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의료공백에 107만 희귀질환자들 ‘통증의 지옥’ [심층기획-희귀질환자 ‘통증의 지옥’]

김나현 2024. 10. 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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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병원만 가능한 수술·시술, 전공의 이탈에 최대 29% 축소
희귀질환자에 대형병원은 ‘유일 선택지’
의정 갈등에 제때 진료 못받는 환자↑
신경차단술 등 전년比 21.9%나 줄어
“복지부 등에 치료 방법 찾아달라 하니
직접 알아보라고 해… 원망 넘어 증오
진통제로 버티거나 아니면 죽거나…”
작년 질병청 등록 희귀질환 1248개
전공의 떠난 자리 공백 전문의가 채워
업무 가중에 치료제 연구·개발도 뒷전
“진통제로 버티거나 아니면 죽거나. 지옥이 따로 없어요.”
 
10년째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Complex Regional Pain Syndrome) 투병 중인 조재희(32)씨가 전공의 파업 여파로 불어닥친 의료대란 속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못으로 뼈를 긁는 통증에서 시작해서 돌발통이 찾아오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찾아와 한 주에 이틀도 제대로 못 잔다”며 “매주 신경차단술을 받아 몇 시간이라도 통증을 덜었는데, 3월 이후로 아예 못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조씨가 앓고 있는 CRPS는 ‘악마의 통증’이라 불릴 정도로 극심한 통증이 지속해서 나타나는 희귀난치성 질환이다. 이들이 겪는 통증 지수(NRS)는 8∼10점대로, 통상 7점대로 평가되는 출산이나 허리디스크보다 극심한 수준이다. 신경차단술 등 통증 완화 시술로 몇 시간이나마 잠을 청하던 조씨는 전공의 사직 이후로는 시술은커녕, 진통제 처방을 위한 진료 예약조차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조씨는 “얼마 전엔 혈관에서 피가 너무 많이 나서 보건복지부, 시청, 보건소에 방법 좀 찾아달라고 했는데, 잘 모른다며 직접 알아보라고 하더라”며 “의료 현장을 떠난 의사들도 실망스럽고, 정부에는 원망을 넘어 증오를 느낀다”고 말했다.

3일 개혁신당 이주영 의원실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상급종합병원의 희귀질환 수술 건수는 전공의 파업 이후 반년(2∼7월)간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0%가량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야의정 협의체 등 의정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치권 논의가 공회전을 거듭하는 사이, 희귀난치성질환 당사자들은 낭떠러지에 내몰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단 하나의 선택지 빼앗긴 희귀질환자들

국민건강보험의 ‘중증질환 산정특례 진료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희귀·난치성질환으로 진료받은 환자 수는 총 107만4897명이다. 이들에게 상급종합병원은 ‘유일한 선택지’로 꼽힌다. 유병인구가 2만명 이하거나 진단이 어려워 유병인구를 알 수 없는 희귀난치성질환 특성상 중·소형 병원에선 질환 관련 이해도가 낮아 희귀질환자들에 대한 치료를 꺼리는 탓이다.
이용우 CRPS 환우회장은 “통증이 너무 심해 동네 병원에서라도 치료받으러 갔는데, 원래 다니던 대형병원으로 가라고 거절당했다”며 “희귀질환에 대해서도 잘 모르기 때문에 통증 완화를 위한 마약성 진통제 처방을 원하면 마약 중독자로 오해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척수자극기 수술을 10월에 받기로 돼 있었는데, 12월로 밀렸다”며 “희귀질환은 대학병원(상급종합병원)급에서만 다룰 수 있는데, 의료대란으로 희귀질환자들은 정말 갈 곳이 없어졌다”고 토로했다.

특히 이날 이 의원실로부터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희귀질환 환자들뿐 아니라 암 환자 등 극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들의 통증을 완화해주는 수술·시술들 역시 모두 20∼30% 감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통증 완화에 가장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시술인 신경차단술 횟수는 올해 2월부터 7월까지 47만771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60만2598건 대비 21.9%나 줄어들었다. 난치성 척추통증 환자들뿐 아니라 암 환자의 통증완화 치료를 위한 척수강내 모르핀펌프 삽입술은 같은 기간 29.6% 감소했고, 척수자극기 삽입술도 23.4%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정부는 3차병원(상급종합병원)으로 몰리는 경증·비응급 환자 수요를 1∼2차 병원(동네 병·의원·종합병원)으로 분산하는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의정 갈등이 파국으로 치달으며 희귀질환 환자들의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나아가 전공의가 떠난 자리를 전문의들이 채우면서 진료를 제때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늘고 있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질병이라 불리는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는 이현호씨는 제때 치료받지 않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경직 증세가 온다. 이 병의 특징은 호전되는 듯하다가도 재발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씨는 “진료 예약을 하려고 해도 전화조차 안 되는 때가 많다”며 “밤중에 병이 재발하면 응급실에 가야 하는데, 당직이 없거나 있더라도 희귀질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환자들 대부분 불안에 떨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희귀질환의 경우 조기 진단과 치료가 핵심인데, 의료대란으로 골든타임을 놓치는 환자들이 생길까 걱정”이라고 밝혔다.

손목, 팔꿈치, 무릎 등이 구부러지거나 뻣뻣하게 마비되는 원인불명의 질환 류마티스 관절염을 치료 중인 임유순씨도 “기존에는 진료 보기 1시간 전에 검사를 했다면, 지금은 4∼5시간 대기가 기본”이라며 “그동안 통증을 참으며 병원에서 마냥 기다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의평원 망가지면 의학교육 망가진다” 의과대학 교수들이 3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열린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평원) 무력화 저지 결의대회’에서 손팻말을 들고 정부를 비판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들은 의평원의 인증을 통과하지 못한 의대에 1년 이상의 보완 기간을 부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교육부의 시행령 개정안에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이날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으로 의대 교수와 의대생, 학부모 등 800명이 참석했다. 이제원 선임기자
◆후순위로 밀린 치료제 연구·개발

희귀질환 환자들의 또 다른 걱정은 의료대란 속에서 치료제 개발을 위한 연구가 늦어진다는 점이다. 지난해 질병관리청에 등록된 희귀질환은 1248개로,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에 따르면 이 중 5% 수준만이 치료제가 존재한다. 대부분은 하루하루 고통을 감내하며 여러 수술이나 약물로 진행 속도를 늦추는 식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이에 환자들은 상급종합병원 연구진의 치료제 연구·개발의 성과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전공의가 떠난 자리의 공백을 전문의가 모두 채우는 과정에서 연구·개발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최종범 아주대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는 “환자는 하루에 50∼60명씩 보고 있다”며 “연구는 사치고, 진료 볼 시간도 없다”고 털어놨다. 최 교수는 “희귀질환 연구라는 게 기본적으로 인력과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라며 “전공의가 진료 부담을 덜어주는 시간에 교수들과 전임의가 연구하는 것인데, 지금은 진료에 100% 매달릴 수밖에 없는 엉망진창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손·발 마초신경이 발달을 안 해 손발에 마비가 오는 ‘샤르코마리투스’ 병을 앓고 있는 김재학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장은 “의료대란으로 환자들만 하루하루 피가 마른다”고 토로했다. 그는 “하루빨리 치료제 나오길 희망하고 있는데, 교수들의 업무가 너무 가중되니 진료만으로 벅차다고 한다”며 “또 희귀질환은 전문의가 된다고 하루아침에 치료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고 많은 경륜이 필요한데, 전공의가 돌아오지 않아 지금 계신 교수님들의 후임이 없어지면 어떡할까 하는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개혁신당 이주영 의원은 “현재의 희귀질환 환자들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미래의 희귀질환 환자들은 해당 질병이나 치료법을 배운 의사가 없어 치료받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우려된다”며 “희귀질환 환자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의료 인프라를 강화하고,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나현 기자 lapiz@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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