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번역 연재 끝나자 日 심장선 대한독립선언 울렸다[오색인문학]
박진영 성균관대 교수·국어국문학
힘없지만 목숨걸고 코제트 지키는
장발장의 운명 '슬픈 역사'로 번역
식민지 조선의 아픈 현실 그려내
3·1운동 후 단행본으로 다시 번역

빅토르 위고 원작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이야기다. 가난과 도둑질의 대명사가 된 장 발장. 비천한 전과자 주제에 장 발장은 새로운 삶을 꿈꿨다. 보잘것없는 지방도시를 부흥시켜 시장으로 추대됐고 시민혁명에 휩쓸렸다가 명문 귀족과 사돈을 맺기도 했다. 꿈은 이뤄질 수 없었다. 장 발장 곁에는 일생을 걸고 지켜야 할 코제트가 있었으며 코제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자베르에게서 도망쳐야 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애사’에서 장 발장의 이름은 아직 장 발장이 아니었다. 민태원은 장 발장에게 장팔찬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지어줬다. 코제트는 고설도, 자베르는 차보열로 교묘하게 바뀌었으니 원래 발음에 가까우면서도 캐릭터와 잘 어울리는 근사한 이름들을 얻은 셈이다. 그렇더라도 ‘애사’는 분명 프랑스를 무대로 삼았으며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투부터 파리의 공화주의 혁명에 이르는 격동의 시대를 그려냈다. 장 발장 이야기라면 빼놓을 수 없는 미리엘 주교도 본명대로 등장한다.

이 명장면은 장 발장이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순간이자 ‘레미제라블’의 클라이맥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소설 ABC계’에는 장 발장이 등장하지 않으며 코제트도 자베르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로되 엄연한 역사소설이 탄생했다.

그러고 나서야 민태원의 ‘애사’가 제대로 번역됐다. 왜 하필 ‘레미제라블’이고 어째서 또 장 발장이란 말인가.
‘역사소설 ABC계’는 1910년 7월에 번역됐다. 고작 한 달 뒤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총독부가 들어섰다. 침략자를 코앞에 두고 버젓이 바리케이드 항전이라니, 정부군 총탄에 스러지는 민중의 벗이라니, 얼마나 무모하고도 멋진가. ‘역사소설 ABC계’는 자주국에서 토해낸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너 참 불쌍타’는 1914년 10월에 번역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참이고 일본은 산둥반도로 진격해 칭다오를 집어삼켰다. 전시 식민지 백성들은 수많은 자베르들에 의해 노예로 길들여졌다. 법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한 헌병처럼 제복을 입고 칼을 찬 교사마저 자베르와 다를 바 없는 세상이었다.
민태원의 ‘애사’가 신문 연재를 마친 날은 1919년 2월8일. 장팔찬은 미리엘 주교의 은촛대 한 쌍만 고설도에게 남기고 천사들의 나라로 향한다. 우연일까. 바로 그날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식민지의 피맺힌 역사가 만세 함성으로 뒤덮이는 데는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번역은 이방인과의 만남을 통해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마법의 거울이며 타인의 존재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놀라운 힘을 지녔다. 그러므로 번역은 늘 우리 자신의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전혀 짐작도 못 했겠지만 ‘레 미제라블’이 한국인의 핏줄에 뜨겁게 흐르지 않은 적이 없다. 몇 년 전 강렬한 인상을 남긴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한국에서 개봉된 날 마침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는 신랄한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또 한 번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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