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K 금제품 직접 조사해보니.. '순금' 24K 순도 99.9% 충족해야 땜 들어간 제품은 99.5%도 허용 업계선 소비자에 동일하게 취급 "소비자에 사기 치는 것" 지적 일어
금의 가치는 희귀성과 불변성에서 비롯된다. 특히 함유량 99.9% 이상을 의미하는 ‘순금’은 수천년을 이어오며 단순 재화 이상의 가치를 담아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금 사랑은 각별하다. 가정에서는 첫돌에 금반지를 선물하며 부귀영화를 기원하고, 회사에서는 근속을 치하하는 의미로 금열쇠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애지중지하며 장롱 속에 보관하던 돌반지, 금팔찌가 사실은 ‘순금’(24K)이 아니라면 어떨까. 국내 금거래 시장의 메카 서울 종로를 중심으로 유통되는 순금의 상당수가 함량 미달의 ‘불량금’인 것으로 드러났다. 적게는 0.1%에서 많게는 2%가 넘게 순도를 낮추며 ‘순금이 아닌 금’을 순금이라고 속여 버젓이 판매하고 있다. 허술한 제도와 관리 감독의 틈에서 40년 넘게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현실이다. 세계일보는 탈세와 불법, 불량으로 얼룩진 우리나라 금시장 실태를 3회에 걸쳐 파헤쳐 본다.
◆‘순금의 배신’…함량 미달 ‘수두룩’
“○○씨! 이리 좀 와 봐요. 이거 순도 체크해 봤어요? 한참 모자라는데.”
지난달 22일 서울 종로에서 만난 금 거래업자 A씨는 일반 소비자들로부터 매입한 금(일명 ‘고금’)의 순도가 기준치에 미달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급하게 직원을 불렀다. 직원은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고 했다. A씨는 “의심스러운 제품은 바로바로 확인해 봐야 한다”고 당부했다. 문제가 된 금제품은 돌반지였는데 금의 함량, 즉 순도가 99.9%여야 함에도 98.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A씨는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그가 이날 순금인 줄 알고 매입한 고금 10개 가운데 순도 99.9%인 것은 단 1개도 없었다. 애초 이러한 금을 구입했던 소비자들 역시 “속고 샀을 것”이란 게 A씨의 설명이다.
세계일보 취재 결과 현재 국내 금 시장에서 상당량의 금제품이 ‘함량 미달’임에도 ‘순금’으로 둔갑해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제품에 들어간 금의 함량이 기준치를 밑돌지만, 시중에선 버젓이 순금으로 거래돼 소비자 피해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우리나라에 순금 제품의 순도를 관리하는 법 자체가 없어서다.
취재팀은 시중에 유통 중인 금의 순도 불량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엑스레이 분석감정기를 이용해 돌반지와 목걸이, 팔찌 등 100개 제품의 순도를 비파괴분석 방식으로 검사했다. 그 결과 39개(미표기는 99.5로 간주) 제품의 실제 순도가 제품 표면에 표기된 것보다 낮게 나타났다. 세공을 위한 땜질이 필요 없는 금제품의 경우 순도를 99.9%에 유지해야 하는 기준을 적용하면 부적합한 수는 무려 66개에 달했다.
취재팀은 측정 결과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99.9%로 표기된 제품 10개를 추린 뒤 한국산업규격(KSD0404)에서 정한 방법에 따라 재차 파괴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 단 3개만이 적격 판정을 받았다. 나머지 7개 제품은 99.9%에 미치지 못했다. 금 시장에 유통되는 금 중 순도가 기준치 이하인 ‘불량금’의 양이 적지 않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분석 제품 가운데 가장 낮은 순도는 97.97%(2돈·아기팔찌)였다. 팔찌의 기준 순도인 99.9%에서 2% 넘게 빠진 것으로, 순금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다. 이 같은 순도로 금팔찌를 찍어내는 금 공장이라면 팔찌 100개를 만들어야 할 금으로 2개를 더 만들어 부당이득을 취할 수 있다. 금판매업 관계자는 “이 정도라면 의도성을 가지고 (금을) 빼돌리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귀금속중앙회의 자체 결과에서도 이 같은 문제점은 드러났다. 중앙회가 지난해 9월부터 3개월간 실시한 귀금속 함량조사 결과 샘플 136개 제품 가운데 32개(23.53%)가 함량 미달인 것으로 나타났다. 함량 미달 수준은 995(32%), 750(18K·30.19%), 585(14K·21.62%)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 품목별로는 팔찌(50%), 목걸이 전체(37.5%), 목걸이 체인(31.58%) 순이었다. 목걸이 제품은 2018년도 함량조사 당시 순도가 기준치를 크게 밑도는 것으로 나타나 지난해에는 목걸이를 체인, 펜던트 등으로 나누어 수집했는데 결과는 비슷했다.
서울 종로구 한국금거래소 본사에서 직원이 매입한 금 제품을 골드바로 만들기 위해 주조 작업을 하고 있다. 뉴스1
◆“제도를 악용해 수십년째 사기”
금제품 순도의 기준을 제시한 기술표준원 규정(고시명 KS D 9537)은 2011년 7월 제정된 뒤 한 차례 개정(2013년)을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금제품이 충족해야 하는 금의 함량을 명시한 유일한 규정이다. 이에 따르면 흔히 순금으로 불리는 24K는 순도 99.9%를 충족해야 한다. 금 거래업자들은 이러한 금을 ‘999’(쓰리나인) 또는 ‘덩어리금’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기술표준원은 일명 ‘995’로 불리는 순도 99.5% 제품 역시 ‘순금 제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999와 995에 대한 허용 범위가 엄연히 다르지만 업계에서는 사실상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 다시 말해 995 제품이 ‘순금’은 아니지만 ‘순금 제품’에 포함된 탓에 시장에서 소비자 모르게 순금으로 거래되고 있는 셈이다.
기술표준원이 995 제품도 ‘순금 제품’으로 인정하는 이유는 제품 디자인상 접합을 위한 땜이 들어가는 경우를 ‘배려’하기 위함이다. 땜은 금과 금을 붙이는 일종의 접착제 역할을 한다. 금보다 녹는점이 낮은 다른 금속이 땜으로 쓰인다. 땜이 들어간 제품이 999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이에 기술표준원은 땜이 들어간 제품의 순도는 995 이상, 그렇지 않은 경우 999 이상이어야 순금 제품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기술표준원의 의도와 달리 순금, 즉 999를 원하는 소비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995 또는 그보다 낮은 순도의 제품을 순금으로 알고 시중에서 사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땜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단순한 형태의 돌반지, 유아용 팔찌도 995 또는 그 이하의 순도로 제작돼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제품 한두 개를 사는 경우 99.5%와 99.9%의 금값에 큰 차이는 없다. 1돈(3.75g)짜리 돌반지에서 0.4%가 빠질 경우 1066원(13일 KRX금시장 종가 기준), 5돈짜리 목걸이도 5330원 차이가 나는 정도다. 30만∼150만원의 제품가에 비하면 구매 결정을 좌우할 만한 액수는 아니다.
소비자의 입장이 아닌 판매, 제작자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거래하는 금의 양이 많아지면 무시하지 못할 금액으로 불어난다. 국내 금 거래량은 한해 약 80∼100t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10% 정도만 ‘순금·24K’란 이름으로 99.5% 금이 유통된다고 가정하면 22억∼28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 순도를 조금만 더 낮추더라도 금액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엄밀히 말해 소비자들은 사기를 당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귀금속중앙회 김준석 품질관리위원장은 “귀금속은 반드시 강제적으로 함량 관리를 해줘야 (시장이) 유지된다”고 말했다. 그는 “금 시장 원로들이 ‘금을 이대로 놔둬선 안 된다’고 정부에 요구한 끝에 국가기술표준원이 관련 규정을 고시하는 것으로 방향이 잡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규정은 강제조항이 아니기 때문에 설령 지켜지지 않더라도 기술표준원이 할 수 있는 조치는 사실상 전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