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는 자연스럽게, 비극은 자기연민 없이
“어르신들이 무엇보다 간절히 원하지만 자식들이 절대 안 주는 게 뭔 줄 알아? 바로 시간이야.”
신파에도 격이 있다. 죽어가는 할머니의 유산을 물려받으려는 손자 이야기로 타이 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작품 ‘할머니가 죽기 전 백만장자가 되는 법’을 연출한 빳 분니띠빳(33) 감독을 2024년 10월5일 부산국제영화제(BIFF)에서 만났다. 첫 극영화 연출로 2025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타이 대표로 나서게 된 그에게 진실한 영화를 만드는 법에 관해 물었다.
이창동이 아이돌이라는 젊은 타이 감독
빳분니띠빳 저는 항상 느린 속도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성은 당신의 속도는 아름다웠어요.) 감사합니다. 할머니에 관한 영화를 찍는다면 누구나 한국 영화 ‘집으로’를 레퍼런스 삼을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타이인이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우리 영화 속 할머니와 손자의 관계는 좀더 모호합니다. ‘할머니의 돈을 원하는 거야, 아니면 할머니를 돌봐드리고 싶은 거야?’ 그런 면에서 이 관계성은 실제 우리 삶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은 혹시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영화 ‘시’도 봤나요? 그것도 할머니와 손자에 관한 영화인데.
빳 예, 10번 정도 보았습니다. 이창동 감독은 저의 아이돌입니다. 그의 모든 영화, 특히 ‘박하사탕’을 좋아합니다. 영화가 어떻게 삶을 반영하는지 내용으로뿐만 아니라 형식으로도 보여주니까요. 역순으로 진행되는 실험적인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인생을 담아낸다는 것이, 다른 차원의 영화라 생각합니다.
성은 신파로 치우치기 쉬운 소재인데, 그러지 않았어요. 만들면서 무엇을 경계했나요.
빳 감독으로 이야기에 접근하다보면 관객을 통제하길 원합니다. 여기선 웃어야 해. 여기선 울어야 해. 하지만 저는 그 모든 것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티브이(TV) 시리즈(그는 타이 영화 ‘배드 지니어스’의 드라마 시리즈 연출을 맡았다)를 만들면서, 그런 의도들이 이야기를 납작하게 만든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화를 만들 땐 더 많은 레이어(감정의 층)를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성은 레이어는 어떻게 만들죠?
빳 좋은 질문이네요. 이걸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사람은 봉준호 감독이에요. 영화 ‘기생충’이 좋은 예인데요. 영화를 볼 때 관객은 그저 즐길 뿐입니다. 사회, 자본주의, 계급 등을 비판하지 않고 그저 영화를 즐길 뿐이에요. 하지만 영화 전반에 레이어가 다층적으로 깔렸죠. 레이어를 잘 만들고 싶다면 당신이 뭘 이야기하고 싶은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성은 뭘 이야기하고 싶은지 정확하게 짚어서 영화에 넣어야 한다?
빳 제 경우 촬영할 때 한 장면에선 오직 그 하나만 찍습니다. 여분의 촬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해요. 그러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이 만들고 싶어요. 한 장면을 찍을 때 롱샷, 클로즈업, 여러 개를 찍고 편집실에서 해결한다? 그렇게 모든 부분을 강조하면 청중의 인식이 둔해집니다. 예를 들어, 집 앞에서 할머니가 기다리는 장면을 촬영할 때 보통은 할머니를 클로즈업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레이어를 만들려면 샷을 넓혀야 합니다. 할머니가 있는 환경, 집의 구조, 그가 앉아 있는 자리, 돌아다니는 이웃까지 보여줘야 합니다. 관객이 그 순간을 자신의 기억과 연결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제공합니다.
성은 아… 그래서 할머니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장면만 봐도 제가 눈물이 난 거였군요.
빳 나는 이 모든 걸 한국 영화와 일본 영화에서 배웠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보편성 갖는 ‘클래식’ 추구
성은 대사도 사소한 웃음 포인트가 많았어요. 어떻게 디테일을 잡았는지.
빳 배우와 스태프가 당신과 함께 일하는 동안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야 즉흥 연기도 잘 나오거든요. 가까워지기 위해 우리는 매주 만나 워크숍을 했습니다. 리허설이나 대본 연습이 아닌,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연습을요. 저는 영화에 많은 시간을 낼 수 있는 배우를 찾았는데, 주연배우인 빌낀 뿟티뽕은 저에게 반년의 시간을 내주었습니다.
성은 영화의 테마와도 닿아 있네요. 사랑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는.
빳 맞아요. 영화의 캐릭터들은 그저 거기에 존재했어요. 그들은 ‘오, 내 인생이 너무 슬퍼서 여기서 울어야 해요’ 하지 않았어요. 웃긴 장면에서도 웃기려는 기대가 없었죠. 자연스러움. 이 영화의 코미디적 요소는 그들이 그저 거기에 존재하고, 우리가 관찰자로서 그들을 지켜보고, 비극적인 이야기에서도 그들이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웃음뿐만이 아닌 일종의 희망도 주는 거죠.
성은 영화를 만들기 전 당신의 목표가 뭐였는지 궁금해요.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지.
빳첫 영화라 아는 게 없었어요. 이게 작동할지 안 할지 확신하지 못했죠. 상업적 소재도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제 목표는 명확했어요. 만약 다음 영화를 만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어떻게든 이 작품을 클래식으로 만들자.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걸 만들고 싶었어요. 티브이 시리즈를 만들면서 사람들이 좋은 반응을 줘도 한두 달뿐이었어요. 패스트패션처럼 사라지죠. 그래서 저는 시대를 초월하게 해주는 요소를 찾는 데 집착했어요. (성은 그 요소가 무엇이던가요?) 촬영, 연기, 대본, 장소, 의상, 프로덕션 디자인 모든 것이요. 패스트패션적인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려고 노력했어요.
성은 최근 에드워드 양 감독의 ‘독립시대’(1994)라는 영화를 극장에서 봤는데 너무 세련돼서 놀랐어요. 유행을 타지 않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죠?
빳 원리는 간단해요. 고전 영화를 많이 보면 됩니다.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이마무라 쇼헤이…. 이런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을 보면, 영화 자체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것 같지만 이야기 속도는 매우 느린 편이고, 그런 종류의 전통적인 영화 제작이 관객에게 심리적으로 더 잘 통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상업적이면서도 예술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래된 할리우드 영화나 아시아 영화 같은 고전적인 내러티브 영화 제작 방법을 사용하려 노력했고, 오늘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을 사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극장에서, OTT에서 만나요
202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과 미겔 고메스 감독, 쉬안화(허안화) 감독 등 세계적 거장들의 마스터 클래스가 열렸다. 그리고 건너편 커피숍에선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빳 분니띠빳 감독의 마스터 클래스도 열렸다고 기록해둔다. 친구에게 수다 떨듯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알려주려 노력한 감독과의 인터뷰 풀버전을 ‘언삼곤듀’ 유튜브 채널에 올릴 예정이니 2024년 10월9일 극장에서, 또 한 달 뒤 넷플릭스에서 상영하는 ‘할머니가 죽기 전 백만장자가 되는 법’을 보시고, 제 인터뷰 영상까지 봐주시길. 이 영화, 나만 보기엔 너무 아깝다.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궁금한 건 당신’ 저자
빳 분니띠빳의 플레이리스트
① 차라빱스(Charapaabs)|
https://youtu.be/RhDBkqLlUmw?si=HJet1gxSqXsch_PB
-5년 전의 뮤직비디오로, 영화 ‘할머니가 죽기 전 백만장자가 되는 법’에서 할머니 역을 맡은 주연배우 우샤 세암쿰이 등장한다. 함께 일한 조연출이 과거 이 뮤직비디오 제작에 참여해 우샤 배우를 알게 됐다.
② 짜이라릉 스튜디오(JAIRAROENG STUDIO)|
https://youtu.be/YAYMCDzSSC8?si=x-Q_a9sZZFpwj5Sv
-이번 영화음악을 만든 작곡가가 작업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비하인드 스토리다. 손이 많이 갈 만큼 높은 수준의 섬세함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그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③ 컬렌(Cullen HateBerry)|
https://youtu.be/kRmqqUqDYOk?si=iQ6Qek4iOP_kQSIf
-타이에 있는 여러 명소를 여행하는 한국인 친구들의 브이로그다. 매우 재밌게 봤다.
*남플리, 남들의 플레이리스트: 김수진 컬처디렉터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가 ‘지인’에게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