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했던차]대우자동차 바네트
1980년대, 기아자동차 봉고 시리즈가 빅히트를 기록하면서 국내의 1박스형 승합화 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박스형 승합차들은 기본적으로는 사람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업무용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자동차지만, 당시에는 지금보다는 핵가족화가 덜 진행되어 있었고, MPV 등과 같은 자동차가 전무했기 때문에 온 가족이 함께 이동할 수 있는 가족용 자동차로도 크게 각광받았다.
이렇게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대한민국의 자동차 제조사들은 80년대 후반에 들어, 너나할 것없이 저마다의 1박스형 승합차 모델을 내놓았다. 등장하자마자 시장을 석권한 현대자동차의 그레이스, 독일 메르세데스-벤츠의 기술지원을 등에 업고 크게 두각을 나타낸 쌍용자동차의 이스타나, 봉고의 후예로서 최후에는 그 이름을 잠시나마 다시 잇기도 했던 기아 프레지오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스런 점이 하나 있다. 바로 대우자동차의 이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우자동차는 당시 국내 자동차업계의 빅3 안에 드는 제조사로, 승용차 뿐만 아니라 상용차 분야에서도 상당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형상용차 부문에서 탄탄한 기반을 닦은 대우자동차는 소형상용차 시장의 성장을 목도하고, 현대자동차와 비슷한 시기에 재빠르게 중소형 상용차 모델들을 내놓았다. 하지만 대우자동차는 유독 중소형 상용차 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대우자동차는 1박스형 승합차는 물론, 2.5~3.5톤급의 준중형 트럭도 내놓았지만 시장에서의 반응이 좋지 못해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번 기사에서 다루게 될 '바네트' 역시 그러한 실패 사례 중 하나다.
기아 봉고의 성공과 소형 상용차 시장의 성장을 목도한 대우자동차는 자동차공업 통합조치의 해제된 1987년, 새로운 소형 상용차를 내놓았다. 이 차가 바로 '바네트(Vanette)'다. 대우자동차 바네트는 일본 닛산자동차의 2세대 바네트(Vanette)를 라이센스 생산한 모델로, 현대자동차가 내놓은 신형 1박스형 승합차 그레이스, 기아 봉고의 후예인 베스타 등과 경쟁하는 모델이었다.
이 차는 현대 그레이스, 기아 봉고가 그랬듯, 일본계 자동차 제조사의 모델을 라이센스 생산한 것이었다. 대우 바네트의 원형은 일본 닛산자동차에서 생산한 소형 상용차 바네트의 2세대 모델이다. 닛산의 2세대 바네트는 세련된 외관과 승용 세단에 가까운 인테리어 등이 특징이다.
외관의 경우, 그레이스, 봉고, 베스타 등과는 확실하게 차별화되는 외관 디자인을 자랑했다. 특히 2세대 승합형 바네트의 전면부는 날렵하고 매끈한 형상과 승용차 스타일의 헤드램프 등이 특징이었다. 또한, 원형에 해당하는 닛산 바네트는 트럭 모델과 승합 모델의 전면부가 서로 달랐는데, 대우 바네트는 트럭과 승합 모델 모두에 승합 모델의 전면부를 채용해 더욱 돋보였다. 여기에 승용차에 사용된 스타일의 도어미러를 적용하는 한 편, 코치 모델에는 오리지널 닛산 바네트에도 존재했던 파노라마 선루프 옵션까지 마련했다.
인테리어 디자인의 경우, 닛산의 승용 세단과 유사한 스타일의 대시보드를 채용하여 편의성을 크게 높였고, 한층 세련된 분위기를 이뤘다. 반면 스티어링 휠의 경우, 초기형에는 닛산 바네트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지만 후기형에서는 르망의 스티어링 휠을 적용했다. 변속레버와 주차 브레이크 역시, 초기형에는 바네트의 컬럼 체인지 방식의 수동변속기와 케이블식 주차브레이크를 사용했으나, 후기형부터는 변속레버는 플로어 체인지 방식으로, 주차브레이크는 레버식으로 변경했다. 좌석은 3-3-3 배열의 9인승과 12인승이 마련되어 있었다.
대우 바네트와 닛산 바네트의 차이점은 또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엔진이다. 대우자동차의 바네트는 엔진을 닛산의 LD20형 디젤 엔진을 사용하지 않고, GM과의 연결고리가 있었던 일본의 이스즈(Isuzu)에서 별도로 라이센스를 받아 생산하고 있었던 2.2리터 디젤 엔진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 엔진을 사용한 것은 대우자동차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바네트의 엔진룸 구조 및 변속기 등과 조화를 잘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우자동차가 생산한 바네트는 세련된 외관과는 달리, 소음과 진동이 매우 심했고, 성능과 연비도 떨어졌다.
상품 구성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 당시 국내 승합차 시장은 탑승인원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고, 그 때문에 '12인승'이 상식이었다. 반면 9인승은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었다. 그런데 대우자동차는 바네트를 출시할 때, 9인승 모델을 기본 사양으로 두었다. 이는 당시 시장의 요구사항을 제대로 캐치하지 못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었다.
대우자동차 바네트는 밴형 모델 뿐만 아니라, 트럭 모델도 생산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기도 문제가 있었다. 바로 당시 국내 상용차 시장에서 필수로 여겨졌던 '슈퍼캡(Super Cab)' 모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슈퍼캡은 표준형 캡에 비해 뒤쪽을 더 늘린 형태의 캡으로, 적재공간에서 약간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지만, 내부 공간이 더욱 넓어져, 운전자의 편의성을 크게 향상시켜준다. 이 때문에 개인사업자들이 주로 운용하게 되는 소형 상용차에서 슈퍼캡은 크게 선호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바네트는 당시 슈퍼캡 옵션이 없었던 닛산 바네트의 차체 구조를 변경하지 않았다. 현대자동차의 포터가 원본에 해당하는 미쓰비시 델리카 트럭 모델의 설계를 과감하게 변경해 슈퍼캡 모델을 만들어 큰 인기를 끌었던 데 비하면 시장의 요구에 잘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적지 않은 수요가 있었던 더블캡 모델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격 면에서도 경쟁차종에 비해 크게 나을 것이 없었다.
이렇게 기계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던 것 뿐만 아니라, 부실한 시장 대응으로 인해 대우 바네트는 극소수만 판매된 채, 출시된 지 5년 만인 1992년 단종을 맞았다. 대우 바네트는 까다로운 상용차 시장에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고, 상업적으로 실패한 차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