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돌아온 <로드테스트> 자동차 디자이너 인물열전. 오늘 소개할 인물은 자동차 마니아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다. 그는 수퍼카부터 대중성 짙은 자동차까지 다양한 양산차를 디자인하며 자동차 디자인 업계의 ‘거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시간에는 그의 일생과 작품을 조명해 본다.
글 최지욱 기자
사진 각 제조사, 최지욱

조르제토 주지아로는 1938년 8월 7일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주의 가레시오(Garessio)에서 태어났다. 석회를 바른 벽에 석회가 마르기 전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Fresco)’화 화가인 할아버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예술적 감각을 익히며 유년기 시절을 보냈다. 1952년에는 골리아(Golia) 디자인 학교에서 미술과 산업 디자인 등을 공부했다.


당시 주지아로는 자동차 디자인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1955년 주지아로를 가르치던 교수 한 명이 “이 정도 미술 감각이라면 자동차 업계에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라고 조언하면서 자동차 디자인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주지아로는 작품 일부를 학교 전시회에 출품했다. 당시 전시회에는 교장의 조카였던 피아트의 기술센터 소장 단테 지아코사(Dante Giacosa)가 있었다. 주지아로의 창의성과 디테일을 높게 평가한 지아코사는 주지아로를 피아트로 스카우트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피아트에 입사한 주지아로는 4년 동안 특수차 스타일링 센터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직속 상사가 그의 작품을 센터장에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낙담한다. 결국 주지아로는 1959년, 피아트에 사표를 낸 뒤 이탈리아 대형 자동차 디자인 회사 베르토네(Bertone)의 오너 누치오 베르토네(Nuccio Bertone)를 찾아간다. 주지아로가 준비한 스케치를 본 베르토네는 그에게 차 한 대를 그려오라고 지시했다.

주지아로가 그림을 제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토네는 다시 주지아로를 불렀다. 베르토네는 “입사 시험용으로 그렸던 디자인 기억합니까? 그 도안 알파로메오에 팔았습니다. 이제부터 나와 함께 일하시죠”라며 주지아로를 스카우트했다. 참고로 주지아로가 그린 차는 훗날 알파로메오 2000이라는 양산차로 태어났다. 그의 작품이 처음으로 세상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주지아로는 1965년까지 6년 동안 알파로메오 줄리아 스프린트 GT(Giulia Sprint GT)와 BMW 3200CS, 페라리 250 GT, 피아트 850 스파이더 등을 디자인했다. 이후 베르토네가 새로운 디자이너를 영입하려는 사실을 알게 된 주지아로는 기아(Ghia)로 둥지를 옮겼다. 1968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디자인 업체 이탈디자인 주지아로(Italdesign Giugiaro)를 설립했다. 이후 그동안의 경력을 살려 수퍼카부터 대중 자동차 등 다양한 분야에 도전했다.



오랜 경력이 증명하듯 주지아로의 작품 리스트는 빼곡하다. 그중에는 클래식 마세라티 기블리와 알파로메오 줄리아 스프린트 GT, 폭스바겐 골프(1세대)와 파사트(1세대), 시로코, 마쓰다 루체, 로터스 에스프리(Esprit), DMC 드로리언 12, 페라리 250 GT, 사브 9000, 란치아 델타(Delta), 피아트 판다(Panda) 등이 있다.




그의 손길은 국산차에도 닿았다. 대우 레간자와 매그너스, 라노스, 칼로스, 라세티, 마티즈, 쌍용 코란도 C, 렉스턴(1세대), 기아 브리사가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현대차의 경우 포니를 시작으로 스텔라, 포니 엑셀, 프레스토, 쏘나타(Y1, Y2), 스쿠프, 엑센트 등을 디자인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 그는 F3~4, D3~4 등 니콘의 여러 카메라와 이탈리아 포르토 산토 스테파노(Porto Santo Stephano)의 산책로 타일 무늬, 베레타 기관총 Cx4 스톰 등 자동차 아닌 다른 사물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심지어 파스타 건면 중 하나인 마릴(Marille)도 그의 작품이다.


주지아로 디자인의 특징은 ‘간결함’이다. 실제로 그가 디자인한 차는 반듯한 직선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 곡선을 적재적소에 넣어 약간의 볼륨감을 더했다. 또한, 몰딩을 포함한 장식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해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었다. ‘생산성 향상’과 ‘기능성’에 중점을 둔 주지아로의 디자인 철학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24일, 우리나라를 찾은 주지아로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는 자신만의 또 다른 디자인 철학으로 ‘지식’을 앞세웠다. “디자인을 배울 때 대부분 학교에서 보고 배우고 따라한다. 여기에 나만의 차별성을 더해야 한다. 특히 자동차는 다양한 규제로 인해 고려할 점이 매우 많다. 관련 규정도 항상 변하는 만큼 새로운 지식을 항상 갖춰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조르제토 주지아로는 화려한 기교 대신 간결한 디자인을 앞세워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 스타일링을 완성했다. 어릴 적부터 몸에 밴 그의 미술 감각과 오랜 시간 동안 쌓은 경력이 낳은 결실이다. 그 결과 1999년에는 자동차 기자 120명이 선정한 ‘20세기 자동차’, 2002년엔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최근 그는 현대차와 함께 포니 쿠페 콘셉트 복원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고령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클레이 모델과 프로토타입 제작까지 모두 직접 참여한다고 전해 이목을 끌었다. 디자인에 대한 열정, 자신이 디자인한 자동차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거장의 손에서 다시 태어날 포니 쿠페 콘셉트의 화려한 부활을 기대해도 좋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