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삼성으로 이끈 이건희 경영

조회수 2020. 10. 25. 1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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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휴대전화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 삼성전자를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향년 78세를 일기로 25일 별세했다.

이건희 회장은 부친인 이병철 삼성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삼성 그룹은 장례는 고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글로벌 삼성

1942년 1월 9일, 일제강점기 당시 대구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1953년 어린 나이에 부친 권유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이후 한국, 일본, 미국을 오가며 학문을 이어갔다.

1965년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경영학 석사를 수료했다.

이후 1966년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홍라희 여사와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그는 1966년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해 본격적인 경영 경력을 시작했다. 1968년 주식회사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주식회사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에 올랐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의 수장으로서 반도체, 휴대전화 사업 등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 삼성전자가 세계적기업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삼성그룹 창업 50주년을 맞아 경영 전 부문에 대대적인 혁신을 추진했다.

특히 당시 삼성전자 사장과 임원들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소집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작심발언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삼성의 제2창업을 선언하고 '인간중심, 기술중시, 자율경영, 사회공헌'을 경영의 축으로 삼아 ‘신경영`을 추진했다.

기존에 양적 향상에 집중하던 분위기를 버리고 제품, 사람, 경영의 질을 높이는 데 집중한 전략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 추진을 위해 제일 먼저 임직원들에게 개혁을 공감시키고 전사적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그는 신경영 전파를 위한 교본을 만화책 등으로 만들어 당시 임직원들은 매일 아침 교본을 놓고 1시간씩 토론을 했다고 한다. 신경영은 ‘7·4제’라는 출퇴근 시간 변화로 드러나기도 했다.

‘7·4제’는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오후 4시에 퇴근하는 것으로 변화의 절박감을 임직원들이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고육책이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삼성을 한단계 도약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 1987년 1조원이던 삼성그룹의 시가총액은 2012년 390조원대로 성장했으며, 삼성전자는 2006년 글로벌 TV 시장에서 일본 소니를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했다. 또 애플을 따라잡고 스마트폰시장 1위를 달성했다.

또 메모리 반도체를 포함해 20여 개 품목에서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국제스포츠 외교

이건희 회장은 스포츠 발전에도 큰 영향을 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교 시절 레슬링 선수 경력이 있는 이건희 회장은 1982년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 회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체육계에서 활동을 시작. 이후 프로야구, 프로축구, 탁구, 육상, 태권도 등 여러 종목의 팀을 창단해 운영을 주도했다.

1996년 7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회 선출된 후로 세계 스포츠 외교의 전면에 나섰다. 그의 IOC경력 가운데 특히 강원도 평창이 세 번의 도전 끝에 2018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는 평을 받는다.

경영권 승계 과제

그는 삼성그룹 총수로서 여러 의혹과 수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조성사건에 연루돼 첫 검찰 소환조사를 받은 그는 이후 1996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항소를 포기했다.

당시 재판부는 250억 원의 비자금 제공 혐의를 받은 그가 "기업활동 등으로 국가경제발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은 점, 공익사업과 기부 등으로 사회봉사활동을 활발히 하는 점" 등을 참작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후 1997년 개천절에 사면 복권돼 1998년 4월 경영에 복귀했다.

이후 2008년에도 배임과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불구속기소. 2009년 파기환송심에서 일부 유죄가 인정돼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재계·체육계 건의로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는 2010년 경영일선에 복귀해 전략기획실 해체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쓰러진 뒤 그는 아들 이재용 부회장에게 사실상의 경영권을 양도했다.

현재 이 부회장은 경영권 승계를 위해 부정한 방식으로 삼성 그룹 계열사를 합병하고 회계장부를 조작하는 데 관여했다는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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