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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구라다] 너클볼, 그걸로는 그러면 안된다

조회수 2020. 12. 23. 07:5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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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웨이크필드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

15년간 이사만 37번, R.A. 디키

시작은 좋았다. 텍사스 레인저스의 첫번째 픽이었다. 그럴 법하다. 테네시 대학의 스타였다. 전국 대회를 휩쓸었다. 애틀랜타 올림픽(1996년) 대표팀에도 뽑혔다. 촉망받는 파이어볼러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입단 직전 메디컬 테스트 때였다. 의사의 표정이 심각하다. "이 팔로 어떻게 공을 던졌지? 운전대 돌리기도 불편했을텐데." 팔꿈치 인대가 아예 없다는 진단이었다. 구단은 돌변했다. 며칠 뒤. 최후 통첩이 왔다. 애초 약속한 사이닝 보너스(81만 달러ㆍ약 8억 8000만원)는 취소됐다. 대신 7만 5000달러(약 8200만원)가 제시됐다.

고민이다. 대학 때 가입한 보험 탓이다. 부상에 대비해 100만 달러(약 11억원)짜리를 들어놨다. 문제는 조건이다. '야구를 못하게 되면'이라는 단서 조항이 붙었다. 그러니까 '보험금을 받고 야구를 그만두느냐, 7만 5000달러에 사인하느냐'였다.

물론 후자를 택했다. 희망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이윽고 기나긴 고행이 시작됐다. "선수 생활 15년동안 이사만 37번을 했죠." (R.A. 디키) 혼자도 아니다. 아내와 기저귀 찬 딸 둘이 있었다(나중에 아들까지 2녀 1남).

고달픈 마이너리거다. 레벨은 왜 그리 많은지. 싱글부터 더블, 트리플 A까지. 거쳐간 홈 구장은 셀 수도 없다. 포트 샬럿, 오클라호마, 털사, 프리스코, 내시빌, 타코마, 로체스터, 버팔로…. 드넓은 대륙을 달랑 차 1대로 뺑뺑 돌았다.

"한달에 1800달러(약 196만원)로 버텨야했어요. 항공료가 없어 며칠씩 운전하는 건 기본이죠. 푸에르토리코 때가 기억나요. 남편은 숙소 대신 차에서 잠을 해결했죠." (R.A. 디키와 부인 앤 디키의 회상)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

35살에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되다

희망은 쉽지 않았다. 될듯말듯. 레인저스의 6년간, 부침의 연속이다. 번번이 부상과 부진에 발목을 잡혔다. 급기야 한계에 부딪혔다. 당시 투수 코치는 오렐 허샤이저였다. "아는 분이 있는데, 연락해 놓을테니 레슨 한번 받아봐." 연습 때 너클볼 던지는 모습을 보고 한 얘기다.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찰리? 우리 선수 중에 그쪽에 재능이 보이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한번 봐줄 수 있어요?" 통화 상대는 너클볼의 장인 찰리 허프였다. 디키는 캘리포니아까지 몇 번을 찾아가 문하생이 됐다.

하지만 간단치 않다. 어디 하루이틀에 되는 일인가. 흔히들 '너클볼은 가르치는데 10분, 배우는데 평생'이라고 한다. 수련은 결코 쉽지 않다. 완성을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텍사스는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았다. 저니맨이 됐다. 시애틀, 미네소타를 거쳐 뉴욕으로 전전했다.

2010년. 메츠에서 맞은 첫번째 스프링 캠프다. 아니나 다를까. 잉여에 불과했다. 첫번째 정리 명단에 포함됐다. 짐을 꾸려 버팔로(바이슨)로 가야했다.

이제 누가 35살짜리 마이너리거를 기억하겠나. 점점 잊혀져 가는 존재다. 그런데 반전이 생겼다. 다시 그의 이름이 꿈틀거렸다. 4월 어느날, 더램 불스(AAA급)전이었다. 1회 첫 타자에게 단타 하나가 전부였다. 이후 27타자를 연속으로 잡아냈다. 퍼펙트게임이나 다름없었다. 드디어 너클볼의 영점이 잡혔다.

정확히 12시간 뒤. 그는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콜업이다. 그리고 첫 풀타이머가 됐다. 그 해 11승 9패(ERA 2.84)를 기록했다. 이듬해(2011년)는 홈 개막전 선발, 2012년에는 사이영 수상자가 됐다. 너클볼러 최초다. 37살 때 일이다.

필 니크로(왼쪽)과 함께한 디키.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

또 한명의 주연 팀 웨이크필드

다큐멘터리 <Knuckleball!>은 2012년 작이다. 리키 스턴, 앤 선드버그이 함께 연출했다. 주인공도 두 명이다.

디키 외에 또 한 명은 팀 웨이크필드다. 그의 시작 역시 미약했다. 내야수로 입단(피츠버그), 마이너리그를 전전했다. 1루수였지만 타율은 1할대다. 2년째, 등이 떠밀렸다. "투수로 해볼래? 아니면 그만둘래?"

역시 수련이 길었다. 몇 년이 지나도 가물가물했다. 피츠버그에서 쫓겨났다. 보스턴으로 가야했다. 그리고 어렵게 꽃을 피웠다. 17년간, 200승을 쌓았다. 진정한 필 니크로의 전수자가 된 것이다.

와중에 디키를 가르치기도 했다. 둘의 만남은 <노경은, 너클볼의 은총..두번째 야구> 편에 소개한 바 있다. (https://sports.v.daum.net/v/AaUmC5fmpA)

200승을 올린 뒤 울먹이는 웨이크필드.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

다큐멘터리에는 4명의 너클볼러가 함께 하는 장면도 나온다. 디키와 웨이크필드, 그들의 은사인 니크로와 허프다.

골프 라운딩을 마치고 이런 얘기를 나눈다. 필 니크로의 회상이다. "우리 집은 무척 가난했지.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 야구팀의 투수였어. (1958년) 하루는 밀워키 스카우트가 나를 보러 집으로 왔어. 계약금으로 250달러를 불렀지. 아버지는 '우린 그만한 돈이 없어요'라고 대답하더라구. 입단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는 얘기로 들은 모양이야. 그게 아니라고 했더니 놀라시더라구. 게다가 하루 식비 2달러씩 준다니까 무척 기뻐하셨어."

니크로 역시 10년의 무명생활을 거쳤다. 28세가 돼서야 제구를 잡은 셈이다.

2012년 다큐멘터리 'KNUCKLEBALL!'이 발표됐다. 제작, 출연진들이 모인 장면.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

미안해 너클볼!

90마일, 100마일을 경쟁한다. 엄청난 RPM(분당회전수)을 위해 온갖 첨단 장비가 동원된다.

그러나 너클볼은 반대다. 60~70마일이 기껏이다. 디키의 경우가 조금 빠른 편이다. 그래봐야 80마일 남짓이다. 회전수는 제로에 가깝다. 실밥이 뻔히 보인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미 바닥을 찍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이다. 벌써 한계를 만난 투수들이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택한 방식이다. 그것도 하루 아침에 된 게 아니다. 오로지 한길만 파서, 몇 년에 걸쳐야한다. 숱한 외면과 무시, 버려짐의 결과다. 그나마도 비웃음과 신기해하는 눈길을 이겨내야한다.

디키의 사이영상 수상 소감 때 그랬다. 웨이크필드가 눈물을 보인 은퇴식 때도 마찬가지다. 늘 빠지지 않는 인사가 있다. 니크로 형제, 찰리 허프, 톰 캔디오티…. 동료 너클볼러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다.

그들만의 커뮤니티는 각별하다. 언제, 어디서라도. 묻지도, 따질 것도 없다. 수백, 수천 마일을 멀다 않는다. 가르침과 배움을 아낌없이 나눈다. 왜? 어차피 마지막, 벼랑 끝 선택이라는 걸 서로가 잘 알기 때문이다.

너클볼은 그런 공이다. 놀이 삼아, 장난으로, 또는 폼 잡으려고.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공이다. 적어도 프로 팀에서, 그게 직업인 사람들 앞에서는 더 그렇다. 그건 너클볼에게 무척이나 미안하고 면목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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