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가 디자인하고 벤츠 엔진 넣어 쌍용이 만든 요상한 국산 SUV

차명 '렉스턴'은 왕을 뜻하는 라틴어 'Rex'와 분위기, 기품이라는 뜻의 영어 'Tone'의 합성어로 무쏘의 뒤를 잇는 고급 SUV와 걸맞은 위엄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렉스턴 외에도 부여국의 시조이자 고구려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에서 영감을 얻은 '헤모스'라는 이름이 후보에 있었다고 전해지네요. 그냥 버리기에는 이름이 아까웠는지 출시 후 동명의 컨셉트카로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외관은 날카로운 각을 세워 SUV다운 견고함과 강인함을 내세웠던 선대 무쏘와 달리 곡선을 적극 사용, 도시적인 분위기와 풍성한 볼륨감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풍채에서 오는 든든함, 넉넉하게 두른 플라스틱 가니쉬와 캥거루 범퍼로 SUV다운 멋은 충분했고, 디자인이 코뿔소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무쏘의 후속이라는 느낌도 충분했어요.

다만 이 디자인은 당초 계획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었습니다. 개발 초에는 무쏘의 디자인을 담당했던 영국 RCA의 '켄 그린리' 교수가 주도해 직선과 면을 앞세운 디자인으로 추진될 예정이었지만, 회사가 대우로 넘어가면서 개발의 주체가 대우 디자인 포럼과 '주지아로'가 이끄는 이탈 디자인으로 변경돼 지금의 모습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죠.

초기형 렉스턴의 라디에이터 그릴에 뜬금없는 빈 공간이 위치하게 된 건 역시 대우 패밀리룩인 3분할 그릴의 흔적이었습니다. 말만 들으면 쌍용 입장에서는 억울해 보이는데, 막상 공개된 렉스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오히려 좋아'였어요. 출시 전부터 2001년 '우수산업디자인 장관상'을 수상하는 등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인기를 끌던 플래그십 세단 '체어맨'과 '뉴코란도' 등 기존 라인업에도 잘 녹아들었어요.

당시만 해도 SUV라는 명칭조차 익숙하지 않아 지프차라고 불리던 시절이라 각지고 투박한 SUV들 틈바구니에서 유려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품은 렉스턴의 디자인은 소비자들을 매료시켰습니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어필했어요. 어찌 보면 대우의 마지막 선물과도 같았죠. 외주를 많이 주긴 했지만 대우차의 디자인 감각은 탁월했으니까요.

실내에서도 당시 대우차의 향기가 짙게 배어 나왔는데요. 은은한 에메랄드빛 조명과 아예 대우차의 부품을 그대로 사용한 부분들도 있었지만 이 역시 문제가 되진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1%'라는 슬로건에 걸맞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뽐냈기 때문이었죠.

기존의 운전자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당시 트렌드로 자리 잡은 수평형 대시보드로 공간감을 강조했고, 적재적소에 쓰인 우드그레인과 질 좋은 가죽으로 마감한 시트, 특히 베이지톤의 밝은 내장은 기존 SUV의 투박함과는 거리가 먼 단정하면서도 포근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파트타임의 4륜구동 시스템마저도 버튼식으로 깔끔하게 처리하면서 높은 시트 포지션 같은 SUV 특유의 몇몇 포인트를 제외하면 여느 고급 세단의 실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어요.

여기에 최대 3인까지 지원하는 메모리 시트와 8개 스피커의 고급 오디오 시스템, 터치스크린을 지원하는 VCD 내비게이션, 사이드 에어백을 적용하는 등 SUV계의 체어맨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온갖 호화 사양을 아낌없이 투입했습니다.

또 탑승객을 향해 Y자로 벌어지는 컵홀더, 상위 모델에 한해 방위나 고도, 트립 정보 등을 표기해주는 멀티미터 화면이 대시보드 상단에 우뚝 솟아있던 게 유난히 기억에 남네요. 갤로퍼에 있던 물건을 디지털화시킨 건데 오프로드 주행 외에는 그다지 필요가 없는 물건이었지만 밤에 보면 뭔가 멋있었어요.

시트는 3열까지 갖춘 7인승 단일 사양으로 체급에 걸맞은 넉넉한 공간을 제공했습니다. 고급 세단에 나 있던 중앙 암레스트, 뒷좌석 에어벤트뿐만 아니라 앞좌석과 별도로 조절할 수 있는 듀얼 에어컨 기능까지 옵션으로 제공해 가족은 물론 가끔은 중요한 손님을 모시기에도 부족함 없는 거주성을 선사했어요.

3열 공간 역시 당시 기준으로는 제법 쓸만했습니다. 3열 승객을 위한 별도의 공조장치가 추가된 것, 2열이 슬라이딩이 아닌 더블 폴딩 방식이다 보니 타고 내리는 데는 다소 불편했지만, 미니밴 같이 정방향 배치로 싼타페의 '생각하는 의자'처럼 수치감을 들게 하지도 않았고, 특히 갤로퍼와 다를 바 없던 경쟁차 테라칸의 3열보다는 훨씬 나았죠.

적재 공간 역시 만족스러웠습니다. 3열만 접어도 넉넉했고 2열까지 모두 접으면 그야말로 광활한 공간이 펼쳐졌습니다. 뒷유리만 따로 개방해 간단한 물건을 넣고 하나 꺼낼 수 있는 플립 업 글래스도 빠지면 섭한 기능이었죠.

바닥 공간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는 보디 온 프레임 구조 특성상 임의로 단을 높여 3열 시트를 장착하면서 한 뼘 정도의 공간을 손해 보긴 했지만, 덕분에 평평한 바닥이 만들어졌고 남는 공간에는 잡다한 물건을 수납할 수 있는 공구함을 마련해 편의성을 높였습니다.

여담으로 SUV의 3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활용 빈도가 점점 낮아지면서 3열 시트와 공구함을 아예 떼버리고 짐 공간을 늘리시는 분들도 종종 있었어요. 물론 시트 탈거는 원칙적으로 위법이기 때문에 아예 떼버리고 다닐 거라면 5인승으로 구조 변경 허가를 받아야 했지만요.

파워트레인은 당시 '쌍용' 하면 빼놓을 수 없었던 벤츠 파워트레인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무쏘에 탑재했던 5기통 2.9L 디젤 엔진과 5단 수동, BTR의 4단 자동 변속기를 매칭했고 파트타임 4륜구동 시스템을 아예 기본으로 제공해 SUV다운 터프함을 과시했어요. 무쏘의 120마력 엔진을 그대로 활용했기 때문에 신차에 기대한 것 치고는 성능이 다소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긴 했지만, 명불허전 벤츠 엔진의 안정적인 품질과 탁월한 고속도로 주행감으로 이를 상쇄했습니다. 좌우 바퀴의 구동력을 제어해 조향시 안정감을 더해주는 TCS를 옵션으로 제공해 미끄러운 노면에서의 주행 안정성도 높였어요.

얼마 뒤에는 3.2L 가솔린 모델까지 추가해 더 안락하고 편안한 온로드 주행을 원하는 소비자들에게 어필했습니다. 체어맨의 최고 사양에 올라가던 직렬 6기통 그 엔진으로 당대 국산 SUV 중 가장 강력한 성능, '실키 식스'라는 애칭에 걸맞게 럭셔리 SUV다운 정숙성과 고급스러운 주행 질감을 선사했죠.

또 디젤에 쓰인 파트타임 방식이 아닌 아우디 콰트로와 비슷한 풀타임 4륜구동까지 맞물려 주행 성능 하나는 최고인데 이게 연비가 정말 사악했어요.

본 콘텐츠는 해당 유튜브 채널의 이용 허락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2003년형 연식 변경 모델부터는 주력인 디젤 엔진을 개선해 출력과 토크를 소폭 끌어올려 주행이 좀 더 쾌적해졌습니다. 최고급형에 새로 추가된 번쩍이는 크롬 휠의 존재감이 상당했죠. 이에 더해 어두운 곳에 가면 자동으로 조명이 켜지는 광센서 이동식 재떨이, 뒷좌석 열선 시트, 3열 시트와 트렁크 바닥에 플라스틱 커버를 덧대 오염과 손상을 방지하는 등 편의성도 높였어요.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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