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을 해석하기 위한 몇 가지 단초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작과 영화가 정의하는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작가는 책 제목으로 대도시에서만 특별하게 존재하는 사랑법이 있음을 전면에 내건 바 있다. 작가가 전하는 대도시의 사랑법을 좀 더 이해하려면 그의 단편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에 담긴 네 편의 단편 소설들을 모두 종합해 보아야 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자 화자인 '영'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다양한 만남과 이별들이 서로 중첩되고 충돌하는 과정에서 대도시만의 특별한 사랑법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박상영 작가에게 대도시의 사랑법은 연역적으로 주장하는 명제가 아니라 귀납적으로 도출된 추론일지도 모른다. 법칙으로 강제되고 모두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규율이 아닌, 도시의 익명들이 겪어내는 여러 형태의 사랑을 일종의 ‘법’으로 규정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대도시의 사랑법'을 제정한 것이다.
단편 소설집에 포함된 '재희'를 각색한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박상영 작가가 선언한 '대도시의 사랑법'으로부터 시작하여 연역적으로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낸 작품에 가깝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그 사랑법을 사유하는 주체가 소설 속 주인공 ‘영’으로부터 벗어나 이언희 감독에게로 옮겨갔기에 가능했다. 영은 원작 '재희'의 주인공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나의 유니버스로 창조된 '대도시의 사랑법' 속 1인칭 화자는 '영'이자 '나'로 불리며 단일한 인물로 규정될 수도, 시스젠더 게이 남성이란 유사성을 지닌 우연히 같은 닉네임을 사용하는 종로 게이 커뮤니티의 어떤 인물로도 규정할 수 있다. 캐릭터의 특정성과 익명성이 서로 공존하는 관계 안에서 작가의 대도시 사랑법은 규정된다. 반면 이언희 감독은 특정할 수 없는 원작의 주인공을 흥수(노상현)로 요약 정리한다.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의 엄마 캐릭터로부터 DNA를 가져온 흥수 엄마(장혜진)를 등장시켜 ‘재희’에는 없는 흥수의 가족 서사를 새롭게 설계하고 ‘나’의 곁을 스쳐지나가는 수없이 많은 남자들 사이에서 규호(정휘)를 설정하여 흥수의 연애 생활을 한 곳에 뿌리 내린다. 이로써 이언희 감독에게 대도시의 사랑법은 익명성이 아닌 특정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그러한 특정성을 지닌 존재들이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사랑이란 것을 수행할 때 적용할 수 있는 법이 된다.
이러한 작가와 감독의 법 차이는 원작과 소설이 그려내는 '대도시'의 이미지 또한 구별 짓는다. 작가에게 대도시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감추고 그 안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공간이다. 성소수자들이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익명 뒤에 숨어 자유롭게 사랑을 펼쳐낼 수 있는 가능성이 대도시에서는 공존한다는 것이다. 반면 이언희 감독에게 대도시는 사회체제가 터부시하는 것들로부터 외면받고 주변부로 밀려난 존재들이 힘겹게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시공간이다. 감독은 대도시의 익명성이 아닌 손쉽게 타인을 혐오하고 갈라치는 목소리들에 주목한다. 그 목소리는 게이 남성뿐만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자유롭게 표현하려는 여성들 또한 터부시한다. 적어도 감독에게는 '똥꼬충'이라 혐오 당하는 게이 남성이나 '걸레'로 폄하되는 여성이 결코 다르지 않다. 그녀들이 이성애자로서 중산층에 손쉽게 편입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게이 남성과 여성을 향하는 체제 내의 혐오 프레임은 동일한 기조 안에서 작동한다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그 프레임이 어떻게 작동하고 (작가는 서로 다른 존재였다고 강조한) 이성애자 여성과 동성애자 남성이 어떻게 서로 연대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탐구한다. 익명성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었던 작가의 대도시 사랑법이 이언희 감독을 통해서 벽장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흥수와 재희의 대칭되는 서사 구조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고르라면 주저하지 않고 대칭되는 흥수와 재희(김고은)의 서사구조를 선택하겠다. 두 인물의 서사적 대칭은 사랑을 인식하고 대하는 두 인물의 태도로부터 출발한다. 흥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는 결혼할 수 없기에 결혼을 상상조차 하지 않으며 관계의 지속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있기에 관계를 지속시키려 하지 않는다. 반면 재희는 사랑을 믿는다. 진실된 사랑은 반드시 존재할 거라 상상하며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랑을 완성하려 한다. 흥수는 다가오는 사랑을 밀어내고 거부하지만 재희는 붙잡을 수 없는 사랑을 붙잡기 위해 애달파 한다.
두 인물의 차이는 동성애와 이성애에 대한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비롯된다. 흥수가 사랑을 믿지 않고 다가오는 사랑을 밀어내는 이유는 그 판타지를 받아들였을 때 스스로 겪어야 하는 현실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랑은 빨아 먹는 동안엔 달콤함이 입 안에 가득하지만 이내 잔향만 남긴 채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는 사탕과도 같다. 어차피 붙잡을 수 없는 관계라면 애초에 시작을 안 하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는 방법임을 경험 속에서 터득한 결과다. 그런 흥수 곁을 규호는 일심단편으로 지킨다. 이것은 흥수의 의지라기보다는 영화적 의지에 가깝다. 사랑을 믿지 않으려는 흥수에게 그럼에도 그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서사적 압력이다. 그 압력은 결국 흥수가 어머니에게 정식으로 커밍아웃하고 게이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내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결말을 이끈다. 원작이 재희와의 차이를 발견하며 그들의 시절이 "영영 끝나버렸다는 것을 깨달아" 버리며 끝낸 것과 달리, 영화는 경찰과의 소개팅을 주선하며 신혼여행을 떠나는 재희의 마지막 전화로 끝맺는다. 재희로 대변되는 서사적 압력이 흥수의 게이로서의 주체성을 회복하도록 만든 순간이다.
반대로 재희에게는 흥수에게 행해진 서사적 압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재희에게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발생하는 실재적 사건들이 구체적으로 기입된다. 속옷을 훔쳐가고 집안을 훔쳐보는 남성들의 범죄, 자신의 욕망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주장을 감추지 않는 여성들을 혐오하는 남성적 폭력, 직장 내 위계질서 속에서 뒤로 밀려나는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 이 모든 현실적 기표들이 재희의 서사를 압도한다. 이러한 서사적 특징은 재희 서사를 '여성 혐오적 서사'로 간편하게 관습화하고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 재희가 서사 속에서 겪는 고통의 근원은 남성중심의 가부장 질서에 뿌리를 두고 있음에 분명하다. 결국 여성 혐오적 시선들이 재희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성 혐오' 담론을 지속적으로 타자화 하려는 한국 사회의 기획으로부터 대중서사 또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 기획이 재희 서사를 여성 혐오라는 담론 안에서 손쉽게 해석하도록 이끌려 한다면 이로부터 저항하여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을 <대도시의 사랑법>은 흥수와의 관계 안에서 탐구한다.
두 인물의 차이와 동일성 사이에서
재희와 흥수의 대립되는 서사 구조 속에서도 영화적 시선은 끊임없이 두 사람의 공통점을 발견하려 애쓴다. 가장 대표적인 순간은 학교 축제 장면이다. 성소수자 인권 동아리를 무참히 짓밟는 남성들의 폭력과 재희를 농락하며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화를 내는 선우(이유진)의 폭력을 서로 교차하며 영화는 두 종류의 폭력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주장한다. 성소수자에게 발생하는 젠더 폭력의 구조와 여성에게 발생하는 성폭력의 구조는 분명 절대 같지 않다. 하지만 흥수를 거침없이 폭행하는 남성들과 가해자임에도 떳떳하게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선우를 위로하는 남성들의 모습 속에 우리는 선명하게 남성연대의 힘을 발견할 수 있다. 각자의 폭력이 발생하는 구조는 서로 다르지만 그 폭력의 근원은 서로 동일할 수 있다는 영화적 시선이 흥수와 재희를 하나로 연결한다. 어쩌면 서로 다른 존재임에도 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함께 해야만 하는 당위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극단적인 몽타주 시퀀스가 폭풍처럼 지나가고 난 뒤 흥수와 재희는 말없이 김치찌개를 끓여 밥을 먹는다. 그러고 나서 서로의 상처입은 과거를 공유한다. 한 집에서 함께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이란 뜻처럼 그들이 '식구'가 된 뒤에야 과거를 대면케 한 것은 식구의 범위를 상처를 품고 보듬는 존재로까지 확장하기 위함이다. 엄마에게 아웃팅된 뒤 이성애자로서 '치유될 수 있도록' 기도 받아야 했던 흥수나 찌그러진 우유갑을 그렸단 이유로 썩은 우유 테러를 당해 한국을 떠나야 했던 재희의 아픔은 결코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드리워진 폭력의 구조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서로 다른 구조 속에서 폭력을 당했을 때 느끼는 고통은 결국 동일한 아픔이기 때문이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이렇게 차이가 아닌 동일성을 발견하고 주장한다. 끊임없이 차이의 정치를 주장해야 하는 소수자 운동 속에서 동일성은 서로의 다름을 가리고 은폐할 위험을 지닌다. 하지만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연대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차이 속에 공존하는 동일성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도시의 사랑법>이 주장하는 바는 바로 여기에 있다.
상품으로 소비될 수 없는 <대도시의 사랑법>의 깊이
박상영 작가가 강조한 차이를 이언희 감독이 다시금 이어낼 수 있었던 것은 감독이 이성애자 여성으로서 게이 남성의 삶을 이해하고 수용하려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이성애자 여성과 게이 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젠더 계급의 격차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성애자로서 사회의 결혼 제도에 편입될 수 있는 여성이라 하더라도 그 제도가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이상 제도가 가하는 억압은 결혼 제도에 편입될 수 없는 성소수자의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직 나의 고통을 통해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열린 태도뿐이다. 이것은 유튜브에서 범람하는 성소수자 관련 콘텐츠를 가볍게 소비하며 그들을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태도와 결을 달리한다. BL 콘텐츠에 열광하면서도 게이 남성들을 향한 남성 폭력의 현실은 외면하는 팬덤과도 결을 달리한다. 이성애자 여성에게 게이 친구가 한 명쯤 있는 것이 '힙함'의 증명으로 여겨지는 시대적 유행 속에서 <대도시의 사랑법>이 가볍게 소비되기에는 그 깊이가 유난히 깊다. 그 깊이는 퀴어영화임에도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로 포장하려는 마케팅의 기획을 넘어선다. 트랜스젠더 희곡작가 이은용이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라며 제목을 통해 외쳤던 것처럼 성소수자들은, 또 여성들은 그렇게 손쉽게 상품으로 소비될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동윤 영화평론가(dongyunlee0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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