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출로 부원수에 오른 금남군 정충신

노성태 2026. 4. 2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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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 원장의 남도인물열전](62)정충신
정충신 영정


- 정충신은 천출이었다
광주를 대표하는 두 도로는 ‘충장로’와 ‘금남로’다. 오늘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라 불리는 금남로는 충장로에 비하면 젊은 도로다. 충장로는 고려말 광주읍성이 축조되면서 만들어진 도로로, 남문(진남문)과 북문(공북문)을 연결하는 길인 반면, 금남로는 일제 강점기인 1920년 말 만들어진 도로이기 때문이다.

정충신을 기리는 도로, 금남로


충장로에 비해 젊디젊은 도로 금남로는, 오늘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로 불린다. 금남로가 ‘민주의 함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의 함성을 품고 있는 금남로의 주인공인 정충신은 충장로의 주인공 김덕령보다 낯설다. 정충신이 김덕령보다 더 낯선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단서 중 하나가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 보이는 그의 신분이다.

“(정)충신은 광주의 아전이었다. 젊어서부터 민첩하고 총기가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용만(의주)으로 피난했을 적에 본도 병사가 사람을 뽑아 행재소에 일을 아뢰고자 했으나 응모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충신이 솔선해 용만으로 달려가자, 선조께서 불러 보았다. 백사 이항복이 이끌어 휘하에 두었는데 매우 친애를 받았다. 갑자년(1624)에 별장으로 원수 장만을 따라 남이흥과 더불어 역적 이괄을 토벌해 죽임으로 해서 1등 공신에 책훈됐다.”

그의 졸기에는 신분이 광주의 아전으로 나온다. 그런데 광해군 원년(1609)의 ‘실록’에는 천출로, 인조 2년(1624)의 ‘실록’에는 공생으로 나온다. ‘공생’(貢生)이란 관아 등에서 공부하며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아전, 천출, 공생 등 실록의 기록은 그가 양반이 아닌 낮은 신분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계서야담’에는 정충신의 출생과 관련된 다음의 설화가 나온다.

“정충신의 아버지는 광주 향청의 좌수였는데, 어느 날 밤 무등산이 갈라지며 청룡이 뛰어나와 자기에게 달려드는 꿈을 꾼다. 괴이하게 여기고 다시 잠이 들자, 또 백호가 달려 나와 품에 안긴다. 깜짝 놀란 그가 일어나 뜰을 배회하다가 부엌에서 잠든 노비를 보고 마음이 동해 합환(合歡)한다. 노비가 잉태해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정충신이다.”

‘계서야담’에 아버지가 양반인 향청의 좌수로 나오지만, 어머니는 밥 짓는 노비였다. 따라서 정충신의 신분은 용이나 호랑이 태몽을 꾸고 태어났다 할지라도 천출일 수밖에 없다.

정충신보다 200여 년 뒤의 인물인 다산 정약용은 1779년(정조 3), 화순 현감이던 부친을 만나기 위해 광주를 지나다 정충신을 떠올리며 다음의 시를 짓는다.

“언제나 광산부를 지나갈 적에는/ 가슴 속에 정금남(정충신)이 생각난다네/ 신분은 종직처럼 미천했으나/ 재주는 이순신과 견줄만했었지/ 옛 사당에는 풍운의 기운 서렸고/ 남은 터에는 부로들의 전설이 전하네/ 웅장하여라, 서석의 드높은 진산/ 그 정기 모아 기남자를 배출했구나”

정약용에게도 정충신하면 떠오르는 것은 신분이 종처럼 미천했지만, 신분을 극복하고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정충신의 첫 신분은 모친이 노비였기 때문에 천출이었다. 하지만 권율의 장계를 의주 행재소에 전달하고, 이항복의 도움으로 무과에 급제하면서 천출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된다.

- 부원수가 되다
천출로 태어나 이괄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진무공신 1등에 책훈되고 정묘호란 당시 부원수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 정충신이다.

정충신(鄭忠信, 1575-1636)은 광주목(현 광주광역시)에서 1575년(선조 8) 정윤과 영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모친 이씨는 천출이었지만 부친 정윤은, ‘계서야담’에 광주 향청의 좌수(座首)로 나온다.

정충신의 본관은 하동,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이다. 고려말 왜구 격퇴한 명장으로 해도원수에 오른 정지(鄭地)의 9대손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광주 목사에 부임한 분이 후일 도원수가 된 권율이었다. 광주 관군이 중심이 된 권율 부대는 ‘이치’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전주를 지켜낸다. 이치에서의 승전은 조선 관군이 육지에서 거둔 최초의 승전이었고, 그 공으로 권율은 전라도관찰사 및 순찰사로 승진한다.

이치전투의 승전을 적은 장계를 의주 행재소에 전한 분은 17살, 정충신이었다. 이 공으로 양인이 됐고, 권율의 사위였던 도승지 이항복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다. 그리고 그해 의주에서 실시한 임시 무과에 급제한다. 무과 급제는 그가 신분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군관이 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왜군의 활동을 탐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선조실록’의 “군관 정충신이 부산의 왜영에서 돌아와 고하기를”이라든가, “정충신을 보내 호남의 왜정을 탐지하게 했는데”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중국 북방에는 여진족이 흥기해 후금(청)을 건국한다. 여진족의 흥기는 조선에게는 또 다른 위협이었다. 그 여진족과 평생 맞서 싸운 대표적인 인물 또한 정충신이었다. 이는 정충신이 받은 다음의 관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정충신은 1608년(선조 41) 조산보 만호, 1609년(광해군 1) 보을하진 첨사, 1620년(광해군 12) 창주진 첨사, 1621년(광해군 13) 만포진 첨사에 임명된다. 조산보와 보을하진은 여진족과 머리를 맞대고 있는 함경도 경흥과 회령에 위치한 진이며, 창주진과 만포진은 평안도에 설치된 중요 방어진이었다.

정충신은 여진족과 맞서 최전방을 지키는 장수였지만, 여진족 진영 깊숙이 들어가 내부 사정을 알아내고 정부의 회유책을 전하는 사절의 역할도 수행한다. 그가 늘 선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인조실록’의 정충신 ‘졸기’에 보이는 ‘민첩함과 총명함’이었다. 이는 ‘광해군 일기’ 광해군 11년 4월19일자의 “정충신은 일을 알고 영리하니 이 사람을 오랑캐의 소굴에 들여보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라는 광해군의 제안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만포진 첨사 시절인 1621년(광해 13), 그는 후금의 내부 사정을 정탐하기 위한 파견관으로 선발된 후 압록강을 건너 후금의 건주위 추장 등을 만나는데,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와 만나 나눈 다음의 설화로 발전한다.

“누르하치는 (정)충신의 명성을 일찍이 듣고 회담 장소에 충신의 기세를 꺾기 위해 좌우에 창검을 든 군사를 배치하고 장소를 호화롭게 꾸민다. 그리고 충신에게 ‘조선에는 어찌 인물이 없어 너 같은 소소인(小小人)을 보내서 국사를 논하게 하느냐’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충신은 껄껄 웃으며 ‘우리나라는 예의 도덕을 잘 지키는 나라에는 대대인(大大人)을 보내지만 포악하고 힘만 주장하는 나라에는 소소인을 보낸다’라고 맞장구를 친다. 후금 태조 누르하치가 그때야 충신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고 환대했다.”

물론 이 설화는 정충신이 누르하치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 설화는, 정충신이 몸집은 왜소했지만 기상이 늠름하고 총명한 인물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1627년(인조 5),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한 후 조선에 침략하자, 조정은 여진족에 정통한 정충신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막게 했다.

- 진무공신 1등에 책봉되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흥안군 이제를 옹립하며 반란을 일으킨다. 이를 ‘이괄의 난’이라고 부른다. 큰 세력을 형성한 이괄은 한양마저 점령했고, 인조는 공주로 피난해야 했다.

이괄의 난이 발발하자 관군의 총사령관인 도원수는 장만이었고, 정충신은 전부대장(선봉장)이 된다. 관군이 이괄의 반란군을 진압한 최대 전투는 안현(서울 서대문구 안산 무악재) 전투였고, 승리를 이끈 부대는 정충신과 남이흥의 군대였다.

정충신이 남긴 저서 ‘만운집’(晩雲集)에는 안현 전투와 관련해서, “안현에 포진한 후 투구에 기대어 얼핏 잠이 들었는데 시조 경렬공이 장창을 주면서 ‘이는 내가 왜구를 토벌할 적의 물건이니, 너 역시 이것으로 싸워라’라고 하였다. 공(정충신)이 무릎을 꿇고 깨어보니 꿈이었다. 속으로 마침내 자부하였다”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꿈속에서 장창을 건넨 경렬공은 정충신의 9대 선조로 고려말 왜국 격퇴의 명장인 정지 장군을 말한다.

이괄의 난이 진압되고 정충신이 도원수 장만과 함께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훈된 연유다. 더불어 ‘금남군’(錦南君)이라는 군호(君號)도 내린다.

오늘 광주의 도로명 ‘금남로’의 이름이 생겨난 연유다.

이괄의 난 이후 도총관, 수군부원수에 이어 포도대장, 내섬시 제조에 임명되고, 1634년(인조 12) 받은 경상우병사가 마지막 받은 관직이었다.

병자호란(1636)이 일어나기 직전 지병이 악화돼 은퇴한 후 와병 중 서울 집에서 세상을 뜬다. 그가 세상을 뜨자 인조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금남군 정충신이 세록지인(世祿之人)은 아니지만, 왕실에 충성을 다하여 종묘사직을 편케 하였다. 내 그 공적을 생각하여 일찍이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병이 피로 때문에 생겼으나 끝내 살려내지 못하였으니, 고굉(股肱, 팔다리)을 잃은 것처럼 내 심히 서글프다”라며 해당 관서에 예장(禮葬)의 물건을 챙기도록 하고, 특별히 부의를 보낸다.

인조에게 정충신은 이괄의 난을 진압하여 자신의 목숨을 지켜낸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고굉’을 잃은 것처럼 서글프다는 표현을 쓴 연유다. 1685년(숙종 11), 숙종은 정충신에게 시호 ‘충무’를 내린다.

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그를 기리는 사당 ‘진충사’와 무덤이 있다. 그의 사당과 무덤이 서산시에 있게 된 것은 진무공신 1등으로 책봉된 후 이괄의 땅 45만여 평을 사패지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진충사(충남 서산시)


정충신 묘소 (충남 서산시)


그가 태어난 광주에는 한국 민주주의 성지로 불린 도로명 ‘금남로’의 주인공이 되었고, 그의 9대조인 해도도원수 정지 장군을 기리는 경열사(광주광역시 망월동)에 함께 배향되어 있다. 광주 사직공원에는 그의 시 ‘공산이 적막한데…’를 새긴 시비도 서 있다.

‘적막이 고요한데’를 새긴 시비(광주 사직공원)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천출인 정충신이 1등 공신이 되고 부원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졸기’에 보듯 그의 민첩함과 총명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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