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허리춤에서 연달아 ‘펑 펑’…삐삐 폭발 레바논 대혼란
레바논 전역과 시리아 일부에서 이스라엘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무선 호출기(삐삐) 폭발 사건이 일어나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 조직원뿐 아니라 10살 소녀 등 최소 12명이 사망하고 약 2800명이 다쳤다. 몸에 가까이 두고 이용하는 삐삐가 폭발해 눈과 손, 얼굴과 배 등에 중상을 입은 이들이 200명가량이다.
헤즈볼라 조직원들이 사용하는 삐삐가 레바논과 시리아 전역에서 17일(현지시각) 오후 동시에 폭발해 최소 12명이 사망하고 약 2800명이 다쳤다고 피라스 아브야드 레바논 보건부 장관이 밝혔다고 아에프페(AFP) 통신 등이 보도했다. 이 중 200명가량은 중태로 알려졌다.
사건 발생 이후 레바논 정부는 시민들에게 삐삐를 버리고 병원에는 최고 경계 태세를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헤즈볼라를 지원해온 이란의 적신월사 소속 의사와 간호사 24명도 레바논에 도착했다고 시엔엔(CNN)은 보도했다.
폭발 당시인 오후 3시30분께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의 한 슈퍼마켓에서 과일을 고르던 한 남성의 가방 안에 있던 호출기가 폭발하면서 남성이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이 담긴 영상 등이 소셜미디어에 올라오고 있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한 대학교 의료센터 밖에 있던 한 목격자는 “마치 좀비 도시인 것처럼 보였다”며 부상자들이 도로에 흩어져 누워 있었고, 친구들도 부상을 입었다고 시엔엔에 말했다. 레바논 병원 곳곳에서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이송돼 병원이 환자로 넘쳐나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 레바논 정보기관 관계자 말을 인용해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가 몇개월 전에 대만제 삐삐 5천여대에 폭발장치를 심었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은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있으며 미국은 자국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헤즈볼라는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해주겠다며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을 다짐하고 있어,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사이 전면전 우려까지 나온다.
이날 오후 헤즈볼라 조직원들이 갖고 있던 무선 호출기가 동시에 폭발했다. 폭발은 수도 베이루트를 비롯해 남부 도시 티레, 서부 지역 헤르멜 등 레바논 전역에서 발생했다. 익명을 요구한 헤즈볼라 관계자는 월스트리트저널에 헤즈볼라 조직원 중 일부가 호출기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껴 폭발 전 이를 폐기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레바논 보건부는 전국 병원에 최대 경계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하는 한편, 시민들에게는 되도록 무선 통신 기기를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헤즈볼라의 고위 조직원들은 지난 수년 동안 휴대전화 대신 호출기를 사용했다”면서 “최근 들어서는 일반 조직원들도 호출기를 이용해 연락을 주고받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숨진 10살 소녀도 아버지 옆에 서 있다가 아버지의 호출기가 폭발해 사망했다고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이 전했다. 헤즈볼라가 사용 중인 호출기 기술은 낮은 기술 수준으로 보인다고 외신들은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 등 관계자들 보고를 인용해 레바논으로 수입된 3천개 이상의 대만산 호출기(골드 아폴로 AP924 등) 안에 폭발물을 숨겼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폭발물 무게가 1~2온스(약 30~60g)에 불과하고 각 호출기 배터리 옆에 심어져있었다. 폭발시키기 위해 원격으로 작동할 수 있는 스위치도 내장되어 있었다. 폭발하기 전 몇 초 동안 알람이 울렸다고 한다”고 뉴욕타임스에 전했다. 헤즈볼라 지도자인 하산 나스랄라는 이스라엘의 도청 등 첨단 기술을 우려해 낮은 기술 수준의 호출기 사용을 권장해왔으나 이를 통한 공격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보도를 보면 부상당한 사람 중에 베이루트 주재 이란 대사인 모즈타바 아마니가 포함된다. 헤즈볼라는 조직원 2명이 사망했다면서 헤즈볼라의 의원 알리 아마르의 아들도 폭발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지난달 말 이스라엘이 베이루트에서 최고 군사 지휘관인 푸아드 슈쿠르를 암살한 것에 대해 헤즈볼라가 제한적으로 대응해왔지만, 정면 충돌은 없었다. 미국 정부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레바논에 대해 지상 침공을 지시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해왔으나 현실이 됐다. 가디언은 “이번 폭발로 지난 3주 동안의 불안한 평화가 깨졌다”고 보도했다.
매튜 밀러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가자 휴전 회담에 미칠 영향에 대해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말했다. 그는 브리핑에서 미국은 관여하지 않았으며 누가 책임이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이번에도 이 공격이 자신들의 소행인지를 밝히지는 않았다. 다만 공격 이후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요아브 갈란트 국방부 장관, 기타 안보 책임자들이 텔아비브 키리아 기지에 있는 국방부 본부에서 회동했다고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전했다. 헤르지 할레비 이스라엘방위군(IDF) 참모총장은 “모든 분야에서 공격과 방어에 대한 준비에 중점을 두고” 고위 간부들과 회의를 했다고 밝혔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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