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명이 이처럼 널리 회자된 차종은 드물다. 1983년 섀시 코드 AE86의 스포츠 쿠페로 시작해 2012년 토요타 86으로 부활했고, 2021년 GR 86으로 거듭났다. 어느덧 86은 올해로 탄생 42주년을 맞았다. ‘드라이빙의 즐거움’을 집요하게 파고든 집념의 여정이었다. 비용절감을 위한 묘안으로 싹을 틔워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과정을 소개한다.
글 김기범 편집장(ceo@roadtest.kr)
사진 서동현 기자(dhseo1208@gmail.com), 토요타자동차
참고문헌 <86 Makes Driver>
5세대 코롤라 스포츠 쿠페가 원조


‘기억에 남는 힘’. GR(Gazoo Racing, 가주 레이싱) 86의 핵심은 이렇게 간추릴 수 있다. 조용한 서재에 앉아 기사 쓰고 있는 지금도, GR 86과 호흡 맞췄던 사흘간 여정의 잔상이 뇌리에 선명하다. 본격적인 리뷰에 앞서 GR 86의 뿌리와 뒤안길을 먼저 소개한다. 기억할 의미가 남다른 차종인 까닭이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은 이 차의 이름인 ‘86’이다.


‘AE86’은 토요타의 수많은 섀시 코드(개발명) 가운데 하나였다. 직렬 4기통 1.5~1.6L A시리즈 엔진 얹은 코롤라 5세대 후륜구동 쿠페로, 1983~1987년 판매했다. 마침 코롤라 1,000만 대 생산의 대기록 세운 직후. 하지만 토요타는 안주보다 혁신을 택했다. 5세대를 앞바퀴 굴림으로 바꿔 공간과 편의성을 개선했다. 나아가 컴퓨터로 파워트레인을 제어했다.
또한, 토요타 최초로 개발 과정에 ‘컴퓨터 지원 설계(CAD)’를 활용했다. 덕분에 점토(클레이) 모델에서 단숨에 3차원 렌더링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전에는 ‘왕 고참’ 직원 셋이 한 달은 꼬박 매달려야할 작업이었다. 젊은 고객의 취향 저격한 디자인도 신선했다. 프로토타입 600대 중 100대를 충돌 테스트로 떠나보낼 만큼 안전 설계에 쏟은 정성도 남달랐다.


그런데 5세대 신형 코롤라에는 두 가지 다른 성향이 공존했다. 편의성 중심의 코롤라는 앞바퀴, 성능을 강조한 코롤라는 뒷바퀴 굴림이었다. 기존 공장을 한 번에 앞바퀴 굴림 라인으로 전환하자니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 짜낸 묘안이었다. 차체는 4도어 세단, 3도어 및 5도어 해치백, 2도어 및 3도어 쿠페 등 다섯 가지. 이 가운데 쿠페만 후륜 구동이었다.
1966년 막을 올린 코롤라 역사상 마지막 뒷바퀴 굴림이기도 했다. 코롤라 쿠페는 이미 1970년대부터 두 가지 버전으로 나왔다. AE86의 경우 접이식 헤드램프의 2도어 쿠페는 ‘코롤라 레빈(Corolla Levin)’, 고정식 헤드램프의 3도어 해치백은 ‘스프린터 트루에노(Sprinter Trueno)’였다. ‘레빈’은 중세 영어로 번개, ‘트루에노’는 스페인어로 천둥을 뜻한다.
드리프트 인기 끌며 아이콘 등극


비용 절감을 위해 태어난 AE86은 드라이빙 및 모터스포츠 마니아 사이에서 컬트적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토요타조차도 예상 못한 기현상이었다. 여러 조건이 기막힌 타이밍으로 맞물려 낸 시너지였다. 발화점은 1980년대 일본에서 관심 끌기 시작한 ‘드리프트(Drift)’. 뒷바퀴를 의도적으로 미끄러뜨려 빠르고 매끄러운 방향 전환을 유도하는 기술이다.
AE86은 드리프트의 이상적 조건을 갖췄다. 최고출력은 130마력으로 평범하지만, 1톤 미만의 공차중량과 고르게 분산한 무게, 뒷바퀴 굴림과 5단 수동변속기, 아담한 덩치의 시너지 효과로 운전재미가 남달랐다. 여기에 1995~2013년 시게노 유이치(しげの秀一)가 일본 <주간 영 매거진>에 48편으로 연재한 만화 <이니셜 D>의 인기가 기폭제 역할을 했다.


만화 속에서 두부가게 아들 타쿠미는 중학생 때부터 레이서 출신 아버지의 스프린터 트루에노를 타고 고갯마루 굽잇길 넘어 배달 다니며 운전 기술을 익힌다. 이후 쟁쟁한 차와 소위 ‘도로 배틀’을 이어가며 레이서로 성장한다는 내용이다. 자동차 메커니즘에 대한 세부 묘사, 속도감 넘치는 레이스 장면 등 자동차 마니아들을 열광하게 할 요소로 가득하다.
실제로 독자들은 <이니셜 D>를 만화적 상상력에 깃댄 픽션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에서 ‘드리프트 킹’으로 유명한, 츠지야 케이이치(土屋圭市)가 만화 감수를 맡은 까닭이다. 나아가 그는 타쿠미가 <이니셜 D>에서 선보인 운전 기술 대부분을 실제로 시연해 보였다. AE86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중고차 가격도 치솟기 시작했다. 전설의 시작이었다.

한편, 토요타는 2000년대 팬덤 거느린 스포츠카를 줄줄이 단종시켰다. 2002년 4세대 수프라, 2005년 알테자, 2007년 MR-S의 생산을 마쳤다. 다행히 영원한 이별은 아니었다. 2009년 10월, 토요타는 도쿄 모터쇼에서 FT-86 콘셉트를 선보였다. 86의 부활을 암시하는 단서였다. 창업 3세 도요다 아키오(豊田章男)가 사장으로 취임한지 넉 달 만이었다.
아키오 사장 취임 후 극적 부활


2011년 11월, 도쿄 모터쇼에서 86 시제작차가 베일을 벗었다. 재미에 초점 맞춘 토요타 경량 스포츠카의 부활이었다. 앞 엔진과 뒷바퀴 굴림(FR), 긴 보닛과 짧은 꽁무니 등 AE86을 오마주한 요소로 가득했다. 사내 코드명도 ‘086A’. 스바루와 공동 개발했다. 토요타는 86, 스바루는 BRZ로 판다. 두 가지 버전 모두 일본 군마현의 스바루 공장에서 만든다.
86의 불씨를 다시 살린 주역은 도요다 아키오다. “당시 아키오 부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긴히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요. 뭘 잘못했나싶어 바짝 쫄았는데, 스포츠카 제작을 고려해보라는 거예요. 제한이나 조건 없이요. 전 곧장 토요타 사내에서 핵심 멤버를 모으기 시작했죠.” 영국 <탑기어>가 전한, 86 수석 엔지니어 타다 테츠야(多田哲哉)의 회상이다.


그는 사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레벨인 S2 운전 자격을 보유했다. 토요타 수석 엔지니어 가운데 유일했다. 2007년부터는 토요타 스포츠 모델 기획을 총괄했다. 뼛속까지 자동차 마니아인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온 셈이다. 그런데 접근 방식이 사뭇 달랐다. 이를테면 랩타임이나 가속 시간 같은 수치를 목표로 설정하지 않았다. 대신 ‘재미’를 파고 들었다.
데뷔 한 달 전, 토요타는 86을 독일 뉘르부르크링 4시간 내구 레이스에 출전시켜 클래스 3위를 기록했다. 2010년 LFA 이후 토요타는 개발 중인 스포츠카를 모터스포츠에 투입해 성능을 정교화하기 시작했다. 86도 예외일 수 없었다. 레이스 마치고 돌아온 드라이버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개발팀이 기대한 내구성 피드백보단 입을 모아 운전 재미를 칭찬했다.

실은 개발팀이 예상한 반응이기도 했다. 내부 테스트 때부터 재미를 최우선 가치로 설정한 까닭이다. 예컨대 테스트 드라이버들이 시험 주행 마치고 돌아오면 “재미있었는지”부터 물었다. 그런데 ‘재미’는 우연히 손에 쥘 수 있는 성과가 아니었다. 치열한 고민과 치밀한 의도가 뒷받침할 때 다다를 수 있는 목표였다. 86의 기획 및 개발 과정이 생생한 증거다.
리메이크가 아닌, 치밀한 재해석


“AE86을 리메이크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86 개발팀의 말이다. 그럼에도 이전의 AE86을 돌아볼 필요는 있었다. 다른 스포츠카와 현격히 다른 역사와 위상 때문. 제조사와 오너 사이의 훌륭한 관계, 자동차 마니아와 튜닝숍의 열정적 공조로 이룬 발전 등이 대표적이다. 그 결과 새로운 86의 개발 모토는 더 명확해졌다. 바로 ‘86의 정신을 결코 잊지 말자’였다.
때론 자신의 과거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86의 엔진 개발이 그런 경우였다. 수석 엔지니어 타다 테츠야는 직렬 4기통을 포함한 다양한 엔진을 검토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술기록 보관소에서 토요타 스포츠 800을 발견했다. 수평대향 2기통 790㏄ 엔진을 보닛에 품고 뒷바퀴 굴리는 2인승 스포츠카다. 1965년 출시 이후 여러 내구 레이스에서 우승을 거뒀다.


우승 비결은 최소한의 피트 스톱. 가볍고 아담해 효율이 빼어난 덕분이었다. 그는 21세기 스포츠카도 오롯이 계승해야할 특징으로 확신했다. 즉시 엔지니어들을 이끌고 스포츠 800을 설계했던 ‘칸토세이키(関東精機)주식회사’를 방문해 청사진을 입수한 뒤 연구했다. 그 결과 86은 박서 엔진과 FR로 부활했다. 토요타로서는 40년 만에 다시 도전한 조합이었다.
86의 엔진은 수평대향 4기통 2.0L(1,998㏄) 가솔린 자연흡기(4U-GSE). 스바루의 엔진에 토요타의 ‘D-4S’ 직간접 분사 시스템을 접목해 완성했다. 최고출력은 200마력, 최대토크는 20.9㎏·m, 엔진 최고 회전수는 7,400rpm이었다. 보어(실린더 지름)와 스트로크(피스톤 상하 이동 거리)가 같은 ‘스퀘어(square)’ 엔진인데, 하필 차명과 같은 86㎜였다.


변속기는 6단 자동과 수동. 86은 전체 부품 중 91%가 전용이었다. 공차중량은 1,240㎏에 묶었고, 무게 중심은 459㎜까지 끌어 내렸다. 앞뒤 무게 배분은 다양한 시도 끝에 53:47로 맞췄다. 또한, 프리우스처럼 구름저항 낮은 타이어를 끼웠다. 동급 ‘연비 왕’이 목적은 아니었다. ‘역동적 잠재력을 고성능 타이어에 의존해선 안 된다’는 고집 때문이었다.
2세대로 거듭나며 GR 브랜드로


86은 데뷔 이후 전 세계에서 20만 대 이상 팔렸다. 2021년 2세대로 진화하며 토요타의 고성능 브랜드 GR로 거듭났다. 수프라와 야리스에 이은 세 번째 GR 차종이었다. 스바루는 2020년 신형 BRZ를 먼저 선보였다. 2세대도 둘의 외모는 판박이. 하지만 서로의 개성 살린 주행감각으로 간격을 벌렸다. 86은 드리프트, BRZ는 그립 주행에 방점을 찍었다.
GR 86의 길이와 너비, 높이는 4,265×1,775×1,310㎜. 1세대 86 후기형보다 길이는 25㎜ 늘리고, 높이는 10㎜ 낮췄다. 휠베이스는 2,575㎜로, 이전보다 5㎜ 더 넉넉하다. 트레드도 앞은 같지만, 뒤는 10㎜ 더 넓혔다. 공차중량은 1,275~1,285㎏. 1세대보다 25~35㎏ 늘었지만 여전히 동급에서는 가벼운 편이다. 타이어 트레드 너비는 여전히 215㎜다.


안팎 디자인은 전혀 새롭다. FR의 특성 강조한 1세대의 비율을 유지했다. 하지만 매끈하게 다듬고 둥글렸다. 1세대 때 뒷날개는 옵션이었다. 반면 이제 오리 꽁무니처럼 쫑긋 솟은 ‘덕 테일’로 차체에 녹여 넣었다. 그릴과 에어댐도 키웠다. 엔진과 브레이크 냉각 성능을 높이기 위해서다. 전반적으로 가볍고 공기 역학적인 스포츠카의 미학에 중점 둔 디자인이다.
엔진은 수평대항 4기통 가솔린 자연흡기를 유지했다. 대신 배기량을 기존 2.0에서 2.4L로 키웠다. 스트로크는 같지만, 보어를 94㎜로 늘렸다. 과거 MR2 터보와 셀리카 GT-4, 4세대 수프라, 1세대 86까지 이어져온 86×86㎜ 스퀘어 엔진의 상징성을 포기한 이유는 명료하다. 출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실제로 GR 86의 최고출력은 235마력까지 올라갔다.


직관적 핸들링 강화를 위한 변화도 스몄다. 예컨대 이전보다 비틀림 강성을 약 50% 높였다. 차체 높이와 운전석 힙 포인트는 더욱 끌어 내렸다. 지붕을 알루미늄 패널로 씌워 무게 중심을 한층 낮췄다. 어느덧 86은 탄생 42주년을 맞았다. ‘드라이빙의 즐거움’을 위한 집념의 여정을 곱씹기 위해, 오랜만에 다시 GR 86의 운전대를 쥐었다(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