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인류문명의 여정] 문명의 뿌리 농경, 그리고 신의 선물 옥수수

최정필 세종대학교 명예교수 2026. 5. 17.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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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필 세종대학교 명예교수

인류가 도구를 만들어 사냥하고 식물을 채집해 온 역사는 매우 길다. 그러나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약 1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가던 무렵의 일이다. 이때 인간은 야생 식물을 길들이고 동물을 사육하며 정착 생활로 나아갔다.가장 이른 농업은 중동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시작되어 보리와 밀, 양과 염소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는 벼와 조, 수수, 기장이 재배되었고, 신대륙의 멕시코 고원과 안데스 산지에서는 옥수수와 감자가 길들여졌다. 한반도에는 약 5천 년 전 조와 기장이, 약 3,500년 전에는 벼농사가 중국으로 부터 전해졌다.

농업은 정착 생활을 가능케 하면서 마을과 공동체를 탄생시켰고, 사회적 역할과 질서도 나뉘기 시작했다. 모든 지역이 농경을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불의 사용과 함께 농업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신대륙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옥수수와 감자 그리고 고구마, 호박, 오이, 고추 등 오늘날 우리의 식탁을 지탱하는 작물들이 등장했다. 특히 옥수수는 농경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세계인에게 너무도 익숙한 이 곡물은 약 9천 년 전 멕시코에서 처음 재배되어 주변 지역으로 퍼져 나가며 콩과 함께 원주민들의 주식과 문명의 토대가 되었다. 마야와 아즈텍 신화에서는 인간이 옥수수 반죽으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초기 옥수수의 이삭은 작고 알갱이도 적었으며 껍질도 단단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이 더 좋은 씨앗을 골라 심으면서, 옥수수는 점점 크고 부드러운 곡물로 바뀌었다. 이는 야생 식물이 인간의 손을 거치며 서서히 변화한 결과다. 옥수수 변화의 흔적은 멕시코 중부 고원의 유적에서 잘 드러난다. 초기에 이곳 사람들은 작은 밭을 일구고 옥수수를 키우기 시작했다. 발굴된 유물들은 옥수수가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한 작물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오랜 시간 함께 만들어낸 결과임을 보여준다.

나 역시 반세기 전, 옥수수의 기원을 밝히는 조사단의 일원으로 중남미 유적 발굴에 참여한 적이 있다. 두 해에 걸친 현장 조사를 통해 확인한 초기 옥수수 재배의 흔적은, 이 곡물이 인류 문명의 형성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실감하게 했다.

옥수수의 가치는 뛰어난 생명력에서도 드러난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며, 같은 면적에서 얻는 수확량도 많다. 특히 옥수수와 콩을 함께 심는 방식은 자연의 지혜를 잘 보여준다. 콩은 토양에 질소를 공급하고, 옥수수는 콩이 자랄 수 있는 지지대가 된다. 두 작물은 영양 면에서도 서로를 보완해 건강한 식생활을 가능하게 했다.

옥수수는 특별한 도구 없이도 수확하고 조리할 수 있는 곡물이다. 농경 기술이 미숙했던 초기 인류에게 이는 생존을 가능하게 한 실용적인 작물이었을 것이다. 옥수수가 '신의 선물 '로 불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알의 옥수수에는 인간과 자연이 수천 년에 걸쳐 함께 쌓아온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구대륙과 신대륙의 농경 문화는 전개 과정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구대륙에서는 여러 곡물이 재배되고 가축 사육이 함께 이루어진 반면, 신대륙에서는 그 종류가 매우 제한되었고 가축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농경이 인류 사회에 남긴 영향만큼은 지역을 넘어 공통적이었다. 농업은 정착 생활을 가능하게 했으며, 인구 증가와 함께 재산 개념과 사회적 위계를 형성해 인간 사회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오늘날 K-푸드는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떠오른다. 만약 신대륙 원주민들이 고추를 길들이지 않았다면, 김치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한 알의 씨앗이 대륙을 건너 문명을 잇고 식문화의 흐름을 바꾸는 모습은 농경이 인류에게 남긴 가장 인상적인 유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