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인사이트] 사라진 ‘필리핀 이모들’… 불법 체류자 발생 조건 갖췄다

손덕호 기자 2024. 10. 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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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6일 오전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이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을 통해 입국한 뒤 버스로 이동하고 있다. /조선DB

서울시와 고용노동부가 시범 사업으로 도입한 ‘필리핀 가사 관리사’ 100명 중 2명이 지정된 숙소를 벗어난 뒤 돌아오지 않는 상태가 계속되면서 ‘불법 체류자’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들이 불법 체류자가 될 수 있다는 우려는 제도 도입 전부터 제기된 바 있다. 강정향 숙명여대 객원교수는 작년 5월 고용노동부가 개최한 토론회에서 “이 제도를 선뜻 도입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불법 체류 가능성”이라고 했다. 불법 체류자가 되더라도 얼마든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임금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취업 기간 7개월에 그쳐… 목표한 만큼 돈 벌려고 불법 체류 가능성”

이민정책연구원이 지난해 불법 체류 상태였던 자진 출국 신고자와 강제 퇴거 대상자 10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60.7%는 불법 체류를 선택한 이유로 ‘한국에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특히 필리핀 가사 관리사와 같은 고용허가제 비전문취업(E-9) 비자를 받고 입국한 불법 체류자 중에서는 71.9%가 이 이유를 들었다.

일반적인 고용허가제를 통해 입국한 외국인 근로자는 4년 10개월간 국내에서 돈을 벌 수 있다.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계속 일하면 불법 체류자가 된다. 외국인 근로자를 채용한 경험이 있는 한 중소업체 관계자는 “외국인 근로자는 한국에 있는 기간에 얼마를 벌어가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입국하는 게 보통”이라며 “체류 기간에 목표 금액을 채우지 못하면 불법 체류를 해서라도 돈을 더 벌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필리핀 가사 관리사들이 받은 취업 비자 기간은 7개월이다. 정부는 내년에 외국인 가사 관리사 사업을 확대한다는 계획이지만, 현재 일하고 있는 필리핀 가사 관리사들이 계속 한국에 남아 일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7개월 동안 일해서는 목표 금액을 채우기 힘들다는 판단에 따라 입국 직후부터 불법 체류를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셈이다.

당국도 필리핀 가사 관리사 취업 비자 기간이 너무 짧다는 점은 인식하고 있다. 서울시와 고용부는 지난 달 24일 서비스 제공 기관과 가사관리사 2명이 참여한 간담회에서 취업 활동 기간을 최장 3년으로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그래픽=정서희

◇가사 관리사 임금 상대적으로 적어… 근무지 이탈하면 더 벌어

필리핀 가사 관리사는 일할 수 있는 기간도 짧은데 임금도 다른 업종보다 적다. 현재 필리핀 가사 관리사를 하루 8시간씩 한 달간 이용하는 가정이 지불하는 비용은 급여 208만원과 4대 보험료 등을 합쳐 총 238만원이다. 월 100만원도 안 되는 금액으로 가사 관리사를 이용할 수 있는 홍콩·싱가포르와 비교하면 비싸 보이지만, 필리핀 가사 관리사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필리핀 가사 관리사가 주 30~40시간 일하면 월 154만~206만원을 받는데 여기에서 세금과 방값을 내야 한다. 실제 손에 쥐는 돈은 100만~150만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필리핀 가사 관리사처럼 고용허가제 비전문취업(E-9) 비자를 받고 입국한 외국인 근로자는 마음대로 근무처를 변경할 수 없다. 사업장이 휴·폐업하거나 근로자가 고용주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받아야 근무처를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불법 체류자가 되면 이 같은 제약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근무처를 택할 수 있다.

일자리 찾기도 쉽다. 이민정책연구원 조사에 응답한 불법 체류자의 49.4%는 “일이 없어서 쉬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불법 체류자가 되면서 실직한 뒤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데 걸린 기간은 ‘1주일 이내’가 30.0%, ‘1~2주’가 19.4%였다. 한 중소업체 관계자는 “한국에 상당 기간 불법 체류한 외국 인력은 숙련 근로자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업체 입장에서도 채용하기가 좋다”고 말했다.

또 불법 체류자가 되면 돈을 더 벌 수 있다. 이민정책연구원 조사에서 불법 체류자들이 받은 평균 월급은 238만원으로 나타났다. 취업 비자를 갖고 입국한 외국 인력은 합법 체류 상태일 때는 월 평균 232만원을 받았는데, 불법 체류 상태로 바뀌자 15.1% 많은 267만원을 받았다. 이민정책연구원은 “사업체들은 당장 외국인 노동력이 필요한데 합법 취업이 가능한 외국인을 구하기 어려워 불법 체류 외국인을 고용하고 있다”고 했다.

◇일부 전문가 “가정이 저임금 외국인 직접 고용할 수 있게” VS 고용부 “불법 체류 우려”

일부 전문가들은 저임금 외국인 돌봄 인력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은행은 올해 3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일반 가정이 외국 인력을 최저임금 적용 대상이 아닌 ‘가사 사용인’으로 직접 고용하자”고 제안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달 비슷한 주장을 하면서 “법무부 논리대로 불법 체류와 같은 부작용을 걱정하면서 외국인 가사도우미 비용을 낮추는 방안을 시도도 하지 말자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문수 고용부 장관은 지난 달 30일 기자간담회에서 “제가 검토하기로 (최저임금 차등 적용이나 외국인 가사 사용인 도입은) 거의 어렵다”고 했다. 한국은 싱가포르와 달리 국가 면적이 넓고 근무지를 이탈해도 소재를 파악하기 어려워 외국인 가사 관리사에게 낮은 수준의 임금을 주면 불법 체류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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