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투수 임찬규, 그리고 디스카운트

사진 제공 = OSEN

어딘가 안 좋아 보이는 투수

30년은 된 얘기다. 그러니까 1990년대 중반이다. 미국 플로리다에 사람들이 모인다. MLB 스프링캠프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유난히 많은 팬들이 기웃거리는 곳이 있다. 최강 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훈련장이다. 특히 투수들 모습에 관심이 많다.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포진한 탓이다.

마침 불펜으로 시선이 쏠린다. 3명이 세션 중이다. 그중 가운데 있는 왼손잡이가 유독 눈길을 모은다.

2미터 가까운 키에서 내리꽂는 직구가 일품이다. 재 볼 필요도 없다. 90마일 후반대는 족히 나올 것이다. 포수 미트가 터질 것 같다. ‘빵~ 빵~’. 통렬한 파열음이 쩌렁쩌렁 울린다.

변화구도 보통이 아니다. 커브가 1미터씩 떨어진다. 브레이크도 대단하다. 마치 어디 부딪혀서 꺾이는 것 같다. ‘저걸 어떻게 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반면 그 옆에는 전혀 다르다. 키도 작고, 덩치도 그냥 그렇다. 나이도 웬만큼 된 것 같다.

던지는 폼도, 날아가는 공도…. 박력이라고는 1도 없다. 아마 90마일도 안 나올 것 같다. 그냥 나풀거린다는 느낌이다.

딴에 변화구도 던진다. 슬라이더, 체인지업, 투심…. 연신 신호를 보내며 이것저것 시도해 본다. 그런데 별 차이를 모르겠다. 다 그냥 밋밋하다. 메이저리그 투수가 맞나? 대학생이 더 낫겠는데? 그렇게 갸웃거리게 된다.

현장을 지켜보던 기자가 있다. <워싱턴포스트>의 토마스 보스웰이라는 칼럼니스트다. 세션을 마친 투수에게 걱정스럽게 묻는다. “어디 안 좋은 거야?”

그러자 상대가 숨이 넘어간다. 켁켁거리면서, 배를 잡고 웃는다. “왜요? 오늘 컨디션 좋아서, 전력 투구했는데.”

대학생 보다 못한 투수는 그렉 매덕스였다. 30세 전후의 전성기 때 얘기다. 사이영상을 4년 연속 수상하던 무렵이다. 바로 옆에 있던 엄청난 좌완은 스티브 에이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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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세와 맞대결서도 우위

지난 주말이다. 대전 이글스 파크가 시끌시끌하다. 6월의 한국시리즈가 열린 날이다. (6월 14일, LG트윈스-한화 이글스)

선발 매치업이 흥미롭다. 홈 팀은 에이스를 내세웠다. 코디 폰세(31)다. 원정 팀도 최상의 카드를 내민다. 임찬규(32)다.

사실 압박감 차이가 꽤 크다.

폰세는 그야말로 전반기 최고의 히트작이다. 일단 체격이 남다르다. 198cm, 115kg의 거대한 외형이다. 손도 크고, 손가락도 길다. 직접 재 본 이대형 해설위원은 혀를 내두른다. “손가락 한 마디는 더 긴 것 같더라.”

거기서 나오는 파괴력은 말할 것도 없다. 150㎞ 중후반의 패스트볼이 2층 높이에서 꽂힌다. 여기에 체인지업은 손도 못 댈 지경이다. 탁구공 잡듯이 손에 넣고, 포크볼처럼 떨어트린다.

반면 임찬규는 다르다. 비교하면 겸손하고, 아늑한 체격(186cm, 88kg)이다.

던지는 공도 그렇다. ‘패스트볼’ 혹은 ‘빠른 볼’이라는 명칭은 조금 그렇다. 그냥 직구라고 부르는 게 무난하다. 잘해야 140㎞ 초반이다. 그런데 이날은 좀 덜 나온다. 피로가 누적된 탓이다. 136~138㎞ 정도밖에 안 나왔다.

주무기는 커브다. 다양한 버전으로 구사한다. 시속 100㎞ 이하로 떨어트렸다가, 110㎞ 로 조절하기도 한다. 유일한 장점은 정확성이다. 그걸 빼고는 대적이 어렵다.

그런 둘의 맞대결이다. 예상은 뻔하다. 2~3점은 차이가 날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아니다.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났다.

폰세 = 6이닝 1실점, 피안타 4개, 탈삼진 10개, 4사구 1개

임찬규 = 6이닝 0실점, 피안타 2개, 탈삼진 3개, 4사구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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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찬규가 더 파워 피처 같았다

둘은 모두 6회까지 버텼다. 그때까지 트윈스가 1-0으로 앞섰다. 선발 싸움에서는 우위에 선 것이다. (최종 스코어 2-2, 연장 11회 무승부)

외형만이 아니다. 내용 면에서도 그렇다.

오히려 폰세가 애를 먹었다. 가끔씩 쩔쩔맨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걸핏하면 주자를 내보내고, 실점 위기를 맞았다. 역시 몰리면 어쩔 수 없다. 투구 패턴도 달라진다. 공격성을 최대한 자제한다. 대신 유인구(변화구)로 헛스윙을 유도하려는 경향이 뚜렷했다.

임찬규는 정반대다. 오히려 자신이 파워 피처 ‘흉내’를 낸다. 136~138㎞짜리 패스트볼로 타자를 윽박지른다.

3회 선두타자 하주석과의 승부가 백미다. 초구는 103㎞짜리 커브를 보여준다. 이어 4개 연속 직구로 정면 승부다. 3번을 휘둘렀지만, 배트에는 한 번도 맞추지 못했다. 결국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보냈다.

타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140㎞도 안 되는 빠르기에 허둥거린다. 타이밍이 늦어 파울이 되기 일쑤다. 그나마 건드리면 다행이다.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는 스트라이크가 하나둘이 아니다.

30년 전 플로리다의 불펜 세션이 떠오른다. 스티브 에이버리와 매드 독(mad dog, 그렉 매덕스의 별명)의 피칭 말이다. 대학 투수보다 못해 보이던 투수다. “전력 피칭했다”라며 켁켁거리던 사이영상 수상자의 항변이었다. (실제 매덕스는 기이한 웃음소리로 유명했다.)

우리 팬들은 그를 마 교수라고 부른다. 그의 (야구) 물리학 강의다.

“속도(velocity)는 상대적이다. 자동차를 예로 들어보자. 멀리서 1대가 지나간다. 주변에 움직이는 물체가 없으면 얼마나 빠른 지 정확히 모른다. 50마일? 60마일? 구분은 불가능하다.”

야구계의 가장 유명한 이론과 맞닿은 논리다. ‘타격은 타이밍이고, 투구는 그 타이밍을 뺏는 일이다’라는.

즉 스피드건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실전은 상대가 느끼는 감각이다. 130㎞ 중반의 느린 직구도, 타자에게는 150㎞가 훨씬 넘는 빠르기로 인식될 수 있다. 그걸 보여주는 게 임찬규의 피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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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덕스와 닮은 점들

임찬규는 피치컴을 쓰지 않는다. 그냥 예전 방식으로 포수의 손가락 사인에 의지한다.

스스로는 ‘꼰대 마인드’라고 낮춘다. 실제로는 장비에 이상이 생길까 봐 그런다. 투구 리듬이 깨지는 게 싫은 것이다.

매덕스도 그랬다. 속전속결을 신조로 여긴다. 자신이 직접 신호를 주기도 한다. 공을 던지고 뒷걸음질 치면 다음 공은 싱커, 발로 흙을 고르면 체인지업…. 뭐 그런 식의 약속을 정해 놓는다.

늑장 부리는 포수 질색이다. 대놓고 F-워드 한 바가지는 일상이다. 사인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던지기도 한다. 그래서 손가락이 부러진 포수도 있다(하비 로페즈).

임찬규도 비슷한 느낌이다. 리듬, 템포.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 흔히 기교파라고 부르는 피네스(finesse) 유형의 투수들이 그렇다.

삼진? 물론 좋다. 그런데 그걸 하려면 3개 이상 던져야 한다. 그보다는 공 1개로 땅볼을 유도하는 게 낫다. 그게 훨씬 효율적이다.

마 교수의 지론도 같다. 덕분에 9회까지 100개도 안 던지고 끝내는 경우도 생긴다. 매덕스 혹은 매덕스 게임이라고 부르는 일이다. 임찬규가 3월 26일 달성한 완봉승(한화 전)도 정확히 100구로 이뤄낸 기록이다.

물론 이런 류의 투수들이 겪어야 할 숙명이 있다. 이른바 디스카운트다. 다른 말로 하면 저평가다.

임찬규도 그렇다. 실적과 실제에 비해 여전히 큰 신뢰를 얻지는 못한다. ‘몇 번 그러다가 말겠지.’ ‘솔직히 저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왠지 늘 불안하지.’ 그런 갸웃거림이 떠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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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다> 역시 마찬가지다. 폰세와 맞대결에도 대다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설마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몰랐다. 깊이 반성한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역시 단짝이 해야 한다. ‘톰과 제리’에서 톰 역할을 맡은 차명석 단장의 말이다.

“(100구 완봉승에 대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게 참….(헛웃음) 믿어지지가 않는다. 구속의 시대에 홀연히 나타나서, ‘공은 이렇게 던지는 것이다’라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준 경기였다. 내용만 보면 너무나 완벽하고, 너무나 훌륭하다.”

물론 여기서 끝내면 톰이 아니다.

“최근에 본 것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투구였다. 갈수록 좋아지는 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주인공이 임찬규냐 이거다.” (웃음)

임찬규 기록 (6월 20일 현재)

14경기 등판, 8승 2패, ERA 2.61 – 다승 공동 4위, ERA 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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