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규 초이랩 대표 “동심 채우랴, 가수 키우랴···내 머릿속은 늘 근질근질[박주연의 색 있는 인터뷰]

오랜 세월, 동심(童心)을 좇으며 살아왔기 때문일까. 칠순의 얼굴에 생기가 넘쳤다. “다양한 아이디어로 늘 머릿속이 근질근질하다”는 그의 말처럼 왕성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최신규 초이크리에이티브랩(초이랩) 대표(70) 이야기다.
그의 집무실 책상 뒤 벽면에는 수십 년간 각종 완구를 개발하며 받은 수십 장의 특허장이 진열돼 있었다. 실제로 받은 것은 수백 장에 달한다고 했다. 다른 벽면에는 ‘헬로카봇’을 비롯해 그가 기획해 큰 성공을 거둔 각종 로봇 완구들이 놓여 있었다. 순수 국내 콘텐츠로 2013년 처음 선보인 ‘헬로카봇’은 현재 애니메이션 ‘시즌 17’이 SBS TV를 통해 매주 일요일에 방송되고 있다.
‘장난감 대통령’으로 불려온 그는 2015년 연예기획사 대표로 옷을 갈아입었다. 완구 사업을 뒤로 하고 초이랩 설립과 함께 가수 매니지먼트와 음악 작업에 주력 중이다. 트로트 가수 김연자·홍지윤·신유·황민호씨 등과 걸그룹 하이키 등이 소속 아티스트다. 국내 단 2대뿐인 최고 성능의 콘솔 등을 갖춘 초이랩 녹음 스튜디오는 모든 가수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인터뷰는 지난달 27일 서울 양천구 목동 초이랩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 김연자씨의 ‘쑥덕쿵’ 등을 직접 작사·작곡하고, 3D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된 뮤직비디오 감독도 맡았어요. 완구 사업가가 왜 음악 작업과 가수 매니지먼트에 몰두하게 된 건가요.
“마이클 잭슨의 삶을 생각하면 눈물이 자꾸 나요. 자식을 돈벌이 도구로만 취급한 아버지의 폭압 속에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놀아보지도 못했잖아요. 저는 마이클이 훗날 왜 네버랜드를 만들고 아이들을 그토록 예뻐했는지 그 마음을 온전히 알아요. 저 역시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으니까요. 그걸 결핍에 따른 보상심리라고 하더군요. 또래 아이들과 달리 소년공 삶을 살았던 제가 어린이를 위한 완구와 애니메이션, 동요를 만들고 지금은 가수를 양성하면서 음악 작업에 몰입하는 것도 같은 이치예요.”
- 청년 시절 꿈이 가수였다죠.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노래 좀 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웃음). 스무 살이던 1976년, 서울 서대문에 있는 정진성 작곡가 사무실을 찾아갔어요. 나훈아의 ‘너와 나의 고향’을 비롯해 히트곡을 많이 만든 분이잖아요. 당시는 제가 셋째 형이랑 신길동에서 수도꼭지를 만들어 팔던 때였어요. 바쁘고 고된 와중에도 젊은 혈기로 시간을 쪼개 썼어요. 정진성 작곡가는 저를 테스트해보더니, 일주일에 두세 번씩 나와서 연습하라고 했어요. 레슨비 내면서 1년을 다녔죠.”
- 그런데 왜 그 꿈을 접었습니까.
“정 작곡가는 나중에 김만수씨가 부른 ‘진아의 꿈’을 데뷔곡으로 부르라며 제게 먼저 줬어요. 그 곡만 6개월을 연습했지만 포기했어요. 곡을 받아 레코드판을 만드는 데 70만 원을 내야 했거든요. 그래서 그 시절에는 가수 되려고 논·밭 파는 사람도 많았어요. 가수를 포기한 이유는 또 있었어요. 1960년대 말~1970년대에는 이장희·송창식·윤형주·양희은씨처럼 대학생 가수들이 인기를 끌었어요. 초등학교도 못 나온 제가 가수로 성공한다는 건 무리였어요.”

최신규 대표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행상하며 5남매를 키웠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학교에 다녔다. 열두 살 때 서울 영등포에 있는 금은방에서 세공기술을 3년간 배웠다. 이후 탄창 만드는 방위산업체에서 철판을 붙이는 스포트(spot) 용접 기술을, 주물공장에서 금형·주조 기술을 터득했다.
- 학교는 어쩌다 일찍 그만뒀나요.
“3학년 1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학교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어머니가 한글을 몰라 전학 절차를 놓치셨어요. 어머니는 행상을 나가시니 혼자 집에 있는 날이 많았죠. 정 심심하면 자연을 벗 삼아 시간을 보냈어요. 열두 살이 되자 어머니는 영등포에 있는 백성당 금은방에 저를 데려가셨어요. 그곳 사장께 부탁해 제가 그곳에서 세공 기술을 배우도록 해놓으셨던 거예요. 그때는 세공 기술 인기가 높았거든요.”
- 어린 나이인데, 할 만 했나요.
“한 달에 800원 받으면서 기술을 익혔어요. 불통을 들고 세공하느라 낮에는 땀으로 샤워하고, 밤에는 불만 끄면 기어 나오는 빈대에 시달렸죠. 당시 다들 저를 ‘꼬마’라 불렀는데, 성실하고 빠릿빠릿하다고 귀여워해 주셨어요. 그런데 일하다가도 밖에서 또래 애들이 노는 소리가 들리면 진짜 엄청 힘들었어요. 몰래 창문을 조금 열고 내려다보면, 행색까지 왜 그리 깨끗한지… 부러웠어요.”
- 밥은 잘 먹고 다녔습니까.
“제가 밥을 안 먹어서 덜 큰 거예요(웃음). 금속을 녹일 때 쓰는 염산과 유산의 독한 냄새 때문이에요. 하도 맡으니까 머리가 띵 하고 밥맛이 없었어요. 납땜도 수시로 했는데 그때는 중독 개념도 없이 작업했어요. 납땜하다 보면 손바닥이 새카매지는데 그 손으로 얼굴을 막 긁었거든요.”
- 참 고단했겠어요.
“주물공장에 다닐 때는 매일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불부터 지폈어요. 도가니에 열을 올려놔야 쇠를 녹이니까요. 8시 30분에 직원들이 출근하면 도가니에 쇳물을 붓고 녹인 다음 틀에 부어 굳혀서 물건을 만들었죠. 그런 과정을 오전, 오후 하루에 두 번씩 하므로 불을 꺼뜨리면 안 됐어요. 퇴근도 없었어요. 노상 거기서 먹고 자면서 일했죠.”

1975년 열아홉 살 때 셋째 형과 소규모 주물공장을 차려 수도꼭지 등을 제작했고, 1981년 독립해 바가지를 비롯한 플라스틱 완제품을 만들었다. 어린이용 상품과 첫 인연이 된 것은 1983년 한 업자의 부탁으로 완구 자동판매기를 만들면서다. 2년 후 독성 없고 벽에 자국도 안 남는 ‘거미 문어 끈끈이’ 개발에 성공하면서 ‘대박’이 났다. 단칸방 부엌에서 숱한 화상을 입은 실험 끝에 얻어낸 수확이었다. 뒤집으면 톡 하고 튀는 장난감 팝콘도 잇따라 히트했다.
- 돈을 좀 벌었습니까.
“제가 제작한, 100원을 넣으면 물건이 든 캡슐이 나오는 자동판매기가 1980년대 중반에 전국 문방구에 깔렸어요. 하루 수금액이 평균 1100만 원가량 됐어요. 수금한 동전을 강원도 출장소에서 모아 20~30개의 마대 자루에 꽉꽉 채워 트럭에 싣는데, 동전 무게 때문에 트럭 앞바퀴가 살짝 들린 채로 달렸을 정도예요(웃음). 은행에선 받아주지 않았어요. 그 많은 동전을 일일이 세기 어렵고 운반하기도 힘드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 톨게이트와 주유소들을 돌며 지폐로 바꿔야 했어요. 톨게이트와 택시기사들은 거스름 동전이 필요하니까요.”
- 1990년대부터 다양한 로봇 완구로 승승장구했죠. 로봇 장난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1989년 너덧 살이던 아들을 데리고 백화점에 갔는데 아들이 진열 중인 로봇 완구를 꼭 껴안은 채 사달라면서 데굴데굴 굴렀어요. 그걸 보며, ‘저거다!’ 싶었죠. 아이들이 좋아하니 사업을 하면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확신한 거죠. 당시 국내 완구회사는 로봇 장난감을 제작할 기술이 없었어요. 대부분 수입하거나 모조품을 만들어 팔았죠. 저는 직접 생산하고 싶었어요.”
- 그래서 일본의 대형 완구업체인 다카라를 찾아간 거군요.
“맞아요. 협상을 벌여 로봇완구 ‘다간’의 금형을 제공받은 후 업그레이드해 ‘그레이트 다간’을 내놨어요. 그에 앞서 일본에서 제작한 동명 애니메이션도 국내 방송사를 통해 방영했고요. 큰 성공을 거뒀어요. 다카라의 캐릭터를 지식재산권(IP) 사용료를 내고 생산하는 방식이었어요.”
- 한국에서 온 무명의 완구회사(당시 회사명은 ‘서울화학’. 1996년 ‘손오공’으로 개명)가 어떻게 대형 일본 완구회사를 뚫었습니까.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신용이 중요해요. 저는 늘 약속 시각 5분 전에 미팅 장소에 도착했어요. 너무 빨리 가면 그 전에 다른 일을 처리하려던 상대방의 계획을 망가뜨리니 짜증을 유발할 수 있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불성실한 이미지를 줄 테니까요. 그 자리에서 제가 바로 견적을 내는 모습도 신뢰감을 줬다고 해요. 현장 경험이 있다 보니, 재료비·가공비·중량을 계산해 오차 없이 즉석에서 단가를 제시할 수 있거든요. 그들이 놀라더라고요. ‘트랜스포머’ 시리즈로 유명한 미국 해즈브로, ‘바비인형’을 만든 마텔과 협상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미국 친구들은 그래서 저를 ‘저스트 초이(Just Choi : 정확한 최)’라고 불렀어요. 학력은 짧아도 기술적인 섬세함에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어요.”

- 1990년대에 <용가리>를 비롯해 한국 애니메이션과 관련 완구 제작에 투자를 많이 했지만, 손실이 컸던 것으로 알아요. 특히 한국 자본만으로 완성한 야심작 <영혼의 기병 라젠카> 실패는 상당히 뼈아팠을 것 같아요.
“유아용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 의견과 일본의 <신세기 에반게리온> 같은 작품을 원하는 시나리오 작가의 견해가 충돌했어요. 로봇 완구를 만드는 금형 비용만 10억 원이 들었는데 결국 큰 손실을 봤죠. 고 신해철씨의 노래만 명곡으로 남았어요(웃음). 그래서 이후 <탑블레이드>는 상품성에 대한 기획 시나리오가 앞선 일본과 합작으로 기획, 제작한 거예요. 과정이 잘못됐으면 빨리 끊어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패착이에요.”
- ‘탑블레이드’는 완구와 애니메이션이 동시에 터지면서 2001년과 2002년 국내외에서 연간 1조 원의 매출을 올렸다죠. 일본 TV 역사상 최초로 한국인 감독과 스태프 이름이 방송에 노출됐고요.
“당시만 해도 일본은 한국을 일본의 OEM 하청 기지로만 보며 깔봤어요. 저는 이 기회에 한국 애니메이션의 자존심을 지키고 한·일 공동제작임을 일본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한국인 감독과 스태프 이름을 자막에 넣지 않으면 더는 투자하지 않겠다며 6개월을 버텼어요. 그게 통한 거예요. 사업하면서 저는 늘 제가 ‘대한민국 사절단’이란 정신으로 임했어요. 당시 한국 기업인들은 관례적으로 한국에서는 물론, 일본에 가서도 일본인 파트너들을 접대했어요. 저는 절대 그러지 않았어요. 자존심을 지키려 한국에선 내가, 일본에선 그들이 밥을 사게 했죠.”
위기도 여러 차례 겪었다. 2003년 초이락게임즈를 설립하고 온라인 게임에 투자했다가 수백억 원의 수업료만 냈다.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회복하기 힘든 금전적 곤경에 처한 일도 있었다. 한국 시장 광고와 유통망을 손오공에 의지하던 일본·미국의 글로벌 완구 브랜드들이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한국 시장을 직접 공략하기로 하면서 또 한 번 시련이 닥쳤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순수 한국 콘텐츠·자본만으로 2013년과 2014년 각각 애니메이션과 함께 출시한 ‘헬로카봇’과 ‘터닝메카드’가 전 세계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해외 완구 브랜드들로부터 독립할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자동차와 변신 로봇을 결합한 ‘헬로카봇’과 ‘터닝메카드’ 아이디어를 냈더니 손오공 이사진들이 리스크가 크다며 반대했어요. 그래서 새로 초이락컨텐츠컴퍼니를 설립해 초이락게임스와 합병시킨 후 100% 제 개인재산을 털어 제작했죠. 극장판 애니메이션 총감독을 맡으며 OST도 제가 직접 작사·작곡했고요. (손으로 진열장에 놓인 KRI 한국기록원 증서를 가리키며) ‘터닝메카드’ 시리즈는 2015~2017년 국내외에서 2519만8404개 판매해 ‘애니메니션 시리즈 최다 완구 판매’ 신기록도 세웠어요.”

- 2015년 초이랩 설립 후 본격적으로 음악작업을 하고 있는데, 최근엔 어떤 곡을 작곡했습니까.
“조명섭의 ‘브라보 친구’, 김소연의 ‘국가대표’를 비롯해 꾸준히 하고 있어요.”
- AI를 이용한 가상 아이돌 가수를 준비 중이라죠. 어디까지 진전됐나요.
“4인조 걸그룹을 구상했고, 현재 음악과 스토리텔링을 제작 중이에요.”
- 왜 가상 아이돌 가수인가요.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가 나오기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7년 전에 K팝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을 제가 기획했어요. 캐릭터도 만들어놓았죠. 그 캐릭터에 맞춰 실제 가수를 오디션으로 뽑는 프로젝트를 KBS와 같이하려 했어요. 그렇게 선발한 친구들을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시키면 애니메이션도 살고 아이돌 그룹도 살아 홍보가 더 잘 되거든요. 하지만 KBS의 인사이동 탓에 계획이 무산됐어요. 이걸 다시 해볼 생각이에요.”
- 그게 AI로 완성될 가상 걸그룹인가요.
“맞아요. 앞서 나온 <카데헌>의 성공 덕분에 제작이 더 수월해졌죠. 트로트의 감성과 K팝의 화려함을 융합해 전 세계 시장을 공략할 자신감이 있어요.”
- 칠순의 나이에도 식지 않는 에너지의 원동력은 뭔가요.
“다양한 아이디어로 내 머릿속은 늘 근질근질해요. 쉴 틈이 없죠. 즐거워요. 그래서 내일 죽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겁니다. 하하하…”
박주연 선임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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