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영 16강 탈락…백민주 ‘12방 뱅크샷’으로 여제 무너뜨렸다

고양 킨텍스 PBA 스타디움의 공기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여느 때처럼 차분히 큐를 잡은 김가영(하나카드)은 오늘도 ‘당구 여제’라는 이름값을 증명하려 했다. 하지만 결과는 뜻밖이었다. 백민주(크라운해태)가 쏟아낸 12방의 뱅크샷이 김가영의 리듬을 완전히 흔들어놨다. 결국 세트스코어 1대3(6-11, 2-11, 11-10, 9-11). 김가영은 휴온스배 LPBA 챔피언십 16강에서 탈락하며 시즌 3연속 우승 도전에 제동이 걸렸다.

경기 초반부터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1세트, 김가영은 특유의 정교한 스트로크로 한 점씩 따라붙었지만 백민주의 ‘감각 플레이’가 돋보였다. 단순히 득점만이 아니라, 포지션을 잡는 위치 하나하나가 계산되어 있었다. 6-11로 세트를 내주자 김가영의 표정에는 살짝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러나 누구도 2세트에서 벌어질 ‘백민주의 폭풍’을 예상하지 못했다.

백민주는 2세트에서 무려 세 차례의 연속 뱅크샷을 성공시켰다. 특히 5이닝에서 구석으로 빠지는 공을 완벽히 각으로 맞추며 회전으로 포켓을 찾아가는 장면은 관중의 탄성을 자아냈다. 김가영은 특유의 침착함으로 대응했지만, 상대의 감각이 워낙 뜨거웠다. 결국 2세트 2-11로 완패. 세트 스코어 0-2로 몰리며 벼랑 끝에 섰다.

3세트는 ‘여제의 자존심’이 살아났다. 9이닝까지 팽팽한 승부를 이어가던 김가영은 10-10에서 숨 막히는 한 방을 성공시켰다. 절묘한 끌어치기로 공을 짧게 꺾어 득점에 성공, 11-10으로 세트를 따내며 한숨 돌렸다.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반전되는 듯했다. 그러나 마지막 4세트에서 다시 백민주의 ‘한 방’이 김가영의 길을 막았다.

김가영은 초반 5-3 리드를 잡았지만, 9이닝째 들어 백민주의 집중력이 다시 폭발했다. 네 점을 연속으로 올리며 단숨에 경기를 뒤집었다. 마지막 공을 넣은 백민주는 조용히 큐를 내려놨다. 그리고 김가영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9-11. 그렇게 김가영의 휴온스배 여정은 16강에서 멈췄다.

이날 패배는 단순한 1패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김가영은 이번 시즌 4차전(SY베리테옴므)과 5차전(크라운해태)에서 연달아 우승하며 그야말로 ‘전성기 2막’을 쓰고 있었다. 3연속 우승에 도전하는 여정이었기에 팬들의 기대는 컸다. 하지만 고양의 공기는 김가영에게 조금 낯설었다. 상대는 58개월 만에 김가영을 잡은 백민주. 2022년 하이원리조트배 준결승 이후 무려 4년 10개월 만의 리턴매치였다. 그리고 그 긴 세월의 공백 끝에 백민주는 ‘완벽한 반격’을 성공시켰다.

이번 승리로 백민주는 LPBA 무대에서 확실히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1996년생, 올해 28살의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유망주’로 불렸지만 이제는 확실한 강자로 자리 잡았다. 국내 여자 3쿠션계에서는 이미 손꼽히는 실력자다. 정교한 타격감에 강한 집중력을 더한 플레이는 어느덧 완성형에 가까워졌다. 이번 대회에서도 그는 섬세한 스트로크와 과감한 공격력을 동시에 보여줬다. 단순히 감에 의존하는 선수가 아니라, 계산된 경기 운영을 바탕으로 상대의 흐름을 끊는 데 능하다.

백민주의 가장 큰 장점은 ‘멘탈’이다. 이날 경기에서도 3세트 한 점 차로 세트를 내줬음에도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곧바로 4세트 첫 이닝부터 세밀한 뱅크샷으로 포문을 열었고,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하며 경기를 매조지했다. 이런 집중력은 그가 지난 시즌 세운 ‘6연승, 38연승’이라는 대기록에서도 드러난다. 38연승은 LPBA 역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기록으로, 백민주가 얼마나 꾸준한 선수인지 보여주는 지표다.

반면 김가영에게 이번 탈락은 아쉬운 경고음이다. 통산 4승에 도전하던 시즌이지만, 체력과 집중력 모두 피로 누적이 보인다. 특히 장기전에서의 집중력 유지가 과제다. 예전 같으면 단 두 세트로 끝낼 수 있는 경기를 풀세트까지 끌고 가는 경우가 늘었다. 하지만 여전히 김가영의 이름값은 여전하다. PBA가 출범한 이래 그는 LPBA를 대표하는 상징 같은 존재다. 끊임없이 새 기술을 연구하고,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는 그의 자세는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도 여전히 빛난다.

이번 휴온스배는 김가영에게 ‘잠시 멈춤’의 의미가 될 것이다. 2개월 전 NH농협카드배 3차전 이후 16강에서 탈락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김가영이 보여온 회복력은 누구보다 빠르다. 무엇보다 ‘패배를 통해 배우는 법’을 잘 아는 선수다. 다음 대회에서 다시 그가 큐를 들고 테이블 앞에 서면, 오늘의 고개 숙임은 새로운 시작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백민주는 이번 승리로 시즌 8강에 이름을 올렸고, 남은 경기에서도 상승세를 이어갈 전망이다. “이제는 김가영을 이겨도 놀랍지 않다”는 팬들의 말이 단순한 찬사가 아니다. 그만큼 백민주의 경기력이 성숙해졌다는 뜻이다. 그녀는 이제 ‘도전자’가 아니라 ‘새로운 여제 후보’로 불릴 만하다. 김가영이 이룩한 왕좌를 넘보는 선수가 하나둘 등장하는 지금, LPBA는 그야말로 세대교체의 변곡점에 서 있다.

김가영의 침몰, 그러나 여제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백민주의 비상, 그 이름은 이제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다. 당구대 위에서 울리는 공의 부딪힘처럼, 두 사람의 여정은 앞으로도 팽팽한 긴장감으로 이어질 것이다.

Copyright © 구독과 좋아요는 콘텐츠 제작에 큰 힘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