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 겸비한 전장의 사자 덩화 "전쟁도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
법률가 꿈꾸던 부잣집 아들 덩화
공산당 비밀집회 갔다 입당 자청
청년 시절을 전쟁터 누비며 보내
상관이었던 린뱌오 눈 밖에 나
쓰촨성 부성장으로 쫓겨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5〉
![덩화는 연합군의 재상륙작전을 두려워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서해안 경계를 강화했다. [사진 김명호]](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007/18/joongangsunday/20200718002214645oicp.jpg)
덩화도 상장(上將) 계급은 받았다. 4년 남짓 역임한 선양(瀋陽) 군구 사령관을 끝으로 시야에서 사라지다시피 했다. 린뱌오(林彪·임표)와 펑더화이의 묘한 인간관계 때문이었다. 권위 있는 해석을 소개한다.
린뱌오와 펑더화이 미묘한 관계
![덩화는 횡성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1951년 2월 중순 횡성 인근. [사진 김명호]](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007/18/joongangsunday/20200718002215681hfqd.jpg)
쓰촨(四川)성 부성장으로 쫓겨나 농업 문제를 전담했다. 문혁 기간에도 호된 비판을 받았다. 1977년 군사과학원 부원장으로 복귀했지만 3년 후 세상을 떠났다.
덩화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외가도 큰 부자였다. 모친은 시집올 때 3대가 놀고 먹어도 될 전답과 패물을 들고 왔다. 5살 어린 지원군 공군사령관류쩐(劉震·유진)과 지원군 맹장 한센추(韓先楚·한선초)가 밭에서 소 끌고 땀 흘릴 때, 미국인이 설립한 명문 중학 학생이었다. 교장은 물론이고 교사들도 미국인 일색이었다. 수업도 모든 과목을 영어로 배웠다. 수학과 물리, 화학 성적이 우수했다.
![북한 내무상 박일우의 방문을 계기로 기념사진을 남긴 중국 항미원조 지휘부, 왼쪽부터 부참모장 왕정주, 정치부 비서장 리정, 리정의 남편인 정치공작 담당 간스치, 박일우, 펑더화이, 천껑, 덩화. [사진 김명호]](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007/18/joongangsunday/20200718002216971ctra.jpg)
“학교에 잠입해있던 국민당 특무에게 신분이 폭로됐다. 나 대신 잡혀간 아버지는 모친이 돈을 쏟아부은 덕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고향 움막에 숨어있던 나는 농민들이 조직한 혁명군 따라 홍색 근거지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갔다. 장정 도중 적이 버리고 간 손자병법을 노획했다. 보물처럼 끼고 다녔다. 틈만 나면 펴들었다.”
덩화는 청년 시절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린뱌오가 지휘하는 핑싱관(平型關)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뒀다. 1941년 6월 11일 팔로군 기관지 ‘진차지(晋察冀)일보’에 작가 저우얼푸(周而復·주이복)가 젊은 분구 사령관을 소개했다.
“수려하고 창백한 용모에 신기 어린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걷는 모습도 군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깨가 축 늘어진 문인 같았다. 고전과 영문에 능하고 붓글씨가 일품이라는 소문 그대로였다. 이런 사람이 포성과 불기둥이 난무하는 전장에선 사자로 변했다. 무슨 전투건 부하 지휘관들은 이 사람에게 의존하며 승리를 장담했다. 말수가 적고 적정(敵情) 판단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문인과 무사가 한 몸에 조화를 이루면 저렇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 제목이 덩화돤피엔(鄧華斷片), 덩화의 일면이었다. 실제로 덩화는 문·무(文武)와 군·정(軍政)을 겸비한 군인이었다.
일본 패망 후 국·공내전이 벌어졌다. 동북민주연군(제4야전군의 전신) 사령관 린뱌오는 덩화를 신임했다. 창바이산(長白山)에서 하이난다오(海南島) 점령까지 인연을 이어갔다.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고 중국지원군이 참전하자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덩화를 지원군 부사령관에 임명했다. 평소 덩화는 ‘전쟁도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항미원조 기간에도 농사에 관심이 많았다. 본국에서 320만 명이 배설한 인분을 들여와 북한 농촌에 공급했다.
덩화, 북한에 농업용 인분 공급
![1950년 2월 14일, 중·소 양국의 협의로 뤼순커우(旅順口)에 주둔하던 소련 해군 철수안에 서명하는 덩화. [사진 김명호]](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007/18/joongangsunday/20200718002218332kffy.jpg)
“우리는 20여 년간 무장투쟁을 했다. 기라성 같은 지휘관들이 즐비하다. 지에팡은 국민당 소장 출신이다. 입당도 늦게 했다. 린뱌오의 참모장 오래 하고 하이난다오 해방에도 큰 공을 세웠다. 소장 서열 1번이니 중장이나 마찬가지다. 린뱌오도 불만이 없고, 대만에 있는 장쉐량(張學良·장학량)도 이해하리라 믿는다. 너도 참아라.” 저우언라이가 장쉐량까지 거론하자 펑더화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에팡은 동북 출신이었다. 소작농이었던 부친은 밥보다 교육을 중요시했다. 지에팡이 명문 학교에 입학하자 없는 돈에 마을 잔치를 베풀 정도였다. 지에팡도 부친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중학을 1등으로 졸업했다. 장쉐량 집안과 인연이 시작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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