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생명의 기원 찾는 과학자들
1982년 리보자임(ribozyme)의 발견은 한 세대 전인 1953년 DNA 이중나선 발견 이후 생명과학계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일 것이다.
'촉매 활성을 지닌 단백질'이라는 효소의 정의를 바꾼 이 발견을 해낸 화학자 토머스 체크가 지난 6월 회고록 'The Catalyst(촉매)'를 펴냈다. 1947년생으로 미국 콜로라도대 화학과 신진 교수일 때 해낸 이 발견으로 체크는 1989년 불과 42세에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책에서 리보자임뿐 아니라 RNA의 다양한 측면을 조명하며 체크는 "20세기 후반이 DNA시대였다면 21세기는 RNA시대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코로나19 mRNA 백신의 화려한 등장은 이를 상징하는 사건인 셈이다.
● 심오한 의미 깨닫지 못해
책은 꽤 재미있는데 특히 6장 '기원'을 읽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리보자임이 발견되고 4년이 지난 1986년 미국 하버드대의 분자생물학자 월터 길버트는 'RNA 세계'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생명의 기원에서 'DNA(정보)가 먼저냐 단백질(촉매)이 먼저냐?'라는 풀리지 않을 것 같던 '닭과 달걀' 문제가 리보자임의 발견으로 해결될 실마리를 얻은 것이다. RNA가 정보와 촉매 두 역할을 하는 초기 생명체가 존재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리보자임을 발견한 화학자 체크는 1년이 지나도록 이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리보자임 발견 이후 여기저기서 강의 초청을 받은 체크는 1983년 11월 캘리포니아대 LA 캠퍼스의 '진화 그룹'의 요청으로 강의를 할 때 "리보자임이 지구에서 생명이 어떻게 시작했는지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고 당황했다.
연구실로 돌아와 관련 문헌을 살펴보며 체크는 생명의 화학적 기원이라는 분야를 접하고 자신의 발견이 지닌 심오함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상상력(또는 통찰력)이 부족해 'RNA 세계' 같은 멋진 신조어를 떠올리지는 못했다.
1986년 1월 체크는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를 찾아 브루스 알버츠 생화학과 교수와 담소를 나누다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DNA 재조합 현상을 규명해 주목을 받은 하버드대의 젊은 유전학자 잭 조스택이 그동안 하던 연구를 접고 본격적으로 리보자임 연구에 뛰어들 것이라는 얘기였다.
평소 생명의 기원이 과학이 답하지 못한 가장 심오한 질문이라고 생각해온 조스택은 리보자임이 열쇠라고 생각하고 잘나가던 연구까지 포기하며 도박을 건 셈이다.
생명의 기원 문제에 눈을 떠 실험을 준비하고 있던 체크는 충격을 받았다. 조스택 같은 천재가 뛰어들면 자신은 경쟁이 안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체크도 생명의 기원과 관련한 연구를 진행했고 1988년 리보자임이 RNA중합효소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였다. RNA가 정보(염기서열)를 복제하는 반응을 촉매할 수 있다는 발견으로 RNA 세계 가설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생명의 기원 분야에서 체크의 기여는 여기까지로 그의 우려대로 조스택의 실험실에서 놀라운 결과가 잇달아 나왔다.
조스택은 뛰어난 박사과정 학생인 제니퍼 다우드나와 함께 회심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스스로를 복제할 수 있는 리보자임을 만드는 연구로 1991년 자신의 염기서열과 상보적인 가닥을 합성하는 리보자임을 설계하는 마술 같은 실험에 성공했다.
학위를 받은 다우드나는 체크의 실험실에 박사후연구원으로 와서 리보자임 구조 규명 연구에 뛰어들어 고전하다 예일대에 자리를 잡고 나서 1996년에야 성공하는 대단한 집념을 보여줬다.
● 잠깐의 공동연구로 노벨상 받아
이어지는 7장 '젊음의 샘은 죽음의 함정인가?'는 텔로미어와 텔로머라제 얘기로 여기에 조스택이 또 등장한다. 텔로미어는 진핵세포 염색체의 끝부분으로 복제가 진행될수록 짧아져 결국 복제 능력을 상실한 노화 세포가 된다. 그 예외가 줄기세포와 암세포로 텔로미어를 복구하는 효소인 텔로머라제의 유전자가 활성화된 상태다.
이야기는 1980년 한 학회에서 당시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였던 엘리자베스 블랙번과 조스택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테트라하이메나라는 원생생물의 미니염색체 말단에서 특정 DNA 염기서열이 반복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블랙번은 이에 대해 효모의 염색체를 연구하던 조스택의 조언을 구했다.
2년 뒤 두 사람은 공동연구를 진행해 말단 서열을 효모에 넣었을 때 일어나는 일을 알아보기로 했다. 실험 결과 말단 서열이 보존된 건 물론이고 놀랍게도 비슷한 염기서열 반복이 추가됐다. 염색체 말단의 반복 서열이 염색체를 안정화하고 이 부분을 늘리는 효소도 있을 것임을 보여주는 결과다.
그 뒤 조스택은 앞서 말했듯이 리보자임 연구로 방향을 틀었고 블랙번은 대학원생 캐럴 그라이더와 함께 텔로미어 반복서열을 만드는 효소인 텔로머라제를 밝히는 연구에 뛰어들어 1989년 마침내 성공했다. 책에 이 얘기가 나온 건 텔로머라제가 DNA 반복서열을 만드는 주형(template)으로 RNA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텔로머라제 규명은 리보자임만큼 놀라운 성과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중요성이 인정돼 20년이 지난 2009년 세 사람은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조스택의 입장에서는 우연한 만남으로 잠깐 공동연구를 하고 생명의 기원 연구로 넘어간 뒤 잊고 있다가 상을 받은 셈이다.
● 빗물이 코아세르베이트 단단하게 해
얼마 전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에서 생명의 기원과 관련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소개한 기사를 읽었다. 초기 지구에서 소위 원형세포(protocell)라고 부르는 원시적인 세포가 등장하는데 빗물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읽다 보니 해당 논문의 저자로 잭 조스택이 나오는 게 아닌가.
체크의 책 '촉매'에서 조스택이 생명의 기원 연구로 방향을 틀 거라는 대화를 나눈 게 38년 전인데 여전히 현역으로 뛰고 있다는 말이다(조스택은 1952년생으로 72세라 사실 예외적인 경우는 아니다). 알고 보니 조스택은 2022년 하버드대에서 시카고대로 옮겨 협동과정인 '생명의 기원 계획(Origin of Life Initiative)'를 이끌고 있다.
리보자임 연구에서 꽤 성과를 냈음에도 조스택을 괴롭힌 건 원형세포 딜레마였다. 리보자임 같은 물질(무생물)에서 생명체가 등장하려면 외부 환경과 분리돼 내부에 리보자임과 그 재료가 되는 분자들이 안정적으로 농축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다.
세포막의 주성분인 지질의 경우 초기 지구에서 쉽게 만들어질 수 있어 원형세포의 막을 이룰 수 있지만 물질 교환이 어렵다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오늘날 세포막에는 통로단백질이 박혀있어 그 일을 하지만 초기 생명체에서는 이런 구조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몇몇 연구자들은 용액에서 막이 없으면서도 안정한 물방울을 형성하는 구조인 코아세르베이트(coacervate)를 소환했다.
1930년대 소련의 생화학자 알렉산드르 오파린은 초기 지구의 환원성 대기에서 다양한 유기 분자가 만들어졌고 특정 조성의 용액에서 자발적으로 물방울이 형성되면서 유기 분자가 농축되고 부피가 커지면 마치 세포가 분열하듯 증식하며 점차 복잡해져 결국 생명체가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1953년 원시대기 조건에서 아미노산이 합성되는 걸 보여준 밀러-유리 실험으로 오파린의 가설은 힘을 얻었지만 같은 해 DNA 이중나선 발견으로 생명의 기원이 정보의 문제가 되면서 물리화학 현상에 기반한 코아세르베이트는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런데 코아세르베이트 내부에서 RNA가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RNA 세계의 플랫폼으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아무래도 막이 없다 보니 RNA가 쉽게 드나들어 제대로 농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작은 방울이 합쳐져 커다란 방울을 형성하기 쉽다는 문제도 있다. 이런 식이면 원형세포의 진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우연히 정제수, 순수한 물이 코아세르베이트 방울을 안정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제수가 방울의 바깥층에 있는 분자들의 정전기적 상호작용을 유도해 견고하게 만든 결과다. 이 얘기를 들은 조스택은 이런 식으로 안정화된 코아세르베이트에서 RNA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양전하를 띤 분자인 PDDA와 음전하인 ATP로 만든 코아세르베이트 큰 물방울을 증류수에 넣고 저어주면 작은 물방울 쪼개지며 안정화돼 수개월이 지나도 합쳐지지 않고 유지됐다. 그리고 함께 들어있는 RNA나 단백질 분자가 드나드는 빈도도 크게 떨어졌다.
분자 덩치가 클수록 이런 경향이 커져 6~8개 염기 길이의 RNA는 코아세르베이트 방울에 들어가면 수분을 머무는 반면 35개 염기 길이 이상인 RNA는 수일을 머물렀다. 리보자임도 꽤 오래 머물 수 있다는 얘기다.
증류수는 이온을 전혀 함유하지 않은 물로 빗물 역시 이온이 거의 없어 비슷한 효과를 보인다. 이번 연구에 따르면 초기 지구에서 형성된 코아세르베이트 내부에서 리보자임이 진화할 수 있는 조건이 의외로 쉽게 형성됐을 수도 있다. 코아세르베이트를 안정하게 만드는데 빗물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또 리보자임의 재료인 작은 RNA는 쉽게 드나들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인 장점이다.
8월 21일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실린 논문에서 저자들은 "초기 지구에서 막이 없는 구획이 자라고 나뉠 수 있고 내부의 적절한 RNA 화학은 RNA 복제가 일어나게 해 진화를 이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썼다. 코아세르베이트 내부에서 자기복제 리보자임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다음 단계로 보인다.
책 '촉매' 6장 말미에서 체크는 자신이 생명의 기원 분야에 큰 관심이 없다고 고백했다. 그가 보기에 생명의 기원은 과학의 질문이라기보다는 역사의 질문이고 아무리 그럴듯한 증거로 RNA 세계 가설을 '증명'했다고 주장하더라도 이는 제안일 뿐 생명이 정말 RNA로 시작했는지는 결코 입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연구를 해왔다는 점에서 체크와 조스택 모두 행복한 과학자들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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