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적의 도로, 경부고속도로: 불가능을 2년 5개월에 현실로 만든 대역사
1960년대 극심한 빈곤과 낙후된 교통망 속에서 서독의 아우토반이 한 국가 지도자의 꿈을 바꿔놓고, 불과 2년 5개월 만에 국토를 가로지르는 428km의 거대 동맥을 이루어낸 경부고속도로의 탄생. 이것은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한 인프라 혁명의 역사다.
>> 독일의 경험과 태국 고속도로 현장에서 건국한 발상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부고속도로 구상은 1964년 12월 서독 방문에서 비롯됐다. 당시 국가원수로는 처음 서독을 찾은 박 전 대통령은 28시간 비행을 거쳐 쾰른 공항에 내렸다. 돌아올 현대식 건설 장비도 부족하던 시대, 2차 세계대전 폐허를 딛고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의 국력을 목격한 그는 번듯한 아우토반 도로를 직접 주행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독 방문 사진]
"당신네는 어떻게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했느냐"는 물음에 독일 관료들은 고속도로와 자동차 산업, 그리고 제철소 건설을 조언했다. 박 전 대통령은 시속 160km로 달리는 아우토반 위에서 차를 멈추고 내려 포장 도로의 구조를 손으로 직접 더듬어보며 살펴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폭과 강도, 기술 수준까지 눈과 손으로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1964년 당시 한국은 경제개발을 위해 미국에 차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미국이 본 한국은 여전히 경공업 중심의 산업에 머물러야 할 나라였다. 박 전 대통령은 대신 서독과의 경제협력을 모색했고, 에르하르트 총리와의 회담에서 파독 광부와 간호사 임금을 담보로 1억 5900만 마르크(약 4000만 달러)의 차관을 확보했다. 현대화의 청사진은 유럽의 경험에서 얻었지만, 실행의 기술은 다른 곳에서 비롯됐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한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은 당시 태국의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축적한 경험을 이 프로젝트에 투입했다. 태국에서의 대규모 토목공사 경험이 한반도의 가파른 산악 지형을 뚫어내는 기술력의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 국제기구와 정치권의 회의 속에서도 "우리의 기술, 우리의 자금"으로 강행하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의 발상은 결코 환영받지 못했다. 당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은 1966년 6월 제출한 보고서에서 경부고속도로보다 영동고속도로를 먼저 건설할 것을 권고했다. IBRD의 입장은 "서울과 부산 간에는 복선 철도가 놓여 있고 국도와 지방도도 잘 갖추어져 있으므로 서울과 강릉 간 영동고속도로를 먼저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차관을 제공할 국제금융기구가 우선순위 변경을 권고하자 국내 정치권도 움직였다.
당시 야당 인사들도 이를 지지했다. 논리적 근거는 견고해 보였다. 차량 수요 부족이라는 통계적 판단, 지역형평성 문제, 막대한 재원 필요라는 현실적 우려가 모두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불리했다. 경제기획원마저 "막대한 자금을 다른 산업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국제기구의 권고를 무릅쓰고 건설을 강행했다. 1967년 12월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 후보가 대국토건설계획의 일부로 경부고속도로를 공약하고, 재선에 성공한 후 국토개발 전문가 주원을 건설부장관으로 임명하면서 추진력이 확보됐다. 1968년 2월 1일 착공 결정 당시, 정부는 IBRD의 차관이 불가능함을 감수했다.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로 얻은 한일협정 차관과 휘발유세 인상 등으로 재원을 조달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군사작전 같은 건설 현장, 최소 비용·최단 기간의 기적
1968년 2월 1일 착공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거의 군사작전에 가까웠다. 현대건설을 포함한 16개 건설사와 3개의 건설공병단이 투입됐고, 연인원 약 892만 8천 명이 시공에 동원됐다. 이는 당시 국가 예산의 약 30%를 소진하는 초대형 국책사업이었다. 총 공사비는 429억 원.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어마어마한 규모지만, 당시 일본의 동명고속도로 건설비의 8분의 1 수준으로 최소 비용을 달성했다.

[1969년 경부고속도로공사현장(대전육교) | 연합뉴스]
가장 놀라운 것은 공기(工期)였다. 총 428km를 불과 2년 5개월 만에 완공하는 것은 세계 건설사에서도 유례가 드물었다. 정상적인 콘크리트 양생 시간이 8일이 필요한데, 1970년 7월 7일 개통식을 맞춰야 하는 시간 압박 속에서 이를 단축하기 위해 조강(早强) 시멘트를 도입했다. 24시간 교대 근무로 공사를 강행하면서 겨울의 얼어붙은 땅 위에 도로포장을 하는 등 기술적 한계를 밀어붙였다.

>> 당재터널: 붕괴와 죽음을 밟고 뚫려낸 마의 구간
경부고속도로 건설 구간 중 가장 악명 높은 '마의 구간'은 충북 옥천의 당재터널(현재 옥천터널)이었다. 이 터널은 상행선 590m, 하행선 530m로 경부고속도로 12개 터널 중 가장 길었고, 가장 난공사였다.
문제는 지반이었다. 퇴적암인 편마암과 활석 같은 약한 지층이 섞여 있어 터널을 뚫기만 하면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1969년 8월부터 불과 10개월의 공사기간 동안 무려 13번의 대규모 붕괴가 발생했다. 각 붕괴마다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당재터널 공사 구간에서만 9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공사는 멈추지 않았다. 감독관인 심완식 중령은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공사일정을 독촉했다고 전해진다. 1970년 7월 7일 개통식에 맞추기 위해서는 공사를 지연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당재터널은 양쪽에서 접속포장이 완료되어 1970년 6월 27일 한 밤중에 관통됐다. 이것이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연결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전체 과정에서는 77명의 인부가 목숨을 잃었다.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금강유원지 부근에 위령탑이 세워졌고, 매년 7월 7일 개통기념식에 함께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 완공 후의 폭발적 경제 효과, 그리고 부실의 후유증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자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15시간 이상 걸리던 이동시간이 4시간 30분대로 단축됐다. 개통 직후 "서울에서 아침을 먹고 부산에서 점심을 즐길 수 있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경제적 파급효과는 단순한 교통 편의를 넘어섰다. 1970년 90억 달러였던 국내총생산(GDP)은 1975년 217억 달러로 2.4배 증가했다. 1970년대부터 1979년까지 10년간 실질 GDP 증가율은 연평균 10.1%를 기록했다. 부산항의 수출입 물동량이 급증했고, 경부축을 따라 자동차, 제철, 정유 등 산업단지가 집중됐다.
도시 발전도 극적이었다. 대전의 인구는 1970년 40만 명에서 2010년 148만 명으로 증가했고, 울산은 15만 명의 중소도시에서 113만 명의 광역시로 성장했다. 수원은 16만 명에서 110만 명으로, 구미는 2만 명에서 39만 명으로 변모했다. 고속도로와 인접한 도시들이 전국 경제의 중추로 부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의 뒤편에는 부실공사의 대가가 뒤따랐다. 1990년 말까지 보수비만 1,527억 원이 투입됐다. 이는 당초 건설비 429억 원의 약 3.5배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무리한 일정과 경험 부족으로 인한 시공 결함이 오래도록 고속도로의 발목을 잡았다. 겨울의 얼어붙은 땅에 포장을 한 구간들이 특히 문제가 됐다.
더욱이 경부축 중심의 집중 투자로 인해 호남과 강원, 경북 북부, 경남 서부 지방 등 경부고속도로에서 먼 지역은 상대적으로 개발에서 소외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과제가 고속도로 건설 이후로도 오래 숙제로 남았던 것이다.

>> 역사의 전환점, 그리고 오늘의 유산
경부고속도로는 단순한 도로 건설을 넘어 대한민국이 만들어낸 국가적 결의의 상징이었다. 국제기구와 정치권의 회의를 무릅쓰고, 선진국의 경험을 받아들이되 우리의 자금과 기술로 이루어낸 대역사였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50년의 사회경제적 직접효과는 245조~351조 원으로 평가된다. 1인당 연간 평균 675만 원의 혜택을 받은 셈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는 데 그 토대를 제공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77명의 목숨이 희생됐고, 개통 후 부실공사의 보수를 위해 막대한 재원을 다시 소모해야 했다는 점은 잊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기적은 기술과 자금의 투입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의 압박 속에서도 안전을 외쳐야 하고, 성공의 그늘에 있는 희생을 애도하는 성숙함과 함께해야 완성된다.
경부고속도로는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물리적 인프라였으나, 그것이 남긴 가장 큰 교훈은 다른 곳에 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도 인간이지만, 그 과정에서 치르는 대가를 마주할 용기도 인간만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벌써 50년 이상을 넘긴 경부고속도로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산업 대동맥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그 위를 달리는 매일 수백만 명의 시민들은 이 길의 탄생 과정을 온전히 알지 못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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