화탄소(CS2)였다. 황과 탄소가 결합한 이 물질은 무색의 가연성 액체로 1796년 독일 화학자가 처음 합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오늘날 생산량의 75%가량이 비스코스 레이온(인견사)과 셀로판 필름 제조 과정에 쓰인다. 목재나 대나무 펄프에 가성소다를 첨가하여 분해한 후 이황화탄소를 더해 녹이면 점성이 높은 비스코스 혼합물 상태가 되고, 이를 여과기와 방사기를 거쳐 실로 뽑아내어 정련과 건조 과정을 거치면 비로소 비스코스 레이온이 완성된다. 비스코스 레이온은 1905년 영국에서 첫 상업적 생산에 성공한 이래 면에 맞서는 인기 직물로 자리 잡았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폴리에스터 같은 합성섬유에 밀려나 경쟁력을 잃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미세플라스틱을 발생시키지 않는 ‘재생가능 친환경 섬유’로 다시 각광받고 있다. 염색이 잘되어 다양한 색상을 표현할 수 있다. 흡습성이 좋으며 서늘하고 부드러운 촉감 때문에 정장옷의 안감, 잠옷, 여름철 의류 소재로도 인기가 높다.
레이온 섬유 자체는 장점이 많고 심지어 ‘친환경’이지만 제조 과정에 쓰이는 이황화탄소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겪은 것과 같은 심각한 건강 피해가 발생한다. 이황화탄소 중독은 주로 신경계에 문제를 일으켜 섬망과 환각, 조현병 증상과 편집증적 사고, 기분장애뿐 아니라 시각·청각 신경과 말초신경 장애를 초래한다. 심장질환과 뇌졸중도 중요한 건강 피해 중 하나다. 원진레이온 노동자 사이에서도 이러한 다양한 질병들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이황화탄소 독성은 이미 19세기 중반, 이를 먼저 사용한 고무 산업에서 피해 사례가 나타났다. 1900년대 영국에서 레이온 생산이 시작되면서 노동자들의 건강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일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노동자들이 ‘미친 사람’으로 변해가니, 이황화탄소의 독성이 알려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30년대 미국에서 첫 대규모 역학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당시 노동자 30%가 중독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대 영국 연구에서도 노동자들의 심장마비, 뇌졸중 증가가 확인되었다.
그즈음 북미와 유럽의 생산설비는 인건비가 저렴하고 규제도 느슨한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 등지로 대거 옮겨갔다. 일본 동양레이온의 설비가 한국으로 건너온 것도 1964년이다. 일본 공장에서 이황화탄소 중독 환자가 40명 이상 생기며 1962년에 가동이 전면 중단되었는데,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흥한화학섬유(주)가 이 공장 설비를 36억 환에 들여왔다. 이 회사의 설립자 박흥식은 반민특위의 첫 체포 대상자이었을 만큼 대표적 친일파였다. 시작부터 잘못 끼운 단추였던 것이다.
비스코스 레이온 공장은 옮겨 다니는 곳마다 죽음의 사신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황화탄소의 건강 독성에 대한 근거는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등 전 세계 각지에 걸쳐 생산기지 이전에 따라 다양한 언어로 남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매번 문제가 ‘새롭게’ 재발견되었다. 그래서 2016년 출판된 〈가짜 실크: 비스코스 레이온의 치명적 역사〉의 저자는 이를 ‘주기적 기억상실증(cyclical amnesia)’이라고 표현했다.
이황화탄소 중독이 이렇게나 잘 알려진 문제였다는 점을 알고 나면 원진레이온 사건에 더 화가 난다. 아픈 몸 때문에 일도 그만두고 원인 모를 병마와 외롭게 싸우던 노동자들, 심각한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노동자들, 이들의 고통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노동자들의 건강 피해가 드러나기 시작하고도 회사는 상당 기간 직업적 연관성을 부정했고, 일부 전문가들은 사측과 결탁하여 작업환경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진단했다. 1993년 원진레이온 폐업 이후 1994년 라전모방이 공장을 인수하여 중국 단둥시에 위치한 국영화학섬유 총공사에 매각했다. 이제 이황화탄소에 의한 건강 피해를 다룬 연구 목록에 한국어와 중국어 논문들이 추가되고 있다. 학문적 언어 다양성이 훨씬 풍성해졌으니 기뻐해야 할까?
선진국의 산업시설이 건강 피해나 환경오염 같은 문제를 일으키고 해외로 이전하는 사례는 레이온 말고도 많다. 석면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첨단산업’인 반도체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난다. 반도체 생산의 건강 영향에 대한 논문의 출판 국가를 표시해보면 뚜렷한 지리적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에는 핀란드, 영국, 미국에서 각각 단 한 편씩 논문이 출판되었고, 1990년대에 발표된 논문은 모두 영국과 미국의 노동자를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과 타이완 논문이 출현하기 시작하고 편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2017년 봄,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소속 기자로부터 인터뷰 요청 이메일을 받았다. 우리가 2015년에 국제 학술지에 발표한 전자산업 여성 노동자의 자연유산 위험에 대한 논문을 보고 연락해온 것이었다. 그는 반도체 부문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경제기자라고 소개하면서, 논문에 대한 배경 설명을 듣고 싶다고 했다. 막상 만났을 때에는 취재원인 나보다 그가 더 많은 말을 했다. 기자도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것이다.
미국에서 1990년대 반도체의 건강 피해, 특히 생식독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규제를 강화하고 사용도 금지시켰는데 한국에서 이 문제가 여전하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1984~1986년 미국에서 반도체 사업장의 생식독성 연구를 처음 수행한 해리스 파스티데스 교수를 직접 만났다고 했다. 1988년에 발표된 그의 논문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참고자료였다. 반도체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유산 위험이 높다는 그의 연구 결과가 발표된 이후 미국에서는 본격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반도체산업협회에 속한 14개 회사, 42개 공장, 그리고 가장 규모가 큰 IBM 사업장에 대한 조사 연구가 각각 이루어졌고 1992년에 첫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모두 기업이 후원한 연구였지만 일관되게 반도체 생산공정에 노출된 여성 노동자의 유산 위험이 분명히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계는 재빠르게 행동했다. EGE라는 독성 화학물질을 원인으로 지목하며 이를 제조공정에서 퇴출시키기로 결정했다. 파스티데스 교수는 이를 공중보건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로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논문이 여러 세대 여성을 돕는 결과로 이어지다니 “공중보건의 동화(fairy tale)” 같았다는 것이다. 그랬던 그가 20년 후 지구 반대편 여성 노동자들이 여전히 비슷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다니 공중보건의 상실이라며 낙담했다는 이야기를, 그 기자는 전했다. 1990년대 중반, 사회적 논란이 커지면서 미국 반도체 산업은 자체 생산 라인을 대폭 축소했다. 그리고 한국의 삼성, 하이닉스 같은 회사와 대규모 구매계약을 체결하며 생산기지를 이전했다. 생산의 거점이 옮겨지면서 위험도 함께 이전되었고, 공중보건의 동화는 슬픈 결말을 맞았다.
인체에서 여덟 번째로 풍부한 원소
이황화탄소 이야기를 하느라 아직 이번 ‘주기율표’ 회차의 주인공 ‘황’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원소기호 16번 황 자체는 대단한 악마의 물질이 아니다. 순수한 황 원소는 냄새가 없고 독성도 없다. 일상생활의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뿐 아니라 생명체의 필수 요소이기도 하다. 성냥, 고무, 살충제와 살균제, 헤어펌 제제, 페인트 제조에 황은 필수적인 재료다. 산업 영역에서는 황산 형태로 비료 제조에 사용되는 수량이 가장 많다. 의약품에도 널리 사용되어, 인류가 개발한 최초의 항생제 페니실린의 주요 성분이다. 또한 우리 몸을 구성하는 중요 원소이기도 하다. 인체에서 여덟 번째로 풍부한 원소인데 몸무게 70㎏인 사람의 몸에는 황이 약 140g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황은 피부 조직, 특히 S-S 결합 형태로 머리카락과 손발톱의 케라틴을 구성한다. 단백질의 고유한 기능은 형태에서 비롯되며, 복잡하게 접혀 있는 단백질 모양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수소 결합과 이황화 결합이다.
하지만 굳이 이황화탄소가 아니더라도, 황의 대중적 이미지는 그리 친근하지 못하다. 고대부터 그랬다. 주로 화산, 온천 근처에서 자욱한 수증기를 배경으로 독특한 냄새와 함께 발견되는 노란 덩어리는 신비롭고 다소 두려운 물질이었으리라. 산스크리트어로 ‘불의 근원(sulvere)’이라는 단어에서 라틴어 ‘sulphurium’이 유래했고 이것이 변형되어 현재 ‘황(sulfur)’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구약 성서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응징하는 데 사용된 불벼락이 유황불이고,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꽃도 무려 444.7℃의 끓는점을 가진 유황이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나에게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던 신자는 도저히 내가 넘어가지 않자 “천국에 가고 싶지 않으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아뇨, 저는 지옥 가고 싶은데요.” 그분은 옆 칸으로 도망갔다. 꺼지지 않는 지옥 불이라면 인류가 꿈꿔온 무한동력 아닌가 말이다. 파인만, 호킹, 힉스, 슈뢰딩거, 아인슈타인 같은 일류 물리학자들도 신을 믿지 않는다는 불경죄로 이미 와 있을 테니 일찌감치 냉방설비를 갖춰놓았을 수도 있다. 더글러스 애덤스, 커트 보니것 같은 유쾌한 작가들과 많은 SF 작가들도 이미 자리 잡고 있을 터라 심심할 걱정도 없다. 무엇보다, 동성애 반대하는 부채춤을 보지 않아도 되고, 임신중지가 죄악이고 진화론은 엉터리인 데다 동성애가 사회주의 혁명 수단이라는 기기괴괴한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니 눈살 찌푸릴 일도 없다. 직업병 걱정 없이, 신비로운 푸른색 불꽃으로 이글거리는 유황 지옥불을 불멍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본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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