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되어버린 밤_사유와 자유의 시간

출처 : 크레타 서점

서점을 시작한 이후 가장 마음 편했던 것 중 하나는, 매일 아침 옷장 앞에서 허둥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계절이 바뀌어도, 날씨가 변해도, 오늘은 뭘 입을지 고민하지 않는다. 언제나 왼쪽 가슴에는 크레타 로고가, 등에는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묘비명이 새겨진 ‘크레타 유니폼’을 꺼내 입기 때문이다. 샤워를 마치고 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옷걸이에서 순서대로 유니폼을 집어 드는 일은 이제 익숙하고도 자연스럽다.

한 인터뷰에서 마크 저커버그가 매일 같은 옷을 입는 이유를 들은 적이 있다. 의사결정에 쓰는 에너지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는 말에, 나는 왠지 모르게 내 선택이 합리적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나도 그와 같은 이유로 일상의 효율을 위해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거라고.

물론, 실제 이유는 조금 달랐다.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과 비교해 반 토막이 된 수익을 감당하기 위해 가장 먼저 줄인 지출이 ‘의류비’였기 때문이다. 옷을 사지 않자, 옷장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줄었고, 무엇보다 마음이 단출해졌다. 불필요한 선택을 하지 않게 되자 내 하루는 더 간결해졌고, 그 안에서 얻는 평온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그런 내 일상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한 사람이 있다. 그녀는 단 한 번의 만남을 위해 ‘그날만 입을 수 있는 복장’을 준비해왔다. 소설가 함정임. 그녀와 처음 만난 건, 작년 여름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북토크에서였다.

출처 : 크레타 서점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북토크 中

“이 사진은 괜찮으실까요? 카잔자키스 묘지, 대성곽 위에서 찍은 것이긴 한데요.”

청춘 시절부터 그녀를 사로잡았던 영혼들의 흔적을 따라 북대서양의 아일랜드부터 러시아, 지중해를 거쳐 에게해의 크레타까지,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선 예술가들의 묘지를 따라가는 순례기는, 마치 오래된 편지처럼 고요하고 절절했다. 조르바를 만나고, 카잔자키스를 따라 크레타의 바다를 마주했던 여정을 읽고 있자면, 그녀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떠나, 마음을 품고 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섭외 요청에 흔쾌히 응답해 준 그녀는, 포스터에 쓸 사진 한 장조차 무심히 고르지 않았다. 굳이 크레타에서 찍은 사진을 골라 보내온 그녀의 마음엔, 이미 이 만남에 대한 설렘이 담겨 있었던 것 같다. 북토크 당일, 그녀는 푸른 지중해를 닮은 푸른색 스트라이프 블라우스와 보터햇을 쓰고 등장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멋을 낸다’고 표현하겠지만, 내게 그 모습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그녀는 단지 작가로서 그 자리에 참석한 것이 아니었다. 크레타에 올 독자를 위한 준비를 마친 ‘사람’으로, 이 자리를 기대하고 기다린 흔적을 고스란히 입고 온 사람이었다.

그날, 그녀는 독자가 직접 책 속 문장을 낭독하는 참여 이벤트를 제안했고, 크레타산 올리브를 선물로 준비해왔다. 그 장면을 지켜보며 문득 대학 시절 배운 ‘TPO(Time, Place, Occasion)’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상황에 맞는 복장과 행동, 그건 단순한 격식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방식이라는 것을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출처 : 크레타 서점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북토크 中

연초, 그녀에게서 반가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프랑스 앙티브에 다녀왔다며, 니코스 카잔자키스가 10년 동안 살았던 집을 촬영했고, 2월 말에 신간 소설이 출간될 예정이라 했다. 짧은 메시지였지만 그 안엔 마치 ‘다시 만나자’는 인사처럼,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약속처럼, 2월 말 그녀는 잊지 않고 다시 연락을 주었다. 3월 첫 주, 신간 소설 『밤 인사』가 출간된다는 소식과 함께. 그녀는 출판사에 부산 북토크 장소로 크레타를 추천했다고 덧붙였다. 에세이스트 함정임이 아닌, 소설가 함정임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지난 만남의 여운이 깊어서였을까. 나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올까. 그리고 마치 내 마음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세상의 모든 밤을 향해, 잘 자요.”라고 속삭이는 듯한 『밤 인사』의 분위기를 닮은 연분홍 셔츠를 곱게 갖춰 입고 크레타에 나타났다. 조용하고도 미묘한 충동처럼, 책 속 이야기의 여운을 고스란히 입은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특별했던 건, 그녀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북토크에 함께 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교수와 학생이 아닌, 작가와 독자의 관계로 함정임 소설가를 만나고 싶어 왔습니다.” 그 말은, 글로 이어진 마음이 새로운 이름을 얻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이름 없는 마음들이, 함께 자기만의 밤 인사를 나누기 위해 조용히 모였고, 그것은 북토크라는 자리의 가장 깊은 이유가 되었다.

출처 : 크레타 서점 <밤 인사> 북토크 中

진행자로서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보조했다. 자연스럽게 질문들이 오갔다.

“작가님, 『밤 인사』는 단편 「어떤 여름」 속 미나와 장의 이야기를 근간으로 새롭게 고쳐 쓰신 작품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작품을 다시 쓰게 된 계기가 있으셨을까요?”

“제목을 『밤 인사』로 정하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잘 자요’라는 말이, 그 밤의 감정을 가만히 감싸안듯 다가왔어요.”

“또, 이번 소설에도 여행이라는 요소가 깊게 스며있습니다. 발터 벤야민, 조아킴 롱생, 폴 발레리… 누군가의 흔적을 따라 걷는 일이 작가님께는 어떤 의미인지요?”

그녀는 하나하나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대답을 들려주었다. 마치 책의 행간을 조심스레 짚어가듯,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이전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북토크 때 크레타 올리브를 정성껏 준비해 주었던 그녀는, 이번 『밤 인사』를 위해 또 다른 시간을 품은 선물을 가져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열두 시간의 조약돌’을 인상 깊게 읽은 한 독자를 위해, 직접 주워온 조약돌 하나를 곱게 포장하고, 작은 리본을 묶어 건넸다. 그 조약돌은 어쩌면 소설이 되어버린 밤의 파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 밤을 조심스레 주워 담아, 마음을 다해 감싸 건넸다. 자신의 시간을 애정을 담아 타인에게 건넬 줄 아는 사람이었다.

출처 : 크레타 서점 <밤 인사> 북토크 中

“누르면 소설이다. 누르면 소설이 돼요.”

그녀는 소설을 써나가는 과정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이 대답은 글을 쓰게 만든 발화점이 되었다. 그렇게 단호하고도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대답을 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얼마나 깊이 삶을 살아내야 하는 걸까. 짧은 문장 속에 담긴 응축된 감정과 진심의 무게를 헤아리며, 나도 모르게 그녀의 삶을 상상해보았다.

이 자리를 준비하고, 진행하고, 마무리하는 모든 순간에 느껴진 그녀의 태도는 하나의 소설을 떠올리게 했다. 북토크에 등장하는 복장, 사진 하나를 고르는 신중함, 독자에게 건네는 조약돌 선물, 학생들과 함께 만든 밤의 기억들. 그 모든 것들이 단지 ‘행위’가 아닌 ‘태도’였고, 그 태도는 곧 그녀가 살아내는 문장이었다. 소설을 얼마나 사랑하고, 어디까지 진심인지, 우리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확인할 수 있었다.

출처 : 크레타 서점 <밤 인사> 북토크 中

그날 밤, 나는 마음 깊은 곳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크레타를 가꾸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정작 나 자신을 가꾸는 일에는 너무 인색했던 것은 아닐까. 오래된 허리 통증도, 어느새 불어난 뱃살도, 소화불량도, 다 괜찮다고만 여기며 넘겨왔다. 하지만 ‘괜찮음’ 뒤에 방치되어버린 마음의 조각들이 분명 있었음을, 그녀의 태도를 통해 깨달았다.

단정히 입은 셔츠 하나가, 잘 묶인 리본 하나가, 나를 초대받은 사람처럼 느끼게 해준 그 경험처럼, 나 또한 나와 크레타를 위해 그렇게 해줘야 했던 것이다. 그녀가 내게 가르쳐준 건 단지 ‘예의’나 ‘격식’ 같은 것이 아니었다. 단 한 번일지라도, 그 사람을 위해 준비하고, 그 시간을 사랑하는 법. 그리고, 그걸 위해 가장 먼저 갖춰야 할 복장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

소설이 되어버린 밤, 마음을 눌러 생겨난 이야기의 파편들을 곱게 주워 담아, 그녀가 그랬듯 정성껏 포장해보고 싶어진다. 단 하루의 마음이라도 그날만 입을 수 있는 복장처럼 꺼내 입는다면, 우리는 그 하루를 조금 더 특별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사람만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정한 밤 인사를 건넬 수 있지 않을까.


* 사유와 자유의 시간골목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책과 사람이 만나 펼쳐지는 소소하지만 진솔하고, 일상적이지만 이상적인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 글쓴이 - 강동훈부산 전포동에서 '크레타'라는 작지만 단단한 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책을 잘 파는 서점인이 꿈이자 목표입니다.

* 인스타그램 : www.instagram.com/bookspace.cr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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