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사람 만들어선 안 된다…2000년된 변호사 제도의 이유

2024. 10. 5.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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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변호사의 ‘죄와 벌’] 변호사는 왜 범죄자를 변호하나
필자는 금년부터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방위사업청에서 세 차례 부서장을 하고 법무부 송무심의관으로 일한 경력을 살릴 수 있는 대형 로펌으로 가는 대신 규모가 작더라도 내 로펌을 세우는 길을 택했다. 일반 형사사건 변호도 많이 해보고 싶어서였다. 억울한 피고인을 위해서 무죄 판결을 받거나, 잘못을 했지만 그토록 큰 잘못을 하지 않은 피고인을 위해서 변호를 하는 것이 진짜 변호사 본연의 일인 것 같았다.

범죄 용의자 무고한 경우 적지 않아
OJ 심슨이 1995년 재판에서 증거인 피 묻은 장갑과 유사한 장갑을 끼고 있다. 그는 전 부인과 친구를 살해한 혐의에 대해 무죄를 받았다. [AP=연합뉴스]
그런데 형사사건 변호를 하면 주변에서 왜 범죄자를 열심히 도와주느냐는 못마땅한 시선을 받곤 한다. 변호사 출신인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에서도 과거 변호사 시절에 특정 범죄를 변호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럼 왜 변호사 제도가 있는 것일까. 고대 아테네 시대부터 변호사 제도가 존재해온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해서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마녀사냥을 당하는 사람처럼 범죄를 저질렀다고 지목받는 사람 중에서 사실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도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범죄를 어느 정도 저질렀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큰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경우도 많다. 다만 이런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지는 못한다. 공론의 장에서도 나쁜 사람들을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게 들린다.

“열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법과대학에 처음 들어가면 배우는 금과옥조 같은 격언이다. 이 때문에 형사재판 자체가 피고인 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설계되었다. 검경 같은 수사기관은 압수수색, 감청, 체포, 구속을 할 수 있는 등 피의자에 비해 힘이 막강한데, 이러한 힘의 차이가 재판 단계까지 이어지면 무고한 피고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사재판에서는 ‘무죄추정원칙’에 따라 재판이 다 끝나고 항소 절차까지 마치고 유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피고인은 무죄로 추정된다. ‘죄형법정주의’라는 원칙에 따라서 범행 이후에 사후적으로 만든 법이나 처벌 요건이 불명확한 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 피고인에게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질문을 받더라도 답변을 거부할 수 있는 진술거부권이 보장된다.

그 중에서도 실질적으로 가장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 원칙이 입증책임이다. 재판에서는 판사가 어떤 사실이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서 충분히 확신을 갖도록 입증하지 못한 경우에는 입증책임을 지는 쪽에게 불리한 판결이 나온다. 판사 입장에서 보면 누구 말이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을 때에는 입증책임이 없는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민사재판에서는 원고와 피고가 입증책임을 나누어서 부담하지만 형사재판에서는 오로지 검사만 입증책임을 부담한다.

그렇다면 형사재판을 하는 판사의 마음에 어느 정도의 심증이 들어야 범죄사실이 있다는 ‘확신’이 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법과 판례가 제시하는 기준은 ‘합리적 의심이 없는 정도’(beyond a reasonable doubt)이다. 여기서 ‘합리적 의심’은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심이 아니라, 피고인이 해당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도 그와 같은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을 말한다. 판사가 확신이 들지 않으면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언이 적용되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한다. 테니스 코트에 비유하자면, 검사 쪽 코트는 복식 코트만큼 넓은 반면, 피고인 쪽 코트는 단식 코트처럼 좁은 비대칭 코트인 셈이다.

변호사가 이러한 입증책임의 원칙을 활용해서 성공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우가 OJ 심슨(O. J. Simpson) 재판이다. OJ 심슨은 미식축구계의 마이클 조던 같은 존재로 1970년대에 최우수선수(MVP)로 여러번 선정되었고, 흑인 최초로 ‘코카콜라’ 광고를 찍은 슈퍼스타이다. 1994년 6월 12일 심슨의 전처인 니콜 브라운 심슨과 그녀의 친구 론 골드먼이 LA에 있는 콘도 입구 계단에서 칼에 여러차례 찔려 처참하게 죽은 채 발견되었다. 범행 현장에는 검은 가죽장갑 왼쪽 한짝, 모자, 안경집 같은 것들이 떨어져 있었고 피 묻은 큰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심슨의 집으로 출동했을 때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가죽장갑의 남은 한짝과 피해자들의 피가 묻은 심슨의 양말이 발견되었다. 범행 현장에는 305㎜ 크기의 명품 신발의 발자국이 있었는데 심슨의 집에도 이와 동일한 브랜드와 사이즈의 신발이 있었다. 심슨은 사망사건 발생 이틀 뒤에 변호사를 선임하고 전처 니콜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후 경찰에 자진 출두하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유서를 남긴 뒤 종적을 감춘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들으면 누구라도 심슨을 범인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재판 결과는 무죄였다. 변호사들의 전략은 LA 경찰이 흑인에 대한 편견을 바탕으로 범인을 심슨으로 만들기 위해 증거를 조작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합리적 의심’을 흑인들로 이루어진 배심원들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당시 LA 폭동 후 불과 2년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변호인들은 초동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마크 퍼먼)이 흑인에 대한 강한 편견을 담은 욕설을 하는 녹음 파일을 공개한 후, 그를 증인석에 세우고 장갑 한짝을 현장에 일부러 가져다 놓았느냐고 질문했다. 그러자 마크 퍼먼이 증언을 거부했다. 결정적으로 법정에서 심슨이 그 장갑을 착용해보았을 때 장갑이 너무 작아서 심슨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쯤 되니 배심원들의 마음속에는 LA 경찰이 흑인에 대한 반감 때문에 심슨을 의도적으로 범인으로 몰아가려고 한 것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싹트게 된 것이다.

이태원 살인사건 ‘무죄’에 대중 공분
‘이태원 살인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아서 패터슨이 지난 2015년 사건발생 18년 만에 한국에 송환되는 모습. 대법원이 패터슨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징역 20년이 확정됐다. [중앙포토]
과연 우리나라에서 이런 판결이 나올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판결을 한 판사는 사회적으로 매장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이런 판결이 꼭 바람직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위와 같은 원칙을 적용한 사법적 판단은 우리나라에서는 대중들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를 낳곤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태원 살인사건’의 두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은 무죄판결을 받고, 다른 한 명은 무혐의 결정을 받게 된 일이다.

1997년 홍익대를 다니던 조모군이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의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 있던 주한미군의 아들 아서 패터슨과 재미교포 에드워드 리 중 한명으로부터 칼로 9회 이상 찔려 사망했다. 당초 검찰은 아서 패터슨에게는 무혐의 결정을 하고, 에드워드 리를 살인죄로 기소했다. 1, 2심 법원도 에드워드 리에게 살인죄를 인정하고 각각 무기징역형과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대법원이 1998년 4월 에드워드 리가 범인이라는 점이 합리적 의심 없이 입증되지 않았다며 무죄 취지의 판결을 한다. 결국 아서 패터슨은 검찰에서 무혐의 결정을 받고, 에드워드 리는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셈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결론을 용납하지 못한다. 2009년 ‘이태원 살인사건’ 영화를 계기로 사회적 공분이 치솟았고 결국 미국에 있는 아서 패터슨를 송환해서 재수사와 처벌(징역 20년)을 마쳤다.

“열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격언은 수긍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만 명의 도둑을 놓쳐야 한다면? 단순한 도둑이 아니라 만 명의 어린이 성폭행범을 놓쳐야 한다면? 여기에 동의할 한국 사람은 만 명에 한 명 있을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만 명의 범인을 모조리 색출해서 잡으려고 들면 분명히 억울한 사람이 생긴다. 그러니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밖에 없다. 강력한 처벌에 대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릴수록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기 위한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정재민 변호사·작가. 23년 공무원 생활 중 절반은 판사로, 절반은 법무부, 방사청, 외교부 등에서 일했다. 『보헤미안랩소디(세계문학상수상작)』 등의 소설과 『범죄사회』, 『혼밥판사』등 에세이집을 냈다. 현재 법무법인 예문정앤파트너스의 대표변호사로 형사사건을 주로 변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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