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우가 쏟아지는 워싱턴 D.C.의 내셔널스 파크에서 한 어린 소년이 후드티를 깊게 눌러쓴 채 그라운드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형과 누나는 비를 피해 지붕 아래로 대피했지만, 8살 케인 코크런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흠뻑 젖은 옷도 개의치 않았다. 오타니 쇼헤이(LA 다저스)를 가까이서 보겠다는 일념뿐이었다.
폭우 속 15분 훈련, 그리고 달려간 오타니

6일(한국시각) 예정된 다저스-내셔널스전은 폭우로 지연됐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실내 훈련을 택한 가운데, 오타니만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캐치볼과 롱토스, 투구 훈련까지 15분간 비를 맞으며 소화했다.
버지니아비치에서 온 코크런 가족은 이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아버지 조와 케인은 후드티를 깊게 눌러쓴 채 비를 맞았고, 어머니 린지도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자리를 뜨지 않았다. 메이저리거가 되는 게 꿈인 케인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가족이었다.
훈련을 마친 오타니는 더그아웃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비 맞으며 기다리던 코크런 가족에게 직접 달려갔다. 케인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자신이 캐치볼 때 사용하던 공을 건넸다. MLB닷컴은 "케인이 환하게 웃는 가운데 어머니는 눈물을 닦았고, 아버지는 차분하게 사진을 찍었다. 온몸이 젖은 상태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비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사인 희소성 떨어져서 안 해줍니다

오타니의 이 장면을 보면서 한국 야구팬들은 씁쓸해질 수밖에 없다. KBO에서는 팬서비스 논란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승엽이다. 국민타자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팬서비스 논란의 단골 소재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인을 너무 많이 해드렸기 때문에 희소가치가 떨어졌다. 인터넷에서 직거래 되는 걸 보고 '아 내가 해줘서는 안 되는 거구나' 생각했다. 웬만하면 안 해드리려고 한다."

이 영상이 퍼지면서 이승엽은 '대스타지만 팬서비스는 최악'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본인도 이를 인지하고 있어서 후배들 강연에서 해당 영상을 직접 틀며 "부끄럽지만 한번 보시죠"라고 반면교사로 삼으라고 할 정도였다. 2021년에는 "현역 때 더 팬들에게 친근하게 대해줬더라면 하는 후회를 하고 있다"며 공식 사과까지 했다.
KIA 선수들 사인 거절, 공중파 뉴스에 나왔다

2018년에는 KIA 타이거즈 선수들이 경기 후 팬들의 사인 요청을 외면하고 차에 올라타는 영상이 KBS 뉴스에 보도됐다. 어린 소년이 시무룩해하는 장면이 전파를 타면서 온라인에서는 프로야구 선수들의 팬서비스가 미흡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논란이 커지자 프로야구 선수협회가 '팬들에게 사인을 해줘야 한다'는 의무조항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삼성 구자욱은 '삼린이 사인도 거절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KIA에서 팬서비스가 좋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던 안치홍은 SSG로 이적한 뒤 오히려 팬서비스가 좋아졌다는 말이 나왔다. 팀 분위기에 따라 팬서비스도 달라진다는 방증이다.
"오히려 외국인 선수들이 더 잘해줘요"

아이러니하게도 KBO에서 팬서비스가 좋기로 유명한 건 외국인 선수들이다. 한화에서 뛰었던 이브랜드는 퇴근길 콜택시 기사를 기다리게 하면서까지 팬들 사인을 전부 해줬다는 일화가 있고, NC 제이크 스몰린스키는 "팬서비스도 프로야구선수의 또 다른 직업"이라고 말했다.

물론 팬서비스 좋은 한국 선수도 있다. 박용택은 '팬덕택'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유명했다. 시간이 부족해 사인을 못 해주게 되자 팬의 주소를 받아 택배로 사인볼을 보내준 일화는 전설이 됐다. 김상수는 굳이 팬에게 다가가서 사인해주는 모습 때문에 '연쇄 사인마'라는 별명이 붙었고, 이정후도 팬서비스 3대장으로 꼽힌다.
오타니는 그날 홈런도 쳤다
케인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한 오타니는 그날 경기에서도 맹활약했다. 시즌 2호 홈런을 포함해 4타수 2안타 2타점 1득점으로 팀의 8-6 역전승을 이끌었다.

오타니는 팬서비스뿐 아니라 선행으로도 유명하다. 2023년에는 일본 전국 모든 초등학교에 총 6만 개의 글러브를 기부했고, 2025년 1월에는 LA 산불 피해 복구를 위해 50만 달러(약 7억 5000만원)를 쾌척했다. 동료 거스 발랜드의 어머니가 암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거액을 기부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연봉 외 부수입만 1억 2500만 달러(약 1860억원)로 추정되는 슈퍼스타가 검소한 생활과 선행, 그리고 폭우 속에서도 팬을 외면하지 않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 KBO 선수들이 배워야 할 건 야구 실력만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