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꼬 튼 한·일관계 정상화…미래지향적 파트너십 필요
전문가가 본 한·일 정상회담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이후에도 양국 관계는 계속 요동쳤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과의 역사전쟁을 선포했고, 이명박-노다 회담은 위안부 문제로 말다툼하다 끝났고 독도방문으로 이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시대에도 위안부문제로 대립하다가 2015년 합의를 만들어냈지만 문재인 정권에서 형해화되었다. 2018년 강제징용관련 대법원 판결은 한·일 양국을 극적으로 갈라놓았다. 문재인-아베정권 당시 한·일관계는 최악이었다. 양국 관계를 가장 좋았던 김대중-오부치 시대로 되돌려놓자는 것이 이번 정상회담의 취지이다.
이번 정상회담은 양국 관계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포괄적으로 관계를 증진하면서 한 단계 높은 관계로 진화하게 만드는 데 초점이 놓여졌다. 먼저 정부 산하 재단에 의한 제3자 변제를 골간으로 하는 강제징용 해법을 바탕으로 외교적 갈등을 잠재우고, 이 문제와 연계되었던 문제들을 한꺼번에 풀자고 확인했다. 일본이 수출규제를 없애기로 하면서 한국은 WTO 제소를 취하하는 동시행동을 취했다. 화이트리스트 복귀는 일본 내 국내법 절차가 필요하지만 조속히 이를 해결하고 원상복귀한다는 데 합의했다. 한국에 대한 보복조치들을 전부 거두어들인다는 의미이다. GSOMIA를 완전 정상화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정보교류의 장애물도 없앴다. 대법원 판결로 흐트러진 한·일관계를 2017년 이전으로 되돌려놓는 정상화 조치들이다. 양국 정부 간 전략적 소통 강화를 위해 당국 간 안보대화, 차관급 전략대화를 재개하고, 경제안보협의체 신설에 합의했다. 나아가 전경련과 경단련은 한·일 미래파트너십기금을 만들기로 했다. 과거사 해결이 미래의 협력으로 연결되어야 바람직하다는 판단의 반영이다. 양국 재계가 기금을 모아 국제질서의 공동 수호, 경제안보에서의 공동 대처, 신기술시대 준비, 미래세대의 교류와 협력 촉진에 나서기로 했다. 미래에 대한 공동 투자라고 할 수 있다.
한·일 정상회담에서 아쉬운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시다 총리는 많은 우리 국민들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한·일 외교 당국은 막판까지도 치열한 샅바싸움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공동성명이 나오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기시다 내각은 4월에 통일지방선거와 보궐선거를 앞두고 있다. 그의 정치적 향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선거라서 우파로터의 내부 비판을 피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향후 기시다 총리가 셔틀외교의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면 보다 전향적인 입장 표명이 있길 기대한다. 일본 기업의 참여는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채 애매하게 남겨 두었다. 윤 대통령은 구상권 행사를 상정하지 않겠다고 언급함으로써 일본 기업들에게 안심감을 주었고, 기시다 총리는 앞으로의 호응조치에 대해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응해 나가겠다’고 답함으로써 가능성의 문을 닫지 않았다. 3월 6일 한국의 대책 발표로 시작된 한·일관계 정상화 프로세스는 정상회담으로 본격 궤도에 올라섰다. 4월 말 한·미정상회담, 5월 G7정상회의 초청이 이루어질 경우 예상되는 한·미·일 정상회담, 그리고 기시다의 답방 등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과정속에서 하나씩 결실을 맺어가길 기대해 본다.
앞으로 한·일관계를 또 다시 격랑으로 몰아가지 않으려면 양국의 정성 어린 노력이 배가되어야 한다. 우선 한국 정부는 피해자와의 직접 소통과 설득에 지속적으로 신경 써야 한다. 피해자 권리 구제를 위한 실질적 조치들을 구체화하면서 그들의 아픔을 달래는 조치들이 이어져야 한다. 단, 피해자 지원단체나 법률대리인, 시민단체보다 피해자 본인들과 직접 소통에 중점을 두기 바란다. 또한 외교 당국은 치열한 외교협상에 지금보다 더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바라는 일본의 호응조치가 실현될 수 있는 길을 최대한 확보하는 게 국민들에 대한 도리이다. 문제 해결의 종지부를 찍은 게 아니라 시작이라는 마음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말과 행동은 한·일관계의 향배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다. 우선, 일본에서 경거망동이나 문제 발언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세심한 메시지 관리가 있어야 한다. 우익들의 배려 없고 무책임한 말 한마디가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았다는 엄연한 역사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또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한국 속담을 귀 기울여 듣기 바란다. 한국이 돈이 모자라서 일본에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불행한 과거에 대해 미안하다는 진정성이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일관계는 이제 정상화의 물꼬를 텄다. 이제부터 관계 심화와 확대를 위한 큰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느냐는 양국 정부와 국민들의 노력에 달려 있다. 과거에 매몰되지 않는 미래지향적 관계, 침략자-피해자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대등한 파트너십, 한반도에 국한하지 않는 넓은 세계의 공동 개척에 한·일이 적극적으로 함께 나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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