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의 결단, 샌프란시스코의 도전

대형 트레이드는 성사되기 전에 전조 증상들이 있다.

선수가 FA를 앞두고 있거나, 혹은 선수의 가치가 구단 방향성과 맞지 않을 때 충돌이 일어난다. 이 괴리감이 커지면 트레이드가 임박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스턴과 라파엘 데버스의 결별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양측은 지난 스프링캠프 때부터 포지션 이동을 두고 마찰을 빚었다. 하지만 사태가 일단락되면서 데버스가 즉시 팀을 떠날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무엇보다 최근 연승을 달린 보스턴이 전력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데버스를 당장 포기하는 건 매우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만큼 예상하기 힘든 트레이드였다. 가장 먼저 이 소식을 전한 로버트 머레이(MLB 인사이더)는 '계정을 해킹당한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았다.

균열
2017년에 데뷔한 데버스는 보스턴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거듭났다. 무키 베츠와 잰더 보가츠 등이 팀을 떠난 이후 홀로 보스턴을 지켜왔다. 보스턴도 2023년 1월 10년 3억1350만 달러 계약으로 구단 역사상 최고 대우를 해줬다.

라파엘 데버스 (구단 SNS)

양측 기류가 미묘해진 건 지난 겨울이었다. 보스턴이 알렉스 브레그먼과 3년 1억2000만 달러 계약을 체결했다. 브레그먼은 데버스와 마찬가지로 3루에서 가장 많이 뛴 선수였다. 두 선수가 과연 공존할 수 있을지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데버스가 3루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데버스의 3루 수비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시한폭탄이었다. 3루에서 범한 통산 141실책은 2017년 이후 다른 3루수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디펜시브런세이브(DRS)와 평균 대비 아웃카운트 처리(OAA) 같은 수비 지표도 3루수로 세우면 안 되는 수준이었다(통산 DRS -62 & OAA -28).

2017-24 3루수 최다 실책

141 - 라파엘 데버스
87 - 에유헤니오 수아레스
85 - 호세 라미레스
85 - 맷 채프먼


데버스는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스프링캠프에서 뚱한 표정으로 나타나더니 3루에 대한 집착을 드러냈다. 하지만 크렉 브리슬로 CBO(Chief Baseball Officer)와 알렉스 코라 감독이 나서서 대화를 한 끝에 팀의 방침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전문 지명타자로 변신한 데버스는 변함없이 무서운 공격력을 과시했다. 어깨 부상으로 뒤늦게 합류해 발동이 조금 늦었지만, 무섭게 몰아치면서 성적을 끌어올렸다. 특히 타석 당 볼넷률이 2023년 9.5%, 2024년 11.1%에서 올해 16.8%까지 늘어났다. 나쁜 공을 더 엄격하게 골라낸 덕분에 전체적인 타격 지표가 상승했다.

데버스 타격 지표 AL 순위

홈런 : 15개 (6위)
타점 : 58점 (2위)
득점 : 47점 (2위)
안타 : 74개 (14위)
볼넷 : 56개 (1위)

타율 : .272 (26위)
출루율 : .401 (4위)
장타율 : .504 (6위)
OPS : 0.905 (5위)
wRC+ : 148 (7위)
fWAR : 2.1 (13위)

데버스 (구단 SNS)

데버스는 지명타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1루수 트리스턴 카사스가 무릎 수술로 아웃되는 변수가 발생했다. 이에 보스턴은 데버스에게 1루수 출장을 요구했다. 데버스가 이 제안을 거절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재점화됐다.

보스턴은 데버스와 불편한 동행을 하지 않았다. 수면 밑에서 데버스 트레이드를 진행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뿐만 아니라 샌디에이고와 애틀랜타, 토론토도 데버스 트레이드를 문의했다. 보스턴은 샌프란시스코로부터 우완 조던 힉스와 좌완 카일 해리슨, 외야 유망주 제임스 팁스와 20살 루키리그 투수 호세 베요를 받고 데버스를 넘겼다.

데버스의 보스턴 커리어는 이렇게 한순간에 막을 내렸다.

상실감
갑자기 중심 타자를 잃은 보스턴 팬들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데버스를 보내고 받아온 선수들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힉스와 해리슨은 이미 메이저리그에서 한계를 보인 투수들이다. 발전과 개조가 곁들여져야 팀에 보탬이 될 수 있다. 유망주 두 명은 메이저리그 승격을 장담할 수 없다. 작년 드래프트 전체 13순위 팁스도 상위싱글A에서 출발이 부진하다(17경기 타율 .134).

이유는 있다. 샌프란시스코가 데버스의 남은 계약을 모두 떠안기로 했기 때문이다. 올해 10년 계약의 2년차인 데버스는 아직 8년 2억5450만 달러 계약이 남아있다. 올해 잔여 연봉 1665만 달러도 샌프란시스코가 지급한다. 보스턴으로선 받아온 선수들은 아쉽지만, 데버스의 계약을 전부 떠넘겨 자금 융통성을 회복했다.

문제는 보스턴이 급히 데버스를 넘길 정도로 자금 압박을 받는 팀이 아니라는 점이다. 말 그대로 '데버스 처리'에 급급했다는 뜻이다. 만약 보스턴이 인내심만 발휘했다면 충분히 더 좋은 제안을 받아낼 수도 있었다.

보스턴은 과거에도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홀대한 전력이 있다. 2004년 노마 가르시아파라가 대표적이다. '메이저리그 3대 유격수'로 불렸던 가르시아파라는 보스턴 팬들의 자부심이었다. 공수 만능으로 보스턴 팬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2004년 돌연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 되면서 어마어마한 파장을 불러왔다.

왼쪽 노마 가르시아파라 & 페드로 마르티네스 (구단 SNS)

그렇다고 해도 당시 가르시아파라는 납득이 가는 행보였다. 고질적인 손목 부상으로 기량이 떨어지고 있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머리로는 이해하는 결정이었다. 보스턴도 그 해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월드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결국, 이번 데버스 트레이드도 결과로 증명해야 한다. 브리슬로 CBO는 데버스를 정리하면서 "로스터의 유연성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지명타자가 고정되지 않고 여러 선수들이 필요할 때마다 돌아가면서 더 다양하게 라인업을 구성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번 시즌 백기를 든 것은 절대 아니라고 강조했다.

올해 보스턴은 유망주 트리오가 메이저리그에 첫 선을 보였다. 크리스티안 캠벨(23)과 마르셀로 마이어(22) 그리고 메이저리그 전체 최고 유망주 로만 앤서니(21)다.

이 선수들이 데버스의 공백을 메워줘야 포스트시즌 진출도 승산이 생긴다. 그러나 이제 막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선수들이 역할 분담을 한다고 해서 데버스의 공격력을 대신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오히려 부담감에 짓눌려 날개를 펴지 못할 수도 있다. 젊은 선수들의 성장에 구심점의 유무 차이는 대단히 컸다.

갈증
샌프란시스코에게 데버스의 합류는 천군만마다. 데버스는 샌프란시스코가 그토록 바라던 홈런 타자다. 통산 215홈런 696타점의 데버스는 162경기로 환산 시 평균 33홈런 107타점을 올렸다. 참고로 샌프란시스코는 2004년 배리 본즈(45홈런 101타점) 이후 30홈런 100타점 타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오라클파크는 좌타자들이 파워를 뽐내기 어려운 곳이다. 우측 담장 높이가 24피트(약 7.3m)로 높은 편이다. 여기에 해풍과 역풍으로 인해 타구가 구장 안에 갇히는 경우가 다반사다.

오라클파크의 난해함은 파크팩터에서도 드러난다. 구장 특성이 담긴 파크팩터는 해당 구장이 타자친화적인지, 투수친화적인지를 알 수 있다. 팀 전력 등 외부 요인을 감안해야 되기 때문에 수치가 쌓여야 신뢰도가 높아진다. 그래서 대개 3시즌을 기반으로 살펴본다.

최근 3년간 좌타자 파크팩터 상/하위

112 - 쿠어스필드 (콜로라도)
108 - 펜웨이파크 (보스턴)
105 - 말린스파크 (마이애미)

95 - 오라클파크 (샌프란시스코)
95 - 아메리칸패밀리필드 (밀워키)
94 - T 모바일 파크 (시애틀)


오라클파크는 최근 3년간 좌타자에게 가장 불리한 곳 중 하나였다. 반면 데버스는 좌타자에게 가장 유리한 곳 중 하나인 펜웨이파크를 홈으로 사용했다. 이 부분만 보면 데버스가 샌프란시스코 타선에 파워를 제공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오라클파크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다만, '홈런팩터'를 보면 펜웨이파크는 좌타자에게 홈런을 쉽게 허락한 곳이 아니었다. 홈런팩터는 90으로 메이저리그 21위 수준이었다(오라클파크 홈런팩터 77, 전체 29위).

<스탯캐스트>는 홈런 타구 정보를 바탕으로 구장별 기대 홈런 수를 제공한다. 이 부문에서 데버스는 펜웨이파크와 오라클파크에서 나란히 202홈런으로 집계됐다. 홈구장이 달라지더라도 홈런 생산력은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워낙 강한 타구를 잘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샌프란시스코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적임자다.

최근 3년간 Hard Hit%

60.8 - 애런 저지
58.5 - 오타니 쇼헤이
56.8 - 후안 소토
55.4 - 오닐 크루스
54.4 - 제임스 우드
54.3 - 라파엘 데버스

*타구속도 95마일 이상 비중


각오
샌프란시스코는 오늘 경기를 앞두고 데버스를 공식 소개했다. 버스터 포지 사장은 물론, 샌프란시스코 레전드 배리 본즈도 동석했다. 보스턴 시절 달았던 등번호 11번은 샌프란시스코에선 영구 결번이라 달 수 없다(칼 허벨).

데버스는 새로운 등번호로 16번을 선택했다.

데버스의 새로운 등번호 (구단 SNS)

트레이드 직후 포지 사장은 데버스의 포지션에 관해 말을 아꼈다. 샌프란시스코도 주전 3루수로 맷 채프먼이 버티고 있다. 손 부상으로 빠져 있지만, 채프먼은 리그 최정상급의 3루 수비를 자랑한다. 뿐만 아니라 클럽하우스 리더이기 때문에 데버스가 그 자리를 뺏는 건 어불성설이다. 괜히 선수들의 반발심만 불러일으킬 것이 뻔하다.

데버스가 즉시 수비를 맡는 것도 무리가 있다. 하지만 잔여 계약을 고려하면 지명타자만 내세우는 것도 손해다. 그렇다면 샌프란시스코가 지금 필요한 곳은 1루인데, 데버스는 그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기 위해 보스턴과 대립한 바 있다.

일단, 데버스는 기자 회견에서 보스턴 시절과 다른 입장을 취했다. 팀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나오겠다고 밝혔다. 심지어 오늘 경기를 앞두고 벌써 1루 수비 훈련에 돌입했다. 밥 멜빈 감독은 여유를 가지고 1루 수비 적응을 지켜볼 것이라고 전했다.

샌프란시스코 데뷔전에서 3번 지명타자로 출장한 데버스는 두 번째 타석 적시 2루타로 타점을 신고했다. 타구속도 111.4마일의 강력한 타구였다. 샌프란시스코는 이러한 타구가 이상적인 발사각도를 형성해 담장 밖으로 향하길 기대한다.

한편, 데버스 트레이드를 추진한 두 팀은 오는 주말 오라클파크에서 맞대결을 가진다.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데버스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새로운 볼거리가 추가됐다.

이창섭
현 <SPOTV> MLB 해설위원
전 <네이버> MLB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