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말을 맞아 놀러 온 초등학생 손주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학교에서 나누어 준 알림장이라며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손주의 얼굴에는 맑은 미소가 가득해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종이를 받아 든 나는 맨 아랫줄에 적힌 한 구절을 읽자마자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알림장 하단에는 보호자 동의서와 함께 준비물 비용을 입금할 수 없어 죄송하다는 딸의 간곡한 메모가 적혀 있었다.
맞벌이로 바쁘다며 항상 여유 있는 척했던 딸이 사실은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정황이었다.
손주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할머니가 알림장에 대신 서명을 해주면 내일 준비물을 받을 수 있다며 천진하게 굴었다.

어린 손주가 상처받을까 봐 서둘러 서명을 마친 뒤 마음을 가다듬고 퇴근길의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딸은 내 추궁에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더니 결국 그동안 사기를 당해 힘겹게 견디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어 홀로 모든 고통을 삼켜왔을 딸의 지난 세월이 떠올라 가슴이 갈가리 찢어졌다.

나는 통장을 정리해 딸의 계좌로 그동안 모아둔 비상금을 말없이 보내고 손주의 손을 잡고 마트로 향했다.
손주가 학교 준비물 상자에서 고른 연필과 공책을 바구니에 담으며 나는 가슴속 깊은 눈물을 꾹 눌러 담았다.
저녁 늦게 집에 도착해 사정을 알게 된 사위와 딸은 내 앞에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알림장 한 장이 이어준 우리 가족의 솔직한 고백은 서로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우는 딸을 따뜻하게 품에 안아주며 앞으로는 어떤 어려움도 혼자 감당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당부했다.
거실 한쪽에 놓인 손주의 새 책가방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번 가족을 지켜내겠다는 다짐을 가슴 глубо 깊이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