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기꾼 정말 못 잡아? 뛰는 범죄자 위에 나는 '자금세탁방지법'
눈 뜨고도 당하는 투자 사기
공기관도 꾼들에겐 속수무책
사기 피해 줄일 방안 없을까
특정금융정보법에 묘책 있어
‘금융사 의무’ 이행 신경써야
'특정금융정보법'이라는 게 있다. 흔히 '자금세탁방지법'으로 불린다. 말 그대로 불법으로 형성한 재산을 합법한 재산처럼 보이도록 둔갑하는 행위를 막겠다는 취지의 법이다. 그런데 이 법이 금융투자 사기사건의 피해를 줄이는 데 한몫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뛰는 사기꾼 위에 나는 법망'을 만들 수 있다는 거다. 다소 어려운 법적 이야기를 사례를 통해 풀어봤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범죄는 사기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범죄 147만8272건 가운데 사기 사건은 35만7597건으로 23.7%를 차지했다. 반면 검거율은 2022년 이후 50%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남의 재산을 노리는 범죄가 그만큼 많고, 쉽게 잡히지도 않는다는 거다. 정부기관이나 시중은행들이 툭하면 투자사기를 경고하면서 각종 피해사례를 공유하는 것도 그래서다.
중요한 건 투자사기 피해자들 중엔 신중하게 투자를 결정했는데도 뒤통수를 맞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피해자 가운데 '묻지마 투자'를 했다가 낭패를 본 이들만 있는 건 아니란 얘기다. 사례를 보자.
■ 사례➊ 금융당국 신고업체의 사기 = "여러분이 가진 가상자산을 저희에게 예치하면 이자를 붙여드립니다. 이제 가상자산은 저희에게 맡기세요." 가상자산사업자인 A사는 이런 식으로 가상자산 예치 서비스를 홍보하면서 고객을 끌어모았다. 금융당국에 사업신고도 마친 업체였다. 그런데 A사의 대표는 2021년 8월부터 2023년 6월까지 피해자 2800여명에게 2500억원 상당의 가상자산을 가로챈 혐의(사기)로 지난 4월 재판에 넘겨졌다.
허점은 금융당국에 신고한 사업범위가 달랐던 데 있었다. A사의 사업범위는 가상자산을 보관ㆍ관리하는 게 전부였다. 가상자산을 예치ㆍ운용하는 사업은 애초에 금융당국이 허용한 적이 없었다.
A사는 이런 점을 교묘하게 악용해 투자자들을 속이고 가상자산 투자사업을 벌인 거다. 가상자산을 제대로 운용했을 리 없으니 A사로선 거짓 회계보고서를 만들어 실적을 부풀렸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A사는 말을 조금씩 바꿨다. A사의 대표를 두곤 '가상자산을 빼돌리고 있다'는 의혹이 피어올랐다. 불안감에 휩싸인 몇몇 고객이 가상자산의 출금을 시도하고, A사가 예고도 없이 출금을 중단하자 비로소 사건의 일단이 드러났다. 몇몇 투자자는 A사가 금융당국에 신고한 업체인지까지 확인했지만 말짱 도루묵이었다.
■ 사례➋ 고객 신상 파악의 중요성 = 이번엔 다른 사례를 보자. 이 사례는 더스쿠프가 '크로스파이낸스 파문(통권 614~615호)'이란 기획물에서 다룬 내용이다. B사는 투자자의 자금을 소상공인에게 대출해준 다음 수익이 발생하면 투자자들과 나눠 갖는 사업을 펼쳤다.
이른바 '온라인투자연계금융업'이었다. 급전急錢이 필요한 소상공인들이 신용카드 거래에서 발생한 '매출채권'을 조금 싼 가격에 넘겨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를 겨냥한 서비스다.
매출채권은 신용카드 거래에 빗대면 쉽게 이해된다. 소비자 A씨가 2000원짜리 제품 한개를 신용카드로 샀다면, 매장 주인은 2000원만큼의 매출채권을 얻은 셈이다. 카드사는 수수료를 뗀 다음 대략 일주일 후 대금을 해당 매장 주인에게 건넨다.
B사의 투자상품은 이처럼 안전한 소상공인의 매출채권이다. 소상공인이 갖고 있는 2000원짜리 매출채권을 2000원에 사들이고, 소상공인에겐 '할인한 값'에 현금을 준다. 할인율이 10%라면 1800원을 주는 식이다. 이후 카드사가 2000원의 대금을 지급하면, 수수료를 제한 금액이 수익으로 남는다.
구조가 명확하고 매출채권 자체가 안전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투자사업이었다. 게다가 B사는 한국거래소의 자회사가 대주주로 있는 곳이었다. 충분히 신뢰할 만했다.
그런데 투자자들은 현재 800억원대의 피해를 입고 법적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렇게 간단한 구조에서 B사의 사업 파트너였던 곳이 매출채권 모집업체와 한통속이 돼 B사에 결제대금을 지급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이로 인해 피해를 본 한 투자자는 "B사가 사업 파트너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지 모른다"고 의문을 내비쳤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문제가 제도권 안에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금융당국이 "좀 더 적극적으로 투자사기에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근거법도 있다.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에서 규정하는 자금세탁방지 의무 규정이다.
이 법은 은행ㆍ보험사ㆍ조합은 물론 투자매매업자ㆍ투자중개업자ㆍ집합투자업자ㆍ신탁업자ㆍ가상자산사업자ㆍ온라인투자연계금융업자처럼 '금융회사 등'으로 묶이는 이들에게 몇가지 의무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무엇보다 사업자는 거래처 종사자의 신원(실질적인 지배자나 소유자의 신원을 의미)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대규모 현금거래나 불법재산으로 의심되는 거래가 발생한 경우엔 금융정보분석원에 보고해야 한다.
때에 따라선 금융거래의 목적과 거래자금의 원천도 보고하도록 돼 있다. 가상자산사업자를 고객으로 둔 경우엔 각종 신고나 변경까지 보고해야 한다. 이렇게 취합한 정보들은 검찰이나 경찰ㆍ국세청을 비롯한 사정기관과 공유한다. 각종 불법재산들이 깨끗한 재산으로 '세탁'되는 걸 막기 위해서다.
여기서 주목할 건 이런 의무 규정만 잘 활용하면 금융투자 사기피해 규모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다시 앞서 언급했던 사례에 적용해보자.
첫번째 사례에서 꼬집은 A사는 금융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사업들을 버젓이 홍보하고 실행했다. '신고 외 사업'을 펼쳤으니, 금융당국으로선 충분히 서비스 중단을 요청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두번째 사례는 'B사가 협력업체와 얽힌 거래처 종사자의 신원'만 제대로 확인했어도 의심스러운 정황을 포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금세탁을 방지해야 하는 금융회사들의 의무 규정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지난 6일 이정문 더불어민주당 의원(정무위원회)이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9년 11월부터 2024년 8월까지 5년간 특금법을 적용받는 기업들이 특금법상 의무를 다하지 않아 제재를 받은 건수는 156건(109개 업체)에 달했다. 같은 기간 이들에 부과한 과태료는 321억2840만원이었다.
위반 사례를 보면 고액현금거래보고(CTR) 위반이 85건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은 고객확인제도(CDD) 위반(30건), 강화된 고객확인(EDD) 위반(12건), 의심거래보고(STR) 위반(11건), 검사방해나 의심거래 감시체계 구축운영의무 위반 등 기타(18건) 순이었다.
통계를 좀 더 세밀하게 확인해보자. 156건 중 98건(64개 업체)은 2023년 이후 제재 건수다. 2023년 이후 위반이 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올해는 1~8월 제재 건수만 50건이다. 이 시기 과태료는 136억430만원이었다. 업체당 2억1256만원, 제재 건당 1억3881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 셈이다. 위에 언급한 A사 역시 2023년에 특금법상 의무를 6가지나 위반해 18억9600만원의 과태료를 물었다.
홍성준 약탈경제반대행동 대표는 "과거 론스타 사태를 일으킨 '검은머리 외국인'들의 신원을 금융사들이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면 그 어떤 관료들이 이상한 장난을 칠 수 있었겠는가"라면서 "마찬가지로 금융사들이 거래하는 이들의 정확한 신원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금융투자 사기 피해 리스크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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