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의 대통령 견제는 헌법적 책무
한국의 민주주의가 대통령 1인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국회 동의를 계기로 행정부와 입법부 간 선량한 중재자 역할을 맡고, 국무위원 제청권과 해임건의권을 통해 ‘정실 인사’를 막고, 내각 통할권을 통해 국정의 조정자로 기능하는 강(强)총리가 현실적 해법 중 하나다.
‘비오는 날의 나막신.’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최초의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에게 당대 사람들이 붙인 별명이다. 나막신은 비오는 날 진 땅에서 신기 위하여 나무를 깎아 만든 굽 높은 신발이다. 매우 유용하거나 요긴한 걸 뜻한다. 김홍집의 능력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겠지만, 이 별명이 어쩌면 우리 정치사에서 총리가 지니게 되는 슬픈 운명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있는 둥 없는 둥 하다가 비가 많이 올 때 대통령을 대신해 욕을 먹거나 책임을 지는 ‘매 맞는 소년’이 바로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다.
밖에서 보면 총리는 그야말로 계륵이다. 먹기는 그렇고 남 주기도 싫은 계륵같이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그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에서 보면 총리는 정부의 명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총리가 정부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총리냐에 따라, 또는 총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정의 모양이 많이 달라진다. 보기보다 매우 중요한 자리가 총리직이다. 대통령이 못해도 총리가 잘하면 최소한의 국정 안정은 유지할 수 있다.
우리 헌법에서 정한 총리의 지위와 권한은 문언상 막강하다. 총리를 표현할 때 쓰는 ‘일인지하 만인지상’(한 사람의 아래, 만 사람의 위)이란 표현이 말해주듯 행정부의 넘버2다. 국무위원 제청권과 해임건의권을 갖고, 내각 통할권도 있다.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위상도 높다. 물론 제약도 붙어 있다. 헌법에 따르면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보좌’기구에 불과하며 각 부처를 통할할 때도 “대통령의 명을 받아” 해야 한다. 대통령은 이 제약을 이용해 총리의 위상을 낮추고, 권한을 짓눌렀다.
주지하듯 처음 헌법을 만들 때 헌법기초위원회가 제시한 권력구조는 내각제였다. 그런데 이승만의 반대로 급하게 대통령제로 바꾸면서도 국무총리직을 없애지 않고 다만 그 권한만 줄였다. 내각제파와 대통령제파가 타협한 결과였다. 대통령 1인 독재를 방지하고자 국무총리를 대통령 견제장치로 삼으려 한 것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정치세력이 대통령과 국무총리 자리를 나눠 가져서 연합정치를 하라는 의도도 담겨 있다.(박혁, ‘헌법의 순간’)
이런 사정 때문에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임명할 때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지를 두고 논란이 일어났다. 헌법 초안에 국회 동의 요건은 없었다. 표결 과정에서 수정안이 제기됐다. “국민의 의사에 합치하는 정치를 하려면 정부와 국회는 긴밀한 연계성이 있어야 하므로 국무총리의 임명을 대통령에 일임하지 않고 국회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게 좋겠다는 게 이유였다. 헌법 초안을 작성할 때 전문위원으로서 큰 역할을 한 유진오 박사도 이에 동의하고 나섰다. 국회와 정부의 관계가 “원만해지고 밀접해질 것”, 즉 요즘 표현으로 협치의 제도적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국회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것은 상당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정부 이인자의 임명에 국회 동의라는 족쇄를 채운 것은 대통령제의 구조적 문제점인 행정독재의 위험과 의회와 정부 사이의 교착상태를 해소하려는 한국형 민주공화제의 묘수다.”(김종철, ‘국무총리의 존재 이유’) 특히 여소야대에서는 이 동의 요건이 총리에게 상당한 운신의 폭을 제공할 수 있다. 대통령 마음대로 총리를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제헌의회에서의 용어는 제청이 아닌 ‘제천’이었다) 또한 허용 여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당시 김재학 의원이 이렇게 주장했다. “국무위원을 국무총리의 제천에 의해서 대통령이 임명한다면 그야말로 대통령은 허수아비요, 국무총리의 독재일 것입니다.”(안도경 등, ‘1948년 헌법을 만들다’) 국회 동의는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된 반면 제천은 부결됐다. 1952년 개정된 헌법에서 비로소 명문화된 제청권은 총리 독재 운운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이다.
헌법에 정해진 총리직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 ‘비서실장’ 정도로 격하됐다. 신우철 교수에 따르면, 이승만은 임시정부 시절 대통령으로서 총리 이동휘와 권력 경쟁을 벌였던 경험의 학습효과로 강한 총리로 인해 대통령이 뒷방 영감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국무총리를 원하지 않고 있으며 의원들은 이에 반대할 것이오. 그러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다만 대통령을 보좌하는 의미에서의 권한 없는 총리가 있을 수 있을 것이오.” 이승만의 이 말처럼 역대 대통령은 총리에게서 권한을 빼앗아 버렸다.
이승만의 이런 태도 탓에 독립운동가로서 혁혁한 명성을 지닌 초대 총리 이범석조차도 “대통령을 보필하여 대통령의 정견을 충실히 실천에 옮기는 것”으로 총리의 역할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보좌와 견제 중 견제는 사라지고 보좌에만 충실한 소(小)총리론이 자리 잡게 되었다. 비유하자면, 미국의 대통령은 헌법 입안자들이 의도한 바와 다르게 권력을 키워가면서 ‘제왕적’이란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강해졌다면, 한국의 총리는 의도한 것과 달리 처음부터 권한 행사를 제약받으면서 ‘얼굴마담’이란 멸칭으로 불릴 정도로 약해졌다.
총리의 헌법적 지위와 권한을 새삼 일깨운 이는 이회창 총리였다. 약 4개월밖에 재임하지 않았지만 그는 총리의 법률적 권한을 행사하려 했고, 이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과 충돌했다. 그는 “대통령에 대한 통보도 없이 행정 각부에 지시를 내리는가 하면, 자기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에게 직보하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대통령의 담화와 뉘앙스가 살짝 다른 담화를 발표한 적도 있다. 그러다가 김영삼 대통령이 총리가 주재하는 남북고위전략회의를 무시하고 총리를 배제한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를 설치하자, 이회창은 ‘법대로’ 원칙을 무기로 대통령과도 싸웠다.”(김종성, ‘두 번이나 보수의 선택을 받은 이회창’)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의 안건은 관계 장관이 사전에 총리의 승인을 받아 시행하라는 지시를 내려 대통령의 지시에 정면으로 맞섰고 마침내 사퇴했다. 총리직이 생명을 얻는 모멘텀이었다.
제헌 논의와 헌법 조항, 역대 총리의 행태 등을 두루 살펴보면, 총리에게 주어진 대통령 보좌와 견제의 기능 중에서 후자의 기능이 점차 강화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많은 총리가 보여준 모습, 그래서 우리가 익숙한 총리의 기본 모델은 의전·대독·방탄 총리였다. 그러다가 민주화 이후 시대 흐름에 발맞춰 견제에 나서는 총리가 등장하곤 했다. 이때 등장한 개념이 책임총리다. 노무현 정부 때 이해찬 총리는 제청권자로서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임명에 반대하기도 했다. 제헌국회 또는 헌법이 그리는 총리의 온전한 역할 모델은 김대중 정부에서 구현됐다. 대통령 김대중과 총리 김종필은 연정의 파트너였고, 따라서 총리는 오너십을 가진 실권 총리였다.
가끔 퇴행하기도 하지만 이제 총리직의 강화는 거역하기 어려운 추세가 됐다. 대통령의 제왕적 행태나 권력 사유화를 막을 필요성, 국회의 권한 확대에 따른 정부·국회 간 협의 필요성이 주된 이유다. 그래서 대선후보 공약 리스트에 책임총리론이 빠지지 않는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대통령 1인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국회 동의를 계기로 행정부와 입법부 간 선량한 중재자 역할을 맡고, 국무위원 제청권과 해임건의권을 통해 ‘정실 인사’를 막고, 내각 통할권을 통해 국정의 조정자로 기능하는 강(强)총리가 현실적 해법 중 하나다.
과연 이런 총리의 등장이 가능할까? 오직 ‘손타쿠’(윗사람의 눈치를 보며 알아서 긴다는 뜻의 일본어)에 능하고, 국정 운영에서 센터 욕심이라곤 1도 찾아볼 수 없는 사실상 총리 부재 시대! 총리가 직언이나 견제, 협치의 가교는커녕 국회에서 대통령에 빙의해 버럭 고함을 지르며 싸우는 악역을 자처하는 지금! 총리에 의한 대통령 견제라니, 헛된 기대 아닐까?
이철희 | 방송에서 정치평론을 하다 정치에 나서 20대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 마지막 정무수석을 지냈다. 2020년 ‘대통령 탄핵 결정요인 분석: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 비교’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인자를 만든 참모들’ ‘정치가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등의 책을 냈고,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등의 역서가 있다. 우리 정치가 어쩌다 이렇게 나빠졌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나아질 것인지 등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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