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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와 전동 드릴이 좋아요'..직접 집수리에 뛰어든 여성들

조회수 2020. 9. 4. 1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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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직업이니까 여자는 못 한다? 남자가 해도, 여자가 해도 힘이 드는 일입니다."

"집 고치러 왔습니다."

무더위가 한창인 8월의 여름날, 두 손 가득 공구함을 든 여성 두 명이 서울 중구 회현동의 한 가정집을 찾았다.

의뢰인인 집 주인과 간단한 인사만 하곤 이들은 곧장 화장실로 가 세면대를 뜯어냈다. 멍키스패너로 나사를 풀고, 망치로 이곳저곳을 두들기기도 했다. 그리고 시멘트와 실리콘 작업이 이뤄졌다. 바로 여성 주택수리서비스 '라이커스' 소속 집수리 기사들의 작업 현장이다.

여성 기사들로만 이뤄진 라이커스는 스위치나 콘센트 공사, 가구 조립 및 설치, 전등 수리와 교체, 세면대 배관 공사 등을 도맡아 한다.

안형선 대표 수리기사는 10년 넘게 자취를 하며 겪었던 경험이 결국 창업으로 연결됐다고 했다.

"집을 수리할 일이 생길 때마다 남성 기사님이 오셨는데, '왜 이 영역에 여성은 없나'하고 의문을 던지게 됐습니다."

'집 수리에 남녀 구분 필요한가요?'

어렸을 때부터 공구함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던 안 씨는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남다른 그의 모습을 신기해하면서도 관련 직업을 권유하지는 않았다.

안 씨는 "여성들이 충분히 역량이 있는데도 그것을 발휘할 기회조차 찾기가 어려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특히 남성들이 주로 일했던 산업 분야에서 여성들도 종사할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며 집수리에 뛰어든 이유를 밝혔다.

여성 집수리 기사 서비스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지난해 11월 공식 사업 출시를 앞두고 진행했던 체험서비스엔 이틀 만에 100여 명이 몰렸다.

참가자 상당수는 '안전'을 이유로 들었다.

지난해만 해도 서울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 부산 중고가구 매매 1인 가구 여성 살해사건 등 여성 안전 문제가 크게 대두됐다.

이날 수리를 맡긴 이나은 씨도 "낮에 엄마와 저 둘밖에 없는데, 남성 수리기사를 부르면 아무래도 긴장되고 불안했다"며 "예전에는 항상 문을 닫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열어놓고 편안하게 다녔다"고 말했다.

여성 집수리 기사들이 공구함을 살피고 있다

고정관념 타파 넘어 업종 관행 개선도 꿈꿔

단지 수리기사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대체하는 게 안 씨의 목표는 아니다.

"제 경험에 비춰보면 누가 제 사적인 공간에 들어와서 제가 쓰는 물건이나 제가 사는 방식에 대해 언급을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편했어요. 그래서 업무 관련이 아니면 아예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수리 전에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 견적서를 받지 못하고, 정찰제가 아닌 대부분 현금 결제만 가능했던 불편함도 바꿨다.

"증빙이 돼 집주인한테 수리 비용 청구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등의 피드백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게 공통의 불편함이 맞았다는 점을 깨달았어요."

안 씨는 수리기사 일이 '힘든 일'이지만 이 때문에 선을 그어선 안 된다고 했다.

"힘든 직업이니까 여자는 못 한다는 말은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해요. 남자가 해도 힘이 들고 여자가 해도 힘이 드는 일입니다."

그는 "이 일은 힘보다는 기술이나 경험이 더 바탕이 된다"며 "앞으로 이 업계에서 여성 수리기사가 더 많아지고, 그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부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직접 집수리 나선 여성들

이런 흐름과 더불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기술 수업'도 각광을 받고 있다.

여성 기술교육 협동조합 '여기공'(이하 여기공)이 개설한 교육과정 '집 고치는 여성들: 주택수리과정'도 그 중 하나다.

전동드릴 사용법, 타일이나 실리콘 작업을 비롯해 배관이나 수전 등과 관련해 이론과 실기를 익힐 수 있다.

강사와 교육생 모두 여성이다.

이 수업은 수강 신청 1시간 만에 마감됐으며, 공지 리트윗이 사흘 만에 3000회가 넘을 만큼 관심이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관심에 비해 그동안 여성들이 편하게 참여할 교육 프로그램은 많지 않았다.

이현숙 여기공 대표는 "강사와 수강생 대부분이 남성인 교육에 참여했던 분들이 수업에서 (교육생이기보다는) '여성'으로 대상화됐던 경험을 토로했다"고 말했다.

여기공 수업에선 수강생들을 이름 대신 별칭으로 부르고, 사생활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불편한 경험이 되지 않고 교육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지난 22일 여기공은 다른 단체들과 더불어 여성가족부의 지원을 받아 '공구·주택 수리체험 워크숍'을 열었다.

이날 전동드릴과 실리콘 교육을 받은 김초희 씨는 여학교 등을 다니고 자라면서 여초 환경에 놓인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학창시절 배운 기술·가정 교과목 시간에도 실제로 기술을 체험해 볼 기회는 적었다.

1인 가구로 살고 있는 그는 "어느 순간부터 여전히 전등을 갈려면 아빠를 부르거나 '전기 아저씨'를 불러야 하는 현실에 제약을 느껴서 신청하게 됐다"며 "직접 해보니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고 했다.

전문 경력 개발 어려운 현실

여성들의 관심은 높아졌지만, 여전히 여성 전문 수리공의 숫자는 미비하다.

2018년 한국산업인력공단 국가기술자격통계에 따르면 기술 관련 자격을 딴 여성은 전체 취득자 68만 6391명 중 36.3%인 24만9359명이었다.

하지만 가장 높은 기술자격 등급인 '기술사'의 경우 전체 1919명 중에서 여성은 6.7%인 129명에 불과했다.

같은해 12월 말 기준 건설업 취업자 중에서도 여성의 비율은 9.9%로 전체 산업별 성비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다.

이와 관련해 이 대표는 남성 중심적인 구조를 지적했다.

그는 "현장에서 높은 직급이나 어려운 기술일수록 여성에게 전수하지 않는 구조가 남아있다"며 "실제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임금을 70% 삭감하거나 관리직들의 성희롱 발언을 듣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고 설명했다.

건설 현장에 여자 화장실이나 별도의 샤워실이 없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렇다 보니 여성들이 건설 직군에 들어오기도 어려울 뿐더러 남아있기도 어렵다는 것.

이 대표는 무엇보다 "여성은 이러하고 남성은 저러하다는 성차별적인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며 기술자들을 대상으로 한 '젠더 감수성 교육'을 통해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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