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꽃제비'의 첫 미국 대선 투표기

조회수 2020. 10. 3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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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김은 자신이 나고 자란 북한이 아닌 미국에서 생애 첫 대선 투표를 앞두고 있다.

올해 서른 살인 조셉 김(한국 이름 김광진)은 자신이 나고 자란 북한이 아닌 미국에서 생애 첫 대선 투표를 앞두고 있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김 씨. 회령은 두만강을 지척에 둔 중국과의 국경지대다. 아버지는 그가 12세 때 아사했다. 이어 어머니, 누나와도 헤어진 그는 홀로 꽃제비가 돼 거리를 떠돌며 하루하루 전전긍긍 살아갔다.

2006년 탈북한 그가 이듬해 미국 탈북자 구출단체의 도움으로 중국에서 미국으로 온 지 어느덧 13년이 지났다. 그리고 오는 11월 3일,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손으로 지도자를 직접 뽑게 됐다. 김 씨는 "어떤 단어로도 이 감정을 표현하기 어렵다"고 소감을 전했다.

"실감이 안 나죠. 제 평생 한 나라의 대통령 선거에 유권자로 참여할 수 있다고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투표를 통해 내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나라도 많잖아요. 북한이 그 중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고요."

김 씨와 BBC 코리아의 인터뷰는 11월 미국 대선을 약 열흘 앞두고 이뤄졌다. 텍사스주에서 유권자 등록을 마친 김 씨는 이번 주 투표소를 직접 방문해 조기 투표를 할 예정이다.

꽃제비가 미국에 가기까지

1990년대 중반 대기근은 북한 주민들의 삶을 휩쓸었다

김 씨는 12세 때 모든 것을 잃었다. 아버지가 굶주려 죽었고, 사이가 각별했던 누나는 중국으로 팔려갔다. 브로커를 통해 누나를 데려오려던 어머니까지 수용소에 끌려가자, 그는 혼자가 됐다.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대기근이 주민들의 삶을 휩쓸었다. 이 기간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자라면서 거리에 있는 아이들을 봤지만, 자신도 그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말했다.

배고픔에 북한의 시장인 장마당에서 구걸하거나 자투리 음식을 훔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다 2006년, 16세 때 중국으로 탈출했다. 강을 건너다 군인에게 걸려 죽으나 거리에서 굶주려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운 좋게 중국에 도착한 그는 미국의 탈북자 구출 정착 지원단체인 '링크'(LiNK) 활동가의 도움을 받아 2007년 미국에 왔다.

2004년 부시 전 대통령은 '북한인권법'에 서명했다

그는 "부시 전 대통령이 서명한 '북한인권법'이 없었다면, 합법적으로 정치난민 지위를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4년 미국 의회 주도로 제정된 북한인권법은 미국 최초의 북한 인권 관련 공식 법안이다. 이 법으로 탈북자들은 미국에서 난민 자격을 취득할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난민 지위를 받아 미국에 정착한 탈북자는 220명으로 집계된다.

'자유'를 찾아온 미국

사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한국에 정착한다. 통일부에 따르면 이 기간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는 2만7400여 명이다. 실제 탈북자가 미국에 입국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난민 심사 과정은 한국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김 씨가 중국 심양주재 미국영사관에 있을 때, 그는 보호자가 없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난민 심사 과정이 더 복잡했다고 한다. 미 영사관은 김 씨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북한 노래를 불러보라거나, 위성 사진을 보여주며 고향을 찾아보라고도 했다.

"한번은 저한테 왜 미국에 오고 싶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전 '자유를 찾고 싶어서요'라고 답했는데, 한국에도 자유는 있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때 솔직히 당황했어요. 그런데 어린 마음에 '그렇다면 더더욱 미국에 가야지'하고 결심했던 것 같아요."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는 두려움은 크지 않았다고 한다. 김 씨는 "언어 장벽이 있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미국에 오는 이민자라면 누구나 다 겪는 성장통"이라고 답했다.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제 적응기가 더 특별한 건 없었어요. 하지만 한국에 정착하는 탈북자들은 북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마주하는 편견이나 고충이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미국 정착기

김 씨는 미국에 정착해 버지니아주에서 위탁보호 가정의 보살핌을 받으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 했던 그에게 학교생활 적응은 절대 쉽지 않았다. 원하는 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율적으로 학습하는 미국식 학교생활도 너무 낯설었다.

"제가 영어를 못한다는 걸 다들 아니까 친구들이 저한테 와서 말을 걸거나,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질문하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절 중학교 수학 과정인 '대수학'(Algebra) 수업에 넣더라고요. 영어는 못해도 아시아인이니까 수학은 잘하겠지 했던 거죠."

실제로 북한에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그는 처음에 단순 곱셈이나 분수 계산도 못 했다고 한다.

비록 늦게 시작한 학업이었지만, 김 씨는 4년 만에 고등학교를 우등 졸업했다. 이후 뉴욕주 브루클린에 있는 커뮤니티 칼리지를 거쳐 바드 칼리지로 편입해 정치학을 전공했다.

북한 인권문제를 알리는 '인권 담당관'

김 씨는 오랜 시간 북한의 실상과 인권 문제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여러 무대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왔다. 그는 탈북 여정과 미국에서의 정착기를 담은 2013년 '테드'(TED) 강연 무대로 주목을 받았고, 2015년에는 '같은 하늘 아래'(Under the Same Sky)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냈다.

현재 그는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있는 정책연구소 부시센터에서 인권담당 보좌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부시센터는 미국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퇴임 후 2009년 설립한 싱크탱크다. 김 씨는 이곳에서 미국 내 탈북자를 지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미 대북정책과 북한 인권정책 관련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트럼프와 김정은

트럼프 대통령은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은 미국 대통령이 됐다

세월이 지난 만큼 미국의 상황도 많이 바뀌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취임 이후 미국 내 난민 입국 상한선을 줄여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2018년 회계연도에 최대 난민 수용 수를 4만5000명으로 제한해 직전 연도보다 절반 이상 줄였다. 이어 2019 회계연도에도 3만 명, 2020년 회계연도에는 1만8000명으로 낮췄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관계도 급변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 2019년 2월 베트남 정상회담, 그리고 같은 해 6월 DMZ 만남까지 총 3번 만났다.

북한을 떠나 미국에 온 김 씨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만남을 어떻게 봤을까?

그는 "악과 함께 일을 하는 것과 악을 칭송하는 것은 다르다"며 "미국의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똑똑하고 좋은 친구라고 칭하는 것이 적합한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이런 말은 앞으로도 미국 정책이나 신뢰성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인권은 이루고자 하는 목표인 거지 정치적 도구가 돼서는 안 됩니다."

지난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는 여러 종류의 대형 미사일들이 공개됐다

북한은 지난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 때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공개한 바 있다.

김 씨는 북한의 핵무기는 북한 사람들의 인권을 탄압하면서 만들어졌다고 강조했다.

"대북정책에 대한 논의에서 북한 사람들의 인권 문제가 빠져서는 안 됩니다. 안보가 더 중요하다는 이유로 인권 문제는 나중에 하자고 하는 건 개인적으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내가 북한을 바꿀 수 있을까?

김 씨는 2013년에 오른 테드 강연 무대와 2015년 발간한 자서전 '같은 하늘 아래'로 북한 인권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그런 그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왔다. 몇 년 전 자서전 관련 홍보가 한창이던 때, 자신의 이런 활동이 정말 북한 정권을 바꿀 수 있을지, 사람들을 행동하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정치학을 공부하며 국제 정치 메커니즘을 배울수록 회의감은 깊어졌다.

그는 이에 대한 답을 철학에서 찾고자 했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 상사가 제게 해준 조언이 있어요. '조셉, 항상 뛰어다닐 수는 없겠지만, 이 일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그 말이 위로가 많이 됐어요."

그는 불꽃 같은 열정도 북한 인권을 위해 일하는 데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기 위해 필요한 '자신만의 속도'를 찾으려,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김 씨는 앞으로도 자신의 경험과 북한 인권의 중요성에 대해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자신의 얘기를 듣는 모든 사람이 실질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가 아니다.

"제 강연에 오거나 영상을 통해 제 얘기를 접한 사람 중 90%는 일상으로 돌아가겠죠.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하거나 원망하지 않아요. 그것도 삶의 일부인걸요."

김 씨는 "그래도 적어도 한 사람의 마음이 움직여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제 역할을 하는 것 아닐까요?"라고만 되물었다.

그래도 북한은 그리운 나의 고향

김 씨가 미국에 정착한 지 어느덧 13년이 지났다. 떠나고만 싶었던 북한이 그에게 지금은 어떤 존재냐고 물었을 때, 그는 주저 없이 '고향'이라고 답했다.

북한과는 환경이 전혀 다른 댈러스에서도 그는 고향 생각이 때때로 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인간답게 살 기회를 얻었다면, 북한은 자신에게 "아픈 손"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인터뷰를 진행한 오전, 댈러스에는 비가 왔다.

그는 "북한 거리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비 오는 날은 정말 최악"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비가 오면 꽃제비들은 정말 갈 곳이 없거든요. 다리 밑에서 비를 피하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지금처럼 비가 올 때면, 집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큰 행복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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