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한 여자들 중에 비상금 통장 하나 없는 사람은 드물다고들 합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남편 몰래 조금씩 떼어 모아 두는 것이지요. 그 통장은 대개 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언젠가 우리 가족이 무너질 때를 대비한 마지막 보루입니다.
부산 영도에 사는 이옥순 씨는 올해 예순넷입니다. 스물아홉에 조선소 용접공이던 박영식 씨와 결혼해 35년을 살았습니다. 영식 씨는 말수가 적고 무뚝뚝했지만, 한 번도 월급날을 어긴 적이 없는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중매로 만났습니다. 첫 만남 날 영식 씨는 다방에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한 시간 동안 다섯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옥순 씨는 그 무뚝뚝함이 오히려 믿음직스러웠다고 합니다. "말 많은 남자보다 묵묵한 남자가 낫다"던 친정어머니의 말을 따랐던 것입니다.
조선소 일은 고되고 위험했습니다. 영식 씨는 한여름에도 두꺼운 작업복을 입고 불꽃 앞에 섰고, 겨울이면 바닷바람에 손이 얼어 터졌습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저녁밥을 먹자마자 곯아떨어지기 일쑤였습니다.
결혼 10년째 되던 해에는 영식 씨가 작업 중 떨어진 철판에 발등을 다쳐 석 달을 입원한 적도 있었습니다. 옥순 씨는 병원 침대 옆에서 쪽잠을 자며 남편을 간호했고, 영식 씨는 깁스를 한 채로 "빨리 나가야 월급 안 깎인다"며 조바심을 냈습니다. 그때 옥순 씨는 이 사람이 평생 가족만 생각하며 살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옥순 씨가 비상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20년 전, 조선소 불황으로 남편 회사가 휘청이던 때였습니다. 하루아침에 동료들이 해고되는 것을 보며 옥순 씨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우리 남편도 언제 저렇게 될지 모른다.'
그때부터 옥순 씨는 동네 시장 반찬가게에서 아침마다 일을 거들었습니다. 김치를 담그고 나물을 무쳐 받은 일당은 한 푼도 쓰지 않고 남편 몰래 만든 통장에 넣었습니다. 생활비에서 조금씩 남은 돈도 꼬박꼬박 그 통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반찬가게 사장님은 옥순 씨의 손맛을 좋아했습니다. 새벽 다섯 시에 나와 배추를 절이고 멸치를 볶으면 한 달에 몇십만 원이 손에 쥐어졌습니다. 남편이 출근한 뒤 나갔다가 남편이 퇴근하기 전에 돌아왔으니, 영식 씨는 아내가 일을 다닌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가끔은 그 돈을 꺼내 쓰고 싶은 날도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계모임에서 해외여행을 간다고 할 때, 백화점에서 마음에 드는 코트를 봤을 때. 하지만 옥순 씨는 늘 통장을 다시 서랍 깊숙이 넣었습니다. '이건 우리 집 비상금이다. 정말 필요할 때 쓰자.'

아이들 둘을 대학에 보내고 결혼까지 시키는 동안에도 통장은 무사했습니다. 등록금이 모자랄 때는 차라리 적금을 깨고 대출을 받았지, 그 통장에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20년이 지나자 통장 잔고는 3천만 원을 넘겼습니다.
영식 씨는 아내에게 그런 통장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척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원래 집안 살림에 대해서는 아내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몇 번인가 남편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은 적은 있었습니다. "요즘 당신 손에서 김치 냄새가 많이 나네." 옥순 씨는 "반찬 많이 해서 그렇지요" 하고 얼버무렸고, 영식 씨는 더 묻지 않았습니다.
옥순 씨에게는 혼자만 아는 소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남편이 퇴직하는 날, 그동안 고생했다며 이 통장을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평생 일만 한 남편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남편은 술자리에서 가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퇴직하면 나무 만지면서 살고 싶다. 쇠는 너무 차갑다." 젊은 시절 목수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조선소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옥순 씨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비상금 통장을 떠올렸습니다.

드디어 영식 씨의 정년퇴직 날이 다가왔습니다. 퇴직 기념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영식 씨는 평소와 달리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저녁상 앞에 앉아서도 숟가락을 들지 않았습니다.
"여보, 왜 그래요. 오늘 같은 날 좋은 일만 생각해야지." 옥순 씨의 말에 영식 씨가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습니다.
"옥순아, 미안하다. 내가 당신한테 말 못 한 게 있다."
영식 씨는 고개를 숙인 채 털어놓았습니다. 5년 전, 고향의 형님이 사업에 실패해 빚 독촉에 시달린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형님이 쓰러질까 봐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퇴직금 중간정산을 받아 3천만 원을 보내 드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받은 퇴직금이 생각보다 훨씬 적다. 당신 고생한 거 알면서... 평생 고생만 시키고 마지막까지 이렇게 돼서 면목이 없다."
그러면서 영식 씨는 형님이 아직도 그 돈을 갚을 형편이 아니라고, 어쩌면 영영 돌려받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덧붙였습니다. 5년 동안 아내에게 그 말을 하지 못해 혼자 끙끙 앓았다고 했습니다. 퇴직 날까지 숨기고 싶었지만, 퇴직금 명세서를 보면 아내가 알게 될 테니 더는 숨길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옥순 씨는 아무 말 없이 남편을 바라보았습니다. 35년 동안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던 남편이 아이처럼 어깨를 떨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서운한 마음보다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밀려왔습니다.
옥순 씨는 조용히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장롱 맨 아래 서랍, 겨울 이불 밑에 20년 동안 숨겨 두었던 통장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남편 앞에 그 통장을 내려놓았습니다.
"여보, 이거 봐요."
영식 씨는 영문을 모른 채 통장을 펼쳤습니다. 빼곡하게 찍힌 숫자들 사이로 마지막 잔액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3천2백만 원. 영식 씨의 눈이 커졌습니다.
"이게... 이게 무슨 돈이고?"

"당신 몰래 20년 동안 모은 거예요. 시장 반찬가게에서 일한 돈이랑 생활비 아낀 거요. 원래는 오늘 당신 퇴직 선물로 주려고 했어요." 옥순 씨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형님 일은 잘했어요. 내가 당신이었어도 그랬을 거예요. 돈은 이걸로 채우면 되잖아요."
영식 씨는 통장을 손에 쥔 채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들고 일어나 자기 작업 가방을 뒤졌습니다. 그리고 낡은 수첩 사이에 끼워 둔 종이 한 장을 꺼냈습니다.
그것은 옥순 씨 이름으로 된 적금 만기 확인서였습니다. 금액은 천오백만 원. 영식 씨가 10년 동안 야근 수당을 따로 떼어 아내 이름으로 부어 온 적금이었습니다.
"당신 무릎 수술비 하라고 모은 기다. 계단 오를 때마다 무릎 붙잡는 거 내가 다 봤다. 퇴직하는 날 주려고 했는데, 퇴직금 이야기 먼저 하느라 꺼내지도 못했다."

두 사람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한참을 웃다가 울었습니다. 35년 동안 서로에게 무뚝뚝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각자의 자리에서 상대방을 위해 몰래 돈을 모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영식 씨가 그 적금을 붓기 시작한 것도 10년 전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옥순 씨가 시장 계단에서 미끄러져 무릎을 다친 뒤 절뚝거리며 걷던 모습을 보고, 그날부로 야근을 자청했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새벽마다 시장에 나간다는 것도, 사실은 그때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둘 다 참 바보 같네요." 옥순 씨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영식 씨도 쑥스럽게 웃었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말 한마디면 될 걸 35년을 숨기고 살았네."
그날 밤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마주 앉아 남은 인생 계획을 세웠습니다. 옥순 씨는 남편의 적금으로 미뤄 온 무릎 수술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비상금 통장으로는 영식 씨가 젊을 때부터 꿈꿔 온 작은 목공방을 차리기로 했습니다. 평생 쇠를 다룬 손으로 이제는 나무를 만지며 살고 싶다던 남편의 소원이었습니다.

퇴직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영도 시장 골목의 오래된 돼지국밥집에 갔습니다. 신혼 시절 월급날마다 한 그릇씩 사 먹던 집이었습니다. 뽀얀 국물에 부추를 듬뿍 얹은 국밥 두 그릇이 나오자 영식 씨가 옥순 씨 그릇에 고기를 덜어 주었습니다.
"35년 동안 고생 많았다, 옥순아." 무뚝뚝한 남편이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습니다. 옥순 씨는 국밥 그릇에 고개를 묻은 채 한참 동안 웃었습니다.
이석원 작가의 산문집 제목 『보통의 존재』처럼,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하루하루와 그 속에 숨은 작은 마음들입니다. 매일 같은 밥상을 차리고 같은 시간에 출근하던 평범한 부부가, 사실은 서로를 위해 가장 특별한 비밀을 품고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부부 사이의 사랑은 말로 하지 않아도 쌓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마음을 꺼내 보여 줄 용기가 필요합니다. 서로를 위해 숨겨 둔 것이 있다면, 너무 늦기 전에 꺼내 놓으세요. 그 순간이 남은 인생을 함께 걸어갈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올가을, 영도 바닷가 언덕 위에 '옥순 목공방'이라는 작은 간판이 걸렸습니다. 수술을 마친 옥순 씨는 공방 앞 평상에 앉아 남편이 깎아 준 나무 찻잔으로 커피를 마십니다. 저 멀리 부산항 위로 노을이 번지고, 남편의 대패질 소리가 바닷바람을 타고 잔잔하게 들려옵니다.
출처 : '보통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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