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음식을 연구하는 온지음 맛공방에서 고려시대 대표 음식들을 재현했다. 온지음 박성배, 조은희 셰프. [사진 아름지기]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목표로 의·식·주 생활문화의 현대화를 연구해온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2022년 기획전시 ‘고려味려: 추상하는 감각’을 시작했다. 아름지기는 매년 의식주를 테마로 한 기획전시를 열어왔다. 유물·사료 연구를 통해 우리 문화의 정수를 탐구하고 현대 작가들과 함께 일상의 쓰임에 맞게 재해석한 결과물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올해의 주제는 고려의 우아하고 미려한 식문화다. 신연균 아름지기 이사장은 “다양한 사료들을 토대로 고려시대의 미려한(味麗이자 美麗인) 식문화를 소개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고려시대를 추상하여 감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며 “천 년 전 고려 식문화가 지금 우리의 감각과 얼마나 가깝게 맞닿아 있는지 살피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고려는 ‘코리아(Korea)’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릴만큼 500년 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나라다. 최고 수준의 문화수준을 향유했던 만큼 고려청자를 비롯한 차·채식·주류문화 또한 발달했다. 하지만 실존 유물과 관련 문헌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고려 식문화 연구가 활발하진 못했다. 아름지기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꼭 해야만 한다는 신념으로 고려시대, 조선시대 시·회화 그리고 다양한 사료 속에 남아 있는 식문화 조각들을 찾아 ‘추상(여러 가지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 따위를 추출하여 파악하다)’하면서 고려시대의 감각적인 문화들을 재해석해냈다.
고려청자·술병·다구 등도 선보여
우리음식을 연구하는 온지음 맛공방에서 고려시대 대표 음식들을 재현했다. 곤포곽(다시마와 미역) 부각. [사진 아름지기]
전시 내용은 고려인들이 먹고 마셨던 음식과 그 음식을 담아냈던 상차림,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1층부터 3층까지 총 4개의 공간으로 나뉜 전시장에선 고려시대 음식을 대표하는 ‘개성음식’의 식재료와 특징을 소개하는 영상, 현대작가 10인이 청자·금속·유리 등을 활용해 고려시대의 우아한 문양과 형태 그리고 아름다운 색을 재현하고 재해석한 그릇·술병·다구 등의 작품 200점을 볼 수 있다.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선·형·색’ 공간에선 고려시대 유물의 조형 요소들을 재해석한 작품들이 선보인다. 김혜정 작가는 태토의 변주를 통해 노랑·초록·비색 등 다양한 빛깔을 가진 청자와 검정 흑유 자기를 만들었다. 이은범 작가는 불교국가였던 고려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해 연꽃과 연잎 모양을 비대칭으로 조형한 청자 그릇을 제작했다. 양유완 작가는 유리와 은박을 활용한 술병과 술잔을 선보인다. 고려에서 유리를 직접 생산하진 않았지만 국제무역이 발달했던 만큼 주변국에서 건너온 고려시대 유리 유물이 여럿 남아 있다.
우리음식을 연구하는 온지음 맛공방에서 고려시대 대표 음식들을 재현했다. 금채(상추)등의 채소를 손잡이가 달린 청자 접시에 담았다. [사진 아름지기]
‘국제적이고 세계적인 고려음식, 그리고 술과 어울리는 개성음식’ 공간에선 국제무역항으로 이름을 날렸던 벽란도 일대의 객점과 주점, 다점의 상차림을 볼 수 있다. 고려가요에 등장한 쌍화점(만두가게)과 조선후기 회화 ‘태평성시도’를 참고해 꾸민 공간에는 류연희·양유완·이인진 작가가 은·유리·청자를 이용해 제작한 주기(酒器)들이 전시됐다. 모니터를 통해 쌍화만두·설렁탕·절창(순대) 등 고려시대 대표 음식과 개성소주·봉래주(봉래춘) 등의 술, 그리고 이에 잘 어울리는 보김치·설야멱적·조랭이 떡국 등의 소개 영상을 볼 수 있다.
우리음식을 연구하는 온지음 맛공방에서 고려시대 대표 음식들을 재현했다. 두부나물밥. [사진 아름지기]
‘자연적이고 지나치지 않은 채식상차림과 발효음식’ 공간은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의 채식문화와 차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헌정 작가는 청자로 만든 구절판을 비롯해 청자기와에서 영감을 얻은 접시 등을 제작했다.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계승한 아름지기 한옥공간에선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찻상차림을 볼 수 있다. 강석근 작가는 자연친화적인 나무와 돌, 옻칠을 활용해 자연을 모티프로 삼은 고려 찻상을 제안했고 강웅기·류연희 작가는 섬세하고 화려한 금속에 돌과 나무를 결합시켜 고려 주자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했다. 모니터에선 두부·토란·금채(상추)·곤포곽(미역과 다시마)·인삼·두부 등 고려시대 대표적인 식재료와 이들을 이용해 조리한 개성음식들을 살펴볼 수 있다.
우리음식을 연구하는 온지음 맛공방에서 고려시대 대표 음식들을 재현했다. 기와모양 청자접시에 담긴 인삼정과. [사진 아름지기]
마지막으로 ‘미려하고 이상적인, 현대화한 고려상차림’ 공간에선 고려인의 방에 방문한 듯한 기분으로 전시 참여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마른안주, 봉래주(봉래춘), 송어만두, 어육김치냉채, 개성식 애호박선, 전복꽃찜, 홍해삼, 밀천신(햇밀로 만든 밀전병), 회, 개성무찜, 열구자탕(신선로), 개성물경단, 토란병 등으로 구성된 ‘현대화한 고려 상차림’ 영상은 보는 내내 군침을 돋운다.
종교·예술·문학 토대 창조적 해석
우리음식을 연구하는 온지음 맛공방에서 고려시대 대표 음식들을 재현했다. 연꽃 잎 모양 은접시 위에 담긴 만두 [사진 아름지기]
이번 전시에서 가장 흥미롭고 새로운 부분은 온지음 맛공방 조은희·박성배 셰프가 만든 ‘개성음식’과 ‘현대화한 고려 상차림’이다. 『통일식당 개성밥상』의 저자이자 이번 전시의 자문을 맡았던 정혜경 호서대학교 명예교수는 “고려 최고의 문화 발달기에 있었던 수도 개성은 음식 문화 또한 고도로 발달한 곳이었다”며 “조선 건국 후 한양 천도와 함께 개성 식문화 또한 자연스레 이동하면서 지금 서울음식의 뿌리가 됐다”고 했다.
우리음식을 연구하는 온지음 맛공방에서 고려시대 대표 음식들을 재현했다. 절창(순대). [사진 아름지기]
황해북도 중서부에 위치한 개성은 바다와 산, 평야 그리고 지척에 임진강·예성강·한강 등 큰 강을 두어 육·해·공 식재료가 풍부했다. 고려 초기에는 불교의 융성으로 채식문화와 차, 차과자가 발달했고, 국제무역도시로 발전하면서 개방적이고 다양한 식문화를 즐겼다. 지리적 위치 덕분에 남쪽 지방의 짜고 매운 맛, 북쪽 지방의 싱겁고 심심한 맛을 모두 포용한 ‘짜지도 심심하지도 않은’ 중용의 맛을 추구하게 됐고 이는 조선시대와 현대의 서울음식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우리음식을 연구하는 온지음 맛공방에서 고려시대 대표 음식들을 재현했다. 쌀·누룩·후추·꿀로 만든 봉래주(봉래춘). [사진 아름지기]
이처럼 장점 많고 미려했던 식문화지만 뒷받침할 문헌과 고조리서가 없기에 이번 전시 준비과정은 꽤나 길고 험난했다. 조은희·박성배 셰프는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의 문집 『동국이상국집』과 고려말~조선초기 문인 목은 이색의 『목은집』에 많이 의존했다”며 “정확한 레시피가 적혀 있진 않지만 두 문인이 평생 사랑했던 개성 음식과 술에 대한 찬양이 가득해서 좋은 참고자료가 됐다”고 했다. 송나라 사신이 쓴 『고려도경』, 중국의 고조리서 『거가필용』과 『제민요술』도 참조했다. 주변국들끼리는 식문화가 자연스레 오갔기 때문이다. 또 개성출신인 매듭장 김은영(간송 전형필 선생의 며느리) 선생과 배우 전원주씨 등을 찾아가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개성음식 이야기를 듣고 조리법과 맛을 익혔다고 한다. “정확한 레시피가 없으니까 당연히 고려시대 음식을 똑같이 복원할 수는 없었죠. 온지음과 아름지기가 추구하는 철학 또한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되 현대인의 일상에 맞게 재해석한다’니까 고려시대 대표 식재료를 두고 ‘내가 만약 고려의 요리사라면 어떤 음식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상상해봤죠. 물론 이런 재해석에도 시대가 추구했던 개념과 철학이 반영됐다는 역사적 검증이 필요해요. 억지로 꾸민 것처럼 보이면 안 되니까요. 무엇보다 음식은 맛뿐만 아니라 시대의 멋도 반영하니까 종교·문학·예술을 두루 공부해서 타당한 근거를 만들어야 했죠. 때문에 주경야독이 따로 없을 만큼 힘들었지만 굉장히 보람찬 시간들이었습니다.”
전시는 11월 15일까지. 관람료 1만2000원. 조은희·박성배 셰프가 차리는 ‘현대화한 고려 상차림’은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 온지음에서 9월~10월 점심·저녁 메뉴로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